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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18. 2021

지문이 인식되지 않는 자

쏟아내기

  주민센터에서 서류를 떼려면 지문 인식이 필요하다. 아니, 손가락 지문이 생생하게 아있다면 애초에 그곳까 걸어가는 번거로움을 감행할 필요조차 없겠지. 집 근처에서 자동화된 시스템을 이용해 ATM기에서 돈을 인출하듯 편하게 원하는 서류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나선형 소용돌이가 군데군데 끊어져 멸실된 내 지문은 애꿎게도 차갑고 날선 기계에 내외하며 곁을 내주거나 호락호락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이들과 경찰 박물관 갔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문의 모양에 따른 범죄자 유형을 알아보는 흥미로운 테스트 기계앞에서 끝내 나는 결과를 알아내지 못했다.

  주민센터에서 직원들을 대면할때마다 듣는 말이 있다.

"바로 옆 기계로 가시면 무료에요. 번호표뽑고 기다리실 필요도 없구요."

"알지만 지문이 인식되지 않아서요."

지문의 배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금 복잡한 서류, 가령 호적 등본 같은 것들은 지장을 찍기도 하는데 문제는 요청하는 손가락마다 번번히 실패라는 것이다. 결국 좌우 손가락 대부분에 붉은 인주를 묻히고 나서야 일이 끝난다. 남들보다 더 진을 빼고 시간이 소요되니 대기하는 민원인들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이쯤되면 직원들은 애매한 표정으로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들을 되내인다.

"이상하네요. 보통은 할머니 연세 정도는 되야 지문이 닳아 없어져 인식이 안되는 것인데..."

그녀들과의 짧은 대면의 시간, 내 무용한 손가락의 이유를 일일히 설명하기란 역부족이다. 그동안의 쓰임과 노고를 매번 알릴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육신이 고단하도록 거친 일을 생업으로 삼아오며 험난한 여정을 거쳐왔을 이들에게는 이 무슨 엄살인가 싶지만, 무리해서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내게도 남아있나보다.아기처럼 작은 손을 조물대며 아둥바둥 세상에 부대꼈나보다. 인생의 더깨를 뒤집어쓰고 소중히 가꿔질 보살핌조차 받지 못했나보다 .

  아이를 낳은 뒤로는 네일 케어는 물론이요, 핸드 크림조차 인색하게 멀리했다. 그날의 식재료와 사용되는 식기류를 세척하고, 쌀을 씻는데 불순물이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씻기고, 걸레를 빠는 생활상의 노고는 물론이요, 직업적으로도 내 손은 신체 부위 중 가장 바쁜 축에 속했다.


  본격적인 손의 쓰임은 잠자리가 그려진 4B 연필과 옹이가 거칠게 살아있어 가시가 박히기 쉬운 나무 이젤을 잡으며 시작되었다. 아니 그 시초는 초등학교 4학년, 교실 벽에 걸린 크레파스화에서 비롯된건지도 모르겠다. 그 날의 주제였을 항아리를 놓고, 크레파스를 눕혀 파스텔처럼 밀며 그라데이션을 넣었다. 브라운과 오렌지, 블루로 이어지는 서툰 색상의 조합에 담임 선생님은 '특별함'이 보인다는 칭찬을 해주셨고 그 마디는 최근까지도 손으로 먹고 사는 인생을 열게 한 시발점 되었.


  을지로 입구 지하상가, 지금은 없어진 피바다 극장 옆 바다 염색과 방산 시장, 동대문 종합 시장에는 마음껏 재주를 부릴 수 있는 마법의 재료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자주 들락거린 그곳에서 타피스트리틀과 염료, 비즈, 털실, 원단 등을 잔뜩 사들였다. 그리고는 마치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만들어올법한 조악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이 서툰, 곧 폐기될 운명에 처한 시한부 창작품들을 양산해내었다.

곰손으로 재주부리기는 거기서 끝났어야했는데 결국 업으로까지 삼고 말았다.

  노력이 재능을 이긴다고 생각했다. 공부는 엉덩이의 힘으로 한다지만, 일은 손가락의 힘으로 하는 거라 여겼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상업 예술의 세계에서 내가 생각하는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축복이라며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유년기 의상을 책임진다는 막중함자부심을 품었다.

그렇게 뻐기며 근근히 내려오던 손가락의 역경은 그 세계를 나오면서 손절하게 되었다. 이제 그곳에 내 손가락을 혹사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서약했다.

  물론 업종이 바뀌었을 뿐 고단한 루틴은 지속되고 있다. 아마 임종을 앞두고 머리와 심장의 기능은 멎더라도 손가락은 끝까지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며 소임을 다하지 않을까 싶.

  마우스와 마카, 붓과 펜을 잡던 손으로 주방에서 칼을 쥐었다. 전업한지도 꽤 되었는데 여전히 여기저기 손을 베인다. 이러다가는 지문뿐 아니라 손가락의 생여부도 불투명해질지 모르겠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무사히 살아남아야 할 터인데.

지문은 복 불가하겠지만 손가락의 안녕을 염원하며 더 이상 극한의 혹사는 없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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