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면 항상 피를 닦았다. 팔, 발, 무대 바닥 피가 안 묻어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주인공이 무대 중앙에서 피가 묻은 도끼를 들고 설치는 장면이 있었으니 당연하다. 피는 휴지로 지우면 끈적거려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대걸레를 빨아와서 바닥을 치덕치덕 닦거나, 물티슈를 뽑아서 닦아야만 겨우 지워졌다. 진짜 피는 아니다. 식용 색소, 물엿, 따뜻한 물을 섞어 만든 무대용 피다.
극단에 들어간 지 5개월 정도가 지난 후의 일이다. 속세의 때가 다 벗겨지지도 않았건만 내게는 안팎으로 여러 변화가 있었다. 우선 27년 동안 살던 부모님의 집에서 나와 살게 되었다. 여자친구의 ‘같이 살자’는 말에 이끌려 가다 보니 나와 여자친구를 포함한 극단 식구 4명이 한집에 살게 되었다. 내가 혼전 동거라는 걸 해 볼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투 잡을 뛰게 되었다. 첫 연극을 하고 내 손에 떨어진 돈은 10만 원이었다. 연습 기간, 공연 기간을 합하면 4개월 정도. 그러니 나는 한 달에 2만 5천 원을 번 셈이다. 한 달 2만 5천 원으로는 서울에서 살 수 없기에-서울이 아닌 어느 곳이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같은 극단 식구 중 어떤 형은 장어 집에서 일했다. 어떤 형은 공사 현장 감독 일을 했다. 같이 살던 친구는 쿠팡을 다니거나,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들 그렇게 살았다. 나도 ‘배우’ 말고 다른 일을 구해야 했다. 나는 내 발로 나왔던 직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저 프리랜서로 일하면 안 될까요?”
팀장님 입장에서는 4달 전에 자기 발로 나갔던 사람이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니 뭔가 싶었을 거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려 나는 월요일만 출근, 나머지는 재택 근무를 하는 형태로 한 달에 100만원을 받기로 했다. 4명이 함께 사는 곳의 월세는 55만원. 나랑 여자친구는 작은 방에 살았기에 25만원을 나눠서 내면 되었다. 이 정도면 얼추 입에 거미줄 치지는 않고 살겠다 싶었다. 실제로는 조금 빠듯했지만.
나중 일이지만 회사는 사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내 월급도 80만원, 50만원 줄어갔다. 시간제로 일하던 나는 이제 ‘일주일에 기사 몇 개’ 단위로 계약을 다시 했다. 마지막에는 30만원의 고료를 받다가 결국 회사는 뉴스 컨텐츠를 중단했다. 이건 조금 나중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배우’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카페 청소 등의 알바를 해야 했다.
다시 피를 닦는 모습으로 돌아오자. 극장에 들어온 지 5개월 뒤, 우리 극단은 ‘그리스 비극’이라는 연극을 하게 되었다. 희랍극은 작은 배역들인 ‘코러스’들이 뭉쳐서 큰 장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코러스들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도 코러스, 코러스 중에서는 조금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았다. 비중이 있으면 좋은 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나쁠 것은 없지만 묻고 싶다. 좋을 것은 무엇이 있냐고.
우선 코러스가 되기 위해 나는 춤을 추어야 했다. 5개월 전만 해도 의자에 앉아서 기사를 쓰던 내가 ‘칼 군무’를 오차 없이 맞춰서 ‘절도 있게’ 춰야 하는 코러스로 변신해야 했다. 물론 가끔 동작이 안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에 3~4시간씩 연습을 하면 안 될 것은 아니었다.
우쿨렐레를 치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집에 우쿨렐레가 있긴 했다. 예전에도 기타를 쳤던 나는 우쿨렐레가 궁금해서 집에 모셔두고 조금 칠 줄은 알았다.
“우리 중에 우쿨렐레 칠 줄 아는 사람?”
“제가 우쿨렐레가 있긴 합니다.”
“그럼 너가 그 역할 해야겠네.”
내 역할은 이렇게 정해졌다. 어쨌든. 나는 극의 시작 부분에 우쿨렐레를 치며 관객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나는 음치다. 노래를 ‘잘’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음을 잘 못 맞춘다. 덕분에 많이 힘들었다. 결국 노래를 잘 하는 방향은 포기하고 관객들에게 에너지를 주어 시작을 잘 여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어찌어찌 되었다.
온 몸에 진흙을 발랐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복수를 결심하고 온 몸에 진흙을 바르는 장면이 있다. 양동이에 진흙을 넣어 두고, 노래에 맞춰서 우리는 얼굴에, 몸에 진흙을 덕지덕지 발라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을 ‘빠께스 신’이라고 불렀다. 바르는 것은 상관 없는데, 바르며 진흙이 극장 여기저리고 튀고, 또 바른 진흙이 마르면 먼지가 폴폴 날렸다. 평생 먹을 먼지를 아마 극장에서 다 먹지 않았나 싶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춤추고, 노래하고, 진흙을 바르고 연기를 했다. 왜 ‘광대’라는 말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광대짓을 끝내고 나면 항상 극장 여기저기에는 피가 묻어 있고, 진흙이 묻어 있었다. 소품으로 쓰는 욕조를 꺼내 피를 닦고, 바닥에 붙은 진흙을 닦았다. 양동이에 남아있는 진흙도 닦아야 했다. 당시는 겨울이었는데, 극장에는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찬물로 양동이 설거지를 맨 손으로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스 비극을 할 때 내 삶이 참 비극 같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꽤 재밌게 했었다. -이게 문제다. 나는 항상 그 상황에 놓이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당시 극단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잘 통했고, 연습도 으샤으쌰하며 열심히 했다. 내가 극단에 있던 2년 정도의 시간 중, 가장 관객이 많았고 평이 좋았던 연극이 그리스 비극이었다.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