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알게 된 커피의 진한 맛

by 트와일라잇

커피, 그래. 어젯밤의 유혹을 못 이기고 커피우유를 몇 모금 마신 탓이었으려나? 해가 떠서 그랬으려나? 9시 50분쯤 잠이 들었는데 4시 50분에 잠에서 깬 걸 보니, 충분한 수면이 어려웠나 싶다. 그렇게 마시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마시게 되는 커피.


어느덧 피곤을 달고 살고 있는 나에게 내가 자꾸 주입하는 약물, 카페인이다. 7년 전, 둘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흔히 귀족병이라고 말하는 갑상선암은 피곤함을 느끼면 충분히 쉬어 주어야 하는 병이다. 그런 병의 특징과 상관없이, 자주 아이 둘의 육아와 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커피를 찾게 되는 상황이 많다.


그런 나를 보면서 늘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엄마.


“재은아, 커피 그만 마셔! 커피 많이 마시면 피곤한 줄을 모른다. 피곤하면 쉬어야지.”


엄마의 한결같은 내 걱정이 그저 잔소리로만 느껴지던 나의 마음은 그저 아이 같았다. 동시에 나는 엄마가 말하는 피곤함을 느끼는 삶, 그 삶이 너무 패배자 같은 생각이 들어 회피하곤 했다.


피곤함을 그대로 느껴주는 일, 슬픔과 좌절감을 그대로 느껴주는 일이 나는 어렵다. 그래서 그저 이 피곤을 이겨내고, 이 슬픔과 좌절감을 이겨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들이키는 커피와 나의 마음가짐 그리고 작은 기억 한 조각.


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면 엄마가 생각난다. 이사가 잦아 주방이 늘 변하는 우리 집이었지만 변하지 않는 3개의 병이 있었다. 알 커피라고 불리는 인스턴트커피가 든 갈색 병을 시작으로, 하얀 설탕, 프리마라 불리던 하얀 인스턴트 크림 가루를 담은 세 개의 유리병이다.


가족의 식사를 챙겨주고 빨래를 하고 이 일 저 일을 마무리하던 저녁 시간이면 우리에게 과일을 챙겨주시고 엄마는 커피를 드셨다. 삼 남매가 만족스럽게 제철 과일을 먹던 시간, 엄마는 찻잔 하나를 꺼내고 오래된 주전자에 물을 끓이셨다. 티스푼을 이용해서 세 개의 병에 든 가루들을 각각 2번씩 떠서 찻잔에 옮기어 담았다. 그리고 잔이 반이 살짝 넘게 뜨거운 물을 붓는다. 티스푼으로 정성스레 저어주면 완성되는 엄마를 위한 차, 커피.


지금처럼 달콤한 향기 나는 음식이 많이 없던 시절,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엄마의 연갈색 커피는 어른의 차였고 딸들의 로망이었다. 엄마가 마신 커피 잔에 남은 한 방울의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커피 잔을 혀로 핥아보거나 잔을 털어보았던 소녀 시절이 문득 생각난다.


그 커피에 담긴 의미가 단지 어른스러움이 아닌, 어른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40이란 나이가 지난 어느 날 식탁에서였다.

알록달록 신호등처럼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던 삼 남매들을 돌보며 살림을 하고, 밖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해서 돈을 벌었던 고단한 엄마의 삶. 조금이라도 앓는 소리 하면 얼른 다가와서 도와주는 친정과 시댁 부모님이 계신 내 삶과는 달리, 도와주는 손길 하나 만날 수 없는 외로운 서울 살이를 20여 년 해낸 엄마. 그의 주방 한편에 엄마를 위로해주고 힘을 주던 커피의 진한 맛은 한 잔의 약이었다. 나처럼 피곤함을 느끼지 않고 이겨내기 위한 한 잔의 약.

저녁에 커피 마시지 말고 푹 쉬라고 건네던 엄마의 잔소리는 이젠 어른이 돼서 고단해진 딸을 위한 애틋한 마음이었단 걸, 나는 또 너무 늦게 깨닫게 된 것 같다.


커피 잔을 들고 앉아 있던 저녁의 엄마를 동경하던 딸은 어느새 자신의 주방에서 커피 잔을 들고 앉아 있다. 그리고 커피의 맛에 함께 농축되어 있던 삶이라는 맛을 비로소 함께 맛보고 있다.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다 뜻 모를 애틋함을 느끼며 엄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