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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01. 2021

내가 나를 데리고 사는 법

담아내기

  키 40센티, 몸무게 2배 차, 6살 터울이 나는 남아 둘을 키우고 있다. 외형적인 차이만큼 온도와 결이 다른 둘 사이를 오가며 사교육을 최소화한 홈스쿨링(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르게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는다)부터 가사노동이라 불리우는 온갖 잡일을 도맡아하고 있다.

  급식보다 맛없다는 혹평을 받는 (건강한) 가정식을 제공하고, 파닉스와 to부정사, 숫자 가르기와 모으기부터 연립 방정식을 널뛰듯 오가며 채점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15년을 한 가사는 쉽게 손에 익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늘 칼에 손을 베이고, 음식의 맛은 할때마다 다르게 표준화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사춘기 아들과 고성이 오가다 초등 저학년 아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줘야하는 변온동물같은 숙명에 처해 있다.

장기화된 코로나로 온라인 업과 동시에 잉여짓을 하는 아들의 게임 레벨이 올라가는 만큼 혈압이 급상승중이기도 하다.

  질병의 역습으로 외출을 삼가며 하루에 보도 걷지 않는 날이 많지만, 늘 밤이 되면 탈진하듯 기진맥진 쓰러지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기력을 소진시키는 존재들을 취침 모드로 강제 전환시키면 맥주 한 캔 혹은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비로소 숨통트이는 나만의 시간을 맞이한다.


  한때-라기에는 강산이 2번 바뀔 정도의 시간을 야근과 해외 출장이 많은, 다시말해 역마살 낀 직업을 전전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일과 가정이 양립되는 직장맘으로 보냈다.

 <찰리의 쵸콜릿 공장 >처럼 거대 기업의 한 일원으로서 아이들이 입고, 신고, 맬 많은 것들을 만들어왔다. 환경 보호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패스트패션을 양산하는 자였고,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취향을 사로잡아 매료시키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였다.

느림의 미학은 진작에 놓아버리고, 트렌드에 재빠르게 반응하며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치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성과를 내야하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삶이어야했다.

  

  스펙터클했던 업무 영역처럼 사는 곳도 서울의 각 끝단 여기저기, 심지어는 중국 저장성의 어느 소도시까지 변화무쌍했다.

 업무와 거주지의 변화는 인간관계의 폭을 넓혀 주었지만, 기간에 있어서 영속성 대신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겨주었다.양적 팽창과 관계의 깊이에 한계가 존재했다.

  직장맘일때는 아이의 교육 정보와 친구 관계 형성에 시간적, 물리적 제약이 존재함을 느꼈고, 전업맘일때는 이미 형성된 돈독한 엄마들의 세계에 진입해야하는 부담감이 들었다. 직장에서 보낸 시간만큼 관계의 공백기, 결손의 시간을 메우기위해 부단히 발버둥쳐야했다.

  타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레 흡수되고 싶다가도,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에 스스로 벽을 쌓기도 했다. 아이의 전학을 앞두고는 곁에 있을때 긴밀했던 이들과의 아쉬운 이별을 염려해 혼자서 미리 거리를 두는 연습을 했다.

  간혹 목적성을 띤 모임에서 친밀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관계가 성립된다면 긴장을 내려놓고 수다를 오랫동안 갈구해온 사람처럼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내 자리를 내어주고 집단에 합류다. 하지만 대부분은 의도치않게 연결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고립을 자초하곤 다.

늘 주변인이고 경계인인 셈이다.


  가사와 양육, 교육에 최선을 다할수록 이상하게 더 서툴고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구상의 모든 가정에서 매일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일텐데 왜 유독 버겁게 여겨지는걸까. 나에게만 양극단의 상황이 닥치는 것은 아닐진데 피해 의식에 빠져 움츠러들었다. 수월하고 탁월하게 일과 가사를 양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불특정 다수에게 자격지심이 들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버리고, 덜어내고, 그 정도면 괜찮다고 토닥이며 격려하는 스스로에 대한 관대이 부족했다. 그저 다가오는 상황들을 처리하고, 해치워야 할 임무로 여기며, 완벽하게 해내야한다는 부담으로 바라보니 애쓰되 결과는 미더웠다.

  양극단을 오가는 객관적인 상황들의 중첩 속에서 감정의 균열이 일었다. 평정심을 잃고, 균형을 잡지 못하고, 편중되어 치우치고 휘둘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선을 놓아버리게 되었다.

마음이 불안의 물결을 타고 요동치듯 흔들렸다.


  삶이 썩 유쾌하흘러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한눈팔거리를 찾아 두리번댔다.

 가슴이 미치도록 답답한 지경에 이르거나 내재된 공허함이 밀려와 밑바닥까지 감정이 침잠할때에는 몸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집을 나와-가출과는 다른 자발적 외출로 해두자-정처없이 거리를 걷는다. 익숙한 곳이 아닌 새로운 곳을 향할수록 효과는 크다. 낯설고 신산한 기운이 불쾌한 기억을 가져간다. 밤버스를 타고 즐기는 별빛 유랑도 에너지를 다시 채울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다. 밤의 서울은 묘한 마력을 지녀서 고요속에 활기를 불러 일으켜준다.

   정도까지가 장롱면허 보유자가 할 수 있는 한도내의 소소한 일탈이다.

 화장실의 청결을 위해 정기적으로 부산히 움직여보는 조금 힘겨운 방법도 있다. 불결함을 감내하고 더러움을 제거하는 행위를 통해 마음 속 찌끼까지 씻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효험은 채 일주일이 안된다는 단점도 존재하지만.

  그보다 더 체력을 요하는 아파트 계단 오르내리기란 것도 있다. 몸에 대한 치팅처럼 운동을 함으로써 적어도 육체의 근육은 강해질거라는 플라시보 효과를 준다. 건강한 체력이 곧 마음의 근육까지 채워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준다.

  이런 일련의 방법들은 몸을 일으켜 비교적 단시간 내에 근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나만의 잡념 퇴치법이다. 일종의 소소한 화풀이를 통해 큰 분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잠재우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응어리는 언젠가는 끓어오르는 법. 일시적 처방의 연장을 넘어 무언가 다른 추가 장치가 필요하다.

  몸의 움직임과 병행해 시작한 것은 글쓰기였다.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 기록의 방법을 선택했다.

나에게 전하는 사적인 위로, 마음을 추스리는 독백, 종이에 대한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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