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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01. 2021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이유

담아내기

  고 전몽각 작가의 <윤미네 집>이라는 사진집을 본 적이 있다. 딸의 출생부터 결혼까지의 모습이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과 함께 자연스레 어우러져 녹아있었다. 도구와 기술이 빚어내는 예술의 경지 너머 존재하는 사랑의 가치를 본 것 같아 뭉클했다.

  본인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삶의 궤적을 기록으로 남겨보는 일이 이토록 멋진 일이라니!

또한 인생의 과정 속에서 기억해두고 싶은 순간을 박제할 수 있는 기록 보존자가 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업으로 삼은 드로잉은 기술적인 묘사에만 그칠거라는 한계점이 명확했다. 열정이 결여된 채 기계적인 작업에 의존할 것인지, 재간이 부족해도 피어나는 열성에 의지할 것인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담담하게 글로 기록해 보는 것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될것이다. 스스로 내면을 탐색하고, 반추하고, 재정립해 버텨나갈 힘이 될 것이다.

자기 성찰에 기반한 고백에 가까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은둔과 정리에 최적화된 내 일상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타인과 무난히 섞여들어가 어울리더라도 한없이 깊은 혼자만의 우물속에 내려가 있는 것이 더 편한 내게 적합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비슷하게 겹쳐져 교집합을 이루던 사람들과의 교류일지라도 자발적 고립은 필요한 일이었다. 가재도구를 최소한으로 정리해 정갈하게 배치하듯 인간 관계도 단순하게 정리하는 중이었다. 취향이 한껏 반영된 유사한 컨셉의 옷들을 정리해 옷장의 빈 공간을 넓히듯 양적으로 충만하던 스마트폰 속 지인들 중  몇 년 이상 연락이 끊어진 인연들과는 혼자만의 안녕을 고하는 중이었다.

 

  글쓰기는 순전히 나만의 일방통행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관심사와 상관없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생각의 흐름을 이동시키며, 호응과 반응에 일희일비할 필요없이 자유롭다.

  음성을 입밖으로 발현해내어 조리있게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데 미숙한 내게는 이보다 안성맞춤인 수단은 없었다. 더구나 말은 뒤돌아서면 놓친 부분이 생각나 후회하고, 곡해없는 원활한 전달에 제약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데 반해 글은 퇴고라는 거름장치가 있기에 어느 정도 정화가 된다.

한번 내뱉은 말을 거둬들이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직관에 가깝게 툭 내던진 말에 상처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미 숱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직접적인 전화 목소리보다 텍스트로 주고받는 안부와 수다가 훨씬 더 정겹고 편해졌다. 어색해서 말로는 전달못하는 축하와 감사도 문자로는 휘황찬란한 이모티콘까지 대동하면서 나답지 않은 호들갑스러운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글을 씀으로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자신에게 관대하던 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자의식이 충만했던 빛나던 기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역으로 토해내고 싶던 버거운 기억들이 딸려오기도 했다. 토사물같은 기억 중의 일부는 희석되고 미화되어 재포장되기도 했다. 자기 방어 기제가 작용된 것이니 내 입장에서 본다면 글쓰기의 순기능으로 탈바꿈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글쓰기는 자가면역을 키워주고,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치유력을 선사했다.

내면에 잠재된 고독과 우울, 자주 튀어오르는 분노와 울화같은 쓸쓸하고 감내하기 힘든 감정들을 수면위로 끌어올려 삭여주었다.

글쓰기는 검은 수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가 빠져나올 수 있는 밧줄같은 것이었다.

  쓰면서 자아를 객관화시키고 제 3자의 입장에서 내가 머물러있던 상황을 바라보게끔 해주었다. 잠시나마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화를 멈추고 침착하게 관찰하며 불편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고백하건데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다. 앞날에 닥칠 불행이 염려되는 날이 제법 있고,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나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보며 자아가 분열된 혼란스런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서, 사춘기때는 집나간 자아를 찾아서, 직장을 다니면서는 회사의 노예가 되어서, 출산 후에는 누구의 엄마로 불리우며 이름조차 상실되고 자아를 성찰할 충분한 겨를이 없었다.

정작 숨을 고를 여유가 생기고, 살아온 시간 속에 나다움을 찾고 싶은 시기가 도래할 때 기억을 잃는다면......

상실, 멸실...소멸의 수순을 밟게 되는 잔인한 과정을 겪게 된다면...기억을 놓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금전적인 안전장치인 보험처럼 잃어버린 나를 찾아줄 징표쯤은 되지 않을까.


  훗날 가족과 지인들이 나를 기억하는 매개체, 좋아하는 책들의 작가처럼 되고 싶은 열망, 무한정 끄적이고 싶은 무모한 본능, 인생의 절반 가까이에서 느끼는 회고와 정리의 필요성, 말이 아닌 글로 마음을 나누고픈 바램, 어두운 내면을 좀더 밝은 양지로 끌어내고 싶은 간절함, 더 이상 무용한 사람이 아니라는 발버둥, 분열될지 모를 자아를 훗날 입증해줄 대체재, 현재까지의 나를 말해주는 마중물.

이런 구구절절한 기타등등의 이유들이 지금 글을 쓰는 이유가 되고 있다.


  덧붙이자면 초벌 습작은 노트에 볼펜으로 시작한다. 퇴고의 지난한 과정을 숱하게 거쳐야 할 것을 알기에 마구 끄적일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택했다. 매끄러운 종에 가닿는 볼펜의 둥근 족적과 종이와 사각거리며 내는 마찰음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설레임과 에너지를 생성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 가득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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