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라는 터널에서 벗어나며
브런치에 마지막으로 글을 쓴 지 5달 하고도 반 정도가 지났다. 5달 동안 내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먼저 연애를 시작했다. 스님처럼 머리를 싹 밀어 보기도 했다. 다시 시험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는 채 2주일이 안 됐다.
부정적 면으로는 자해를 했다. 또 누군가에게 버림받았고,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다. 낙동강은 떨어지기에는 꽤나 무서운 장소였다. 친구가 자살시도를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이 우리 집에 찾아오는 불쾌한 경험도 겪었다. 연애는 110여 일만에 끝났고, 1년 넘게 열심히 키우던 율마가 썩어서 죽어버렸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지 않은 날이 몇 달이나 지났으며, 종이와 활자를 전혀 읽지 않았다. 연필을 아예 잡지 않아서 공부를 처음 시작하려고 하니 손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일 정도였다.
부정적인 일도 많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괜찮다. 좋아졌다.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약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했는지 모른다. 1년 반 동안 해온 상담을 내가 내면화해서 훈습의 과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나는 좋아졌다. 다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여자 친구는 바람을 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다음 배신감과 분노가 솟아올랐다. 화는 이내 탄식과 놓아줌으로 바뀌었다. 나는 상담을 통해 공격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이 나와 상대방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인지 배웠다. 거기서 바람을 핀 여자 친구를 힐난하고 욕을 쏟아낸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내 마음이 더 안 좋아지고, 우리의 추억이 기억하기 싫은 악몽으로 변했을 거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 사실을 실감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쉽게 놓아줄 수 있었고 마지막을 욕지거리 대신 잘 지내라는 안부인사로 대신했다. 헤어진 후 공허함과 외로움, 조금의 허망함을 느꼈다. 하루는 주말 밤에 공황이 와서 친구에게 전화를 해 3시간이 넘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빠르게 내 하루에서 지워져 나갔다.
그간은 연애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더 이상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남는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했다. 우울증이 심하던 1년 전과는 달리 누워 있으면 일어나고 싶었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접어뒀던 책장을 다시 펼치기로 했다. 약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하루에 적으면 4시간에서 많으면 9시간가량 공부를 한다. 집중하는 일이 생기다 보니 하루를 알차게 쓰는 느낌도 들고 시간도 빨리 간다. 게임을 하며 느꼈던 부질없음과 허무함, 무가치함이 공부를 하면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했다. 이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 자신이 버러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이버 수업으로 2학기를 보냈고 1학기를 휴학했다. 작년 4월부터 올해 8월 말일까지 17개월 동안 상담을 했다. 심리적으로 힘겨울 때는 매주, 그렇지 않을 때는 2주에서 3주 텀을 뒀다. 작년 8월부터 지금까지 1년 1개월 간 정신과를 다니며 약을 먹었다. 약이 잘 안 맞아서 네다섯 번가량 약을 바꿨다. 지금 약을 먹은 후에도 복용량을 2배가량 증량하기도 했다. 가끔 심장이 마구 뛸 때를 대비해서 필요시 약도 들고 다녔다. 상담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이 나의 긍정적인 변화를 체크하며 하나하나 말해줄 때도 나는 내가 좋아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내 내면은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의사나 상담이 나를 도와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8월 초까지만 해도 나는 이것마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함에 상담과 병원을 지속했다. 관성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들이 정말 필요하고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내가 변했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부터였다. 의사 선생님은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에너지가 드는 일이니,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내게 큰 진전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를 쥐어짜며 연애했고 그러면서 에너지 총량을 키워나갔다. 연인이 사라진 후 나는 남는 에너지를 내게 쓰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대학을 읽고, 시집을 보고, 신문을 읽었다. 노래를 듣고 명상도 했다. 게임과 오픈카톡, 인터넷 커뮤니티를 줄였다. 변화는 빠르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그렇게 완벽한 하루가 아니어도 괜찮다. 7시 기상시간에 맞춰서 일어났지만 아침 먹느라 시간이 너무 걸려서 8시에 공부를 시작하진 못했다.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가야겠다는 목표대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1만 보 목표인데 겨우 6 천보를 걷고 돌아왔다. 여덟 시 반부터 밤 열 시까지 공부하기는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휴대폰에 쓴 시간이 많았다. 강의 듣고 복습한 후 정리까지 해야 되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진도를 다 못 뺐다. 잘 살펴보니 삼십 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을 제대로 못 써서 정리를 다 하지 못했다. 오늘은 완벽한 하루가 아니었다.
그런데 열 시가 되고, 정리해야 할 한 챕터(50쪽가량)를 남겨놓은 채 '이제 그만해야지'하며 책장을 덮는 순간이 너무 좋았다. 자연스럽게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으며 행복했다. 정한 과제를 다 못했는데도 힐난 대신 칭찬이 나왔다. 예전 같으면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이었을 텐데, 오늘은 색다른 일 하나 없는데 너무 충만하고 가득한 하루였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매일 부정적인 생각, 회의적인 생각만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우울증을 겪기 전에도 그랬다. 연속적인 기억이 남아 있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생, 대학생까지 내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은 내 기억과는 달리 너무나 다채롭고 알록달록했다. 그만 살기에는, 도로 한복판에서 죽기에는 과분한 아름다움이었다.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너무 새삼스럽다. 매일 이런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살고 싶다. 이 새삼스러움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감정에 행복하다. 매일 이런 생경함을 느끼며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다.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살고 싶다. 내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살고 싶다. 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시간들이 거짓말 같다. 내가 자해를 하고 낙동강에 뛰어들려 했던 게 믿기지가 않는다. 나는 이제 '잘'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살고 싶다. 어떻게든 살고 싶고, 오래 살고 싶다. 이 세상에 남아서 다음 날의 태양을 보고 싶다. 내일이 기다려지고, 오늘에 감사하게 되는 나의 마음이 너무나 신기하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 감격스러운 생각인 줄은 몰랐다.
이제 나는 살고 싶다.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난 건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다. 지난주에 공황이 왔을 때 그랬고 이틀 전에 허무함과 무가치함이 찾아왔을 때도 버텨냈다. 나 혼자서 이겨내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과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모두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좋아하는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황을 합리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 패턴을 알아차리는 것, 용기를 내서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을 배웠다. 물론 나는 태생적으로 우울하고 예민한 사람이기에 나쁜 날들은 언제든지 찾아올 거다. 그럼에도 괜찮다. 나는 한 번 이겨냈으므로.
드디어, 내게 오늘과 내일이 생겼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인지, 의사나 상담사가 찾아준 것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오늘과 내일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오늘과 내일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