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0일 ~ 12월 26일
가끔 인생에는 인과관계를 정확히 따질 수 없는 순간이 생겨난다.
2019년 5월부터 내게 좋은 일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세계일주 결심도 그 중 하나였다. 조금 더 정확히 기억을 떠올리자면 세계일주가 그 시작점에 있었다. 내가 큰 세상으로 눈을 돌리니 더 많은 게 보이는 건지, 혹은 그동안 쌓아왔던 역량이 한 번에 빛을 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창 바빴던 시기임은 분명했고 떠나는 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종강은 12월 20일이고 출국일은 12월 26일이니, 일주일은 쉴 수 있다는 내 계산은 보기 좋게 틀렸다.
나는 주변에 작별인사를 전하느라, 또는 여행용품을 구하느라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오면 커피와 함께 단막극을 고치는데 전념했다. '멋지게 공모전에 작품을 내고 떠나는거야..!'라는 욕심 탓이었지만, 사실 그 과정은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출국일 이브, 그리고 가족 외식이라고 안양천이 한눈에 보이는 뷔페에 간 날. 나는 전날 밤을 새서 씻지도,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퉁명스럽게 밥만 먹고 돌아와서 부모님께는 죄송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출발일. 12월 26일. 나는 점심을 먹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전달하지 못한 편지들을 부치러.
편지를 쓴 건 내가 여행 중에 행여나 죽을까봐서였다. '오버하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나는 각오가 돼 있는 셈이었다. 매일 수많은 곳을 다니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사실은 너무 비장해서 웃긴가, 정말 이걸 전해도 괜찮은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도 내가 너무 진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지하게 답신을 보내준 친구도 있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든, 카카오톡 답장이든, 손편지든, 혹은 선물이든. 나의 글은 어떤 형식으로든 또 다른 마음을 낳았다. 세계일주 떠나기도 전에 벌써 한 가지를 이룬 셈이다.
죽음에 관한 수많은 교훈들이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을 때, 오늘 당장 주변에 마음을 전하세요'라고. 하지만 세계일주라는 핑계가 없었더라도 이런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확실한 건, 죽음에 대한 자각이 때로는 강한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체국에 다녀오자 시간은 벌써 3시에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짐을 풀어헤치고 배낭을 쌌다. 당연히 기념 사진도 찍었다. 내 앞배낭과 뒷배낭을 더한 무게는 13kg이었다. 당시 필요 없는 물건들을 왜 그리 챙겼는지. 배낭의 무게는 인생의 업보 무게라던 여행자들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준비과정 얘기를 생략하다보니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 이 세계일주는 대학생 여동생과 함께 시작했다. 후에 동생은 먼저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말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도 딸을 혼자 보내기에는 걱정이 많았던 데다가, 이참에 겁 많은 둘째에게 겁 없는 맏딸을 붙여 세상 구경을 시키자는 심사였다. 그리고 혼자 장기여행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도 동생의 존재는 의지가 되었다.
후에 동생은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동생에게도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라 붐빌거라던 예상과 달리 인천공항은 한산했다. 수속을 밟고 글로벌유심*을 수령하자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할 게 없어졌다.
*데이터를 충전하면 국가에 상관없이 3G를 사용할 수 있는 어플이 있다.
여동생은 떠나는 날 울게 될 것 같다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고픈 우리 앞에는 한식+일식집이 있었다. 아빠는 평소와 같이 누구나 볼 수 있는 메뉴를 대단한 지식을 발견한 것 마냥 설명하고 있었고, 늦둥이 남동생은 그런 아빠를 어이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으며, 엄마는 오늘은 국물이 땡긴다며 메뉴판만 짚어보고 있었다. 모두가 완벽히 자기 캐릭터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우리 가족이 정식을 다섯 개 시켜 잔반 없이 모두 먹어치웠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소식가인 우리 가족은 인원수대로 시키면 절반은 남는 게 보통이었다. 먼 길 떠나려는 걸 몸이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내 몸에는 핑계가 있었지만, 부모님과 남동생은 왜 그렇게 많이 먹은건지 알 길이 없었다.
출국장에 들어갈 때도 엄마만 눈시울을 조금 붉힐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낭 여행자에게 면세점은 사치였으므로, 여동생과 나는 일찍 보딩장 근처에 가 있기로 했다. 저녁 10시쯤, 우리가 보딩장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밀크티와 케잌을 시켜먹는 것이었다.
'외국 나가면 은근 생각나는 게, 한국 디저트래.'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공항 카페에 앉아, 우리는 친척들에게 이제 출국한다고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약을 한가득 싸 주신 작은아버지께는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드렸다. 연신 전화를 돌리며 '이게 가족행사라도 되는 건가' 하는 볼멘소리를 속으로 작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한 번이라도 친척들에게 직접 전화한 적이 있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계일주가 별일이긴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