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cm Feb 18. 2020

<B급 기자 막전막후> 고졸과 언론사 공채

기자가 되는 유일한 매뉴얼인 공채는 철옹성 같았다. 그걸 넘지도,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애초에 기자로서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4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언론고시’를 준비했다. 기자, PD, 아나운서 등을 꿈꾸는 사람들을 ‘언론고시생’이라고 부른다. 공무원이 되려는 취준생을 ‘공시생’이라 하는 것처럼, 언론사에 취업하려는 취준생을 ‘언시생’이라고 한다.

 

사실 언론고시는 잘못된 표현이다. 언론인이 되는 과정이 워낙 까다롭고, 국가고시처럼 문턱이 높다는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또 언론은 이른바 입법, 사법, 행정에 이은 제4의 권력이라는 무게감 탓에 언론사 입사 시험이 ‘고시’로 격상된 듯하다.

 

기자는 직군 특성상 채용인원이 적다. 반면 경쟁률은 수천수백 대 일에 달할 만큼 치열하다. 수년간 기자가 되기 위해 공채를 준비한 ‘장수생’도 아주 많다.

  

언론사 채용 정보는 많지 않았다. 주변에 기자를 준비하는 지인도 없어 정보 얻기가 더 어려웠다. 몇 날 며칠 인터넷을 뒤진 끝에 국내 최대 언론인 및 언론 지망생 커뮤니티인 ‘아랑’을 찾았다. 일명 ‘언론인을 꿈꾸는 카페-아랑’은 언론 지망생들의 성지다. 회원수가 무려 15만명에 달한다. 국내 언론사 입사 정보와 각종 스터디 모임이 이곳에 있다. 기자를 준비하면서 하루에 수십 번씩 아랑을 드나들었다. 현직이 되어서도 나는 1일 1아랑을 했다.  

 

언론사 공채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아랑에 있는 수많은 후기와 조언을 종합하면 나는 절대 기자가 될 수 없었다. 언론사 공채에서 기자직에 지원하려면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대학과 스펙이다. 나는 고졸이고, 무스펙자였다.

대학은 그나마 괜찮았다. 대부분 언론사가 채용 지원 조건으로 4년제 대학 학위를 요구했지만, 일부 방송사와 진보 언론사는 학력 제한이 없었다. 고졸도 지원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문제는 스펙이다. 학력제한이 없는 언론사조차도 각종 스펙이 있어야 지원할 수 있다. 기자가 되려면 공인국어시험과 공인영어시험 성적이 필수다. 한국어와 영어점수 성적을 제출해야만 입사 지원이 가능하다.   


나는 무스펙자여서 언론사 공채에 지원할 수 없었다. 스펙이라고는 영어회화 시험인 오픽이 유일했다. 배낭여행을 다녀온 직후여서 영어 회화에 자신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오픽시험을 치러 IM3를 취득한 게 전부였다. 이마저도 공채 때는 쓸모없었다. 대부분 언론사가 토익 점수를 요구했다.


언론사 입사 시험도 아주 큰 난관이었다. 서류전형에 통과한 지원자는 4~5차에 걸친 입사 시험을 치른다. 통상 1차 서류전형, 2차 필기시험(상식, 종합교양, 논술, 작문), 3차 실무능령평가(인턴), 4차 실무면접, 5차 최종면접 등으로 구성돼 있다. 고3 수험생이 된 기분이었다.

일찍이 언론사 공채를 접었다. 언론사 공채를 준비하는 건 부질없는 ‘노오력’과 마찬가지였다. 이 난관을 돌파할만한 강점이 나에겐 하나도 없었다. 어느 순간 열심히 해봤자 '학벌 앞에서 모든 게 부질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랑에서 만난 기자 준비생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나는 이들과 경쟁이 절대 안 된다는 걸 확신했다. 함께 공부한 스터디원들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혹은 해외 유학파 출신이 많았다. 대부분 학부 시절부터 기자 준비반을 거쳤거나, 언론사 부설 아카데미에서 체계적인 글쓰기를 공부한 상태였다. 반면 나는 체계적인 글쓰기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언론사에서 운영하는 부설 아카데미에 등록하려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80~90만원에 달하는 수업료가 나에게는 아주 큰 부담이었다. 자구책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글쓰기 강좌를 들었다. 한 달 과정이었고, 수강료는 10만원이었다.


현실적으로 고졸이 기자, 특히 메이저 언론사에 입사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각 분야에서 성공 신화를 쓴 고졸 출신들의 미담 기사는 쏟아질 듯 많았지만, 고졸 기자에 관한 기사와 정보는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수많은 언론이 '학력 사회가 빚어낸 병폐'와 '차별받는 고졸 출신'이라는 주제로 기획기사를 썼지만, 정작 고졸 출신 기자는 이 바닥에 없었다.


보수논객이자 월간조선 기자 출신인 조갑제와 소설가이자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김훈이 고졸 출신이라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이들 모두 대학 중퇴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별세한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도 고졸이라고 하더라. 언론계 선배들은 하나 같이 그때 그 시절이었으니깐 가능한 일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데이터도 고졸 기자는 굉장히 소수라고 말한다. 한국 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한 ‘2017년 한국 언론 연감’에 따르면 전국의 신문, 방송, 뉴스통신, 인터넷 언론사 소속 기자 1677명을 대상으로 최종학력을 조사한 결과 고졸 이하는 1.1%였다. 응답한 기자들의 최종 학년은 대학교(4년제) 졸업이 70.1%로 가장 많았다. 대학원 석사(과정 포함)는 22.7%, 박사(과정 포함)는 3.6%인 것으로 나타났다. 2, 3년제 대학 졸업자는 2.6%, 고졸 이하는 1.1% 비율이었다.

 

한국신문산업 종사자들의 전체 학력을 봐도 고졸은 소수다. ‘2018년 한국언론 연감’에 따르면 대학 졸업이 3만 2379명(76.5%), 전문대 졸업이 4093명(9.7%), 대학원 졸업이 3071명(7.3%), 고교 졸업 이하가 2803명(6.6%)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바닥에 고졸이 없는 건 기자가 엘리트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기자가 엘리트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1997년 기자들과 술자리에서 한 기자에게 "어느 대학 출신이냐"라고 물었다. 이 기자는 "고려대 출신"이라고 답했다. 이회창 전 총재는 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엔 그 학교(고려대) 나오고도 기자 될 수 있나."


이 발언으로 이회창 총재가 ‘학벌주의자’라고 큰 비난을 받았지만, 기자의 위치와 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는 여전히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직업이다. 국내 주요 메이저 언론사(10대일간지+지상파 방송 3사+ 종편 4사+YTN+연합뉴스) 기자들 상당수가 SKY 혹은 명문대 출신이다.


아랑의 자유게시판에 기자 학벌과 관련된 질문이 그치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한 기자 지망생이 대학교 중퇴를 고민하며, '학력을 보지 않은 언론사'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중략) 고등학교 때도 이런 걸 배워서 뭐 하나 하면서 자퇴를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대학교 와서도 이리저리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다양한 사람들 만나면서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벌 자체만 보면 나쁘지는 않은데 별 미련은 없고, (중략) 역시 대학 중퇴는 무리수라는 느낌이지만은, 한겨레나 시사in 같은 경우 나이와 학력을 따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와 같은 언론사가 더 있을까요? 있다면 휴학 기간에 한 번 도전하고 싶네요."

 -하XXX- 2018.04.08. 22:50

 

사람들은 중퇴를 말리며, 학벌이 좋을수록 언론사 입사에 유리하다고 댓글을 달았다.  

 

‘선택지를 줄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대학 졸업 요구하는 곳도 많을 텐데 이왕이면 졸업은 하시길..’

-BXXXXXXX-

‘학력을 안 본다는 게 대학 중퇴도 괜찮다는 건 아닌 곳이 대다수일 겁니다. 혹여나 기자의 꿈을 접는다면 대학 졸업장은 더더욱 간절해질 확률이 높죠. 학교 다니는 게 본인의 능력 향상에 심각한 해가 되기 때문에 자퇴하려는 게 아니라 굳이 대학 안 나와도 내 능력으로 기자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냥 졸업장 따 두세요. 언론사는 굉장히 보수적인 회사입니다. 글 좀 쓴다고 대학 중퇴생 뽑아 쓸 정도로 개방적이지 않습니다.’ -도XXXXXXX-

한겨레나 시사in 기자들 출신학교 한번 조사해보세요. 그러면 생각이 잡히실 듯.’ -X-

‘현직입니다. 대졸 아닌 기자 주변에 없습니다.’-맥XXXXX-

‘한겨레가 대학 안 본다니요 ㅋㅋ 중앙일간지 기자 중에 적어도 국민대나 지거국 밑 대학교 출신 한 명도 못 봄.’ -nxxx-


언론사 공채 제도는 철옹성 같았다. 고졸과 대비되는 학벌과 스펙이 기자의 매뉴얼로 자리 잡았다. 이 매뉴얼을 따라야만 기자로서 자격이 주어진다. 기자 지망생들이 언론사 공채에 목숨을 거는 건 '제대로 된 기자'가 되는 길이 오직 이것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론사 공채 시스템을 깎아내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공채의 효용성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저 처지가 곤궁한 고졸 기자 지망생 입장에서 이야기해 봤다.


패자는 말이 없다.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일찍 패배를 인정했다. 매뉴얼대로 살지 않았고, 그건 다른 말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거다. 기자로서 자격 조건을 만들어 갈 수 있었지만, 게으른 탓에 하지 못했(?)다. 사실 하기 싫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게 뻔하니깐. 어쨌든 언론사 공채의 벽을 넘지 못한 건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오상식 차장의 이 대사에 씁쓸하면서도 공감했다.

"기회에도 자격이 있는 거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빌딩 로비 하나 밟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는 줄 알아? 기본도 안된 놈이 빽하나 믿고 에스컬레이터 타는 세상, 그런 세상인 것도 맞지. 그런데 나는 아직 그런 세상 지지하지 않아."

-미생 2화  중-


당시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고졸인 내가 기자가 되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고, 과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기자질을 꼭 하고 싶다.

이전 11화 <B급 기자 막전막후> 인도 배낭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