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월부터 극단의 워크샵을 듣고, 9~10월쯤 첫 공연을 하며 정식 극단원이 되었다. 극단에는 모토가 하나 있었다. 극단의 모토라기 보단, 연출의 모토였다. 극단원들은 모두 가까운 곳에 살 것.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은평구다. 극장과는 버스, 지하철로 50분 정도가 걸리는 곳이었다. 아침 9시에 극장에 오는 스케쥴을 소화하며 나는 차츰 자취의 필요성을 느껴가고 있었다.
12월이 되자 극단 동생 한 명이 여자친구와 함께 방을 구했다. 원래 그 동생이 살던 반지하 집은 ‘사무실’로 불렸다. 극장의 여러 소품, 의상들을 한 방에 처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극단에서 월세를 지원해 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무실로 불렸다. 동생은 그 사무실 짐을 뺐지만 월세 계약 기간이 조금 남아있던 상태여서, 나는 그 사무실이 나가기까지 잠시 동안 살기로 했다.
내가 살게 된 ‘사무실’은 방이 두 개 있었고, 거실겸 부엌이 중간에 있어서 마치 아령같이 생긴 구조였다. 아령 손잡이 부분 옆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반지하였지만 쾌적한 편이었다. 월세는 보증금 500에 35만원. 당시 프리랜서로 한 달에 100만원을 벌고 있던 나는 이정도면 내가 먹고 살 만 하겠다 싶었다.
아빠 차를 빌려서 집에서 내가 쓰던 이불, 전기장판, 전기난로, 수저, 밥그릇 등 여러 짐을 옮겼다. 냄비, 프라이팬, 식칼을 쿠팡으로 주문했다. 원래 있던 침대 덕분에 비싼 침대 매트리스를 살 필요는 없었다. 27년간 ‘자취’를 꿈꾸던 입장으로서 조금 재밌었다. 우선 구석에 있던 침대를 방 한 가운데로 옮겼다. 그리고 여러 수납장의 위치를 바꾸며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봤다. 필요한 물건들이 생각날 때마다 다이소에 들러 사곤 했다. 새로 온 식기들은 엄마의 조언에 따라 식초를 넣고 한 번 끓인 뒤 세제로 잘 닦아 주었다.
사무실에 있던 밥솥도 아주 알차게 잘 써 먹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 때도 가끔 요리를 해서 먹었던 터라 밥을 해 먹기로 했다. 돈도 아껴야 했으니까. 가끔 극단원들이 놀러오면 밥을 해주기도 했다. 밥솥은 2인분 취사가 가능한 밥솥이었다. 한 번은 여자친구와 밥을 먹으려 2인분의 정량을 잘 모르고 쌀을 많이 넣었다가 밥솥이 넘친 일도 있었다. 따뜻한 생 쌀을 씹으며 우리는 마냥 즐거워 했다.
아침에 잘 못 일어나는 편이지만 늦으면 큰일난다는 공포감에 꽤 잘 일어났다. 극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던 사무실이라, 확실히 은평구에 살던 때 보다 삶의 질이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아침 9시 콜도 두렵지 않았다. 중간에 2~3시간 뜨는 시간이 있으면 사무실로 걸어 와서 쉬었다. 집이 은평구일 때는 카페에 가거나, 피시방에서 시간을 죽였다. 적지 않은 돈과 함께. 그런데 이제 쉴 곳이 생기니 기뻤다. 그렇게 1주일 정도 행복한 자취 라이프를 즐겼다.
“오빠, 사무실 이제 비워줘야 한 대요. 12월 말에 새로운 분이 들어오신대요.”
동생이 아주 나쁜 소식을 전해줬다. 나는 1주일도 채 자취 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니 극단 모토에 벗어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9시 콜이라면 아침 7시 30분에는 일어나야하는 끔찍한 생활이 반복될 수도 있었다. 중간에 뜨는 시간이 있으면 다시 쌈짓돈을 들고 카페나 피시방에 가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새 집을 구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근처 원룸을 빌리려면 보증금을 500은 모아야 했는데, 나에겐 그만한 돈도 없었다. 직장을 다니며 조금씩 저축했던 돈도 워크샵을 하며 –백수였던 시절- 야금야금 까먹었다. 우선 보증금 100만원짜리 단기 월세방이나, 보증금이 들지 않는 고시텔에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다. 극장 스케쥴이 끝나면 다방을 뒤적거리다 잠들었다. 또 자취 경험이 많던 극단원들과 상의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 고시텔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햇빛 하나 들지 않고, 화장실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고시텔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난 그 사람들 말을 사실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내가 돈이 모자란데 어쩌겠는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어도 돈이 부족하면 사람 이하의 존재로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나. 그러다 여자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다.
“토끼야 그럴 거면 그냥 나랑 은이(사무실에 살던 동생, 가명) 사는 집에 같이 살아.”
“어? 그래도 되나?”
“보증금은 됐고, 월세나 조금씩 보태줘.”
아무리 그래도 여자 둘이 사는 집에 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조금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사람인 나에게는 너무 ‘서구적인 라이프 스타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보증금 문제도 해결되고, 극단 모토도 해결됐다. 내 삶의 질도 해결되는 일석 삼조의 계책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 나 여자친구랑 은이랑 사는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어.”
“저런! 여자친구 부모님은 괜찮으시대?”
엄마는 여자친구 부모님의 걱정을 먼저 했다. 어쨌든 난 여자친구와 극단 동생의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그렇게 셋이 살다가 극단원 한 명이 더 이 집으로 들어와 넷이 살게 되었다. 시트콤 같은 삶이었다. 음식 먹고 안 치우는 사람이 있었고 그걸 못견디고 음식을 먹지 않았어도 치우는 사람이 있었다. 빨래가 많이 밀렸는데도 꾸역꾸역 입던 옷을 입던 사람이 있었고, 넘치는 빨래 통을 못 견디고 빨래를 돌리고 빨랫대에 너는 사람이 있었다.
새 집은 겨울에 몹시 추웠다. 도시가스 난방이 아닌, LPG 가스 난방 방식의 오래된 집이었다. 문제는 LPG가 너무 비쌌다는 사실이다. 네 명이 사니 난방을 떼면 1주면 한 통을 다 썼는데, 한 통에 가스가 4-5만 원은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겨울에도 난방비를 아끼려 난방을 틀지 않았다. 샤워를 할 때만 온수를 잠깐 틀었다 끄곤 했다. 방 안에는 전기 난로를 틀어놔서 그나마 견딜만 했다. 그러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면 정말 한기에 이가 다 시릴 지경이었다. 항상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거실로 덜덜 떨면서 나왔던 기억이 있다. 또 굉장히 언덕에 있어서 겨울에도 집에 ‘올라오면’ 땀이 났다.
지금 와서 그 집을 생각하면 ‘추웠다’, ‘높았다’, ‘빨래, 설거지를 아무도 잘 하지 않았다’ 정도만 기억난다. 추억 보정인지, 그래도 그때는 재밌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