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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두 Jan 07. 2021

K-장녀 못지않은 I-장녀

인도(India)와 당갈(Dangal)

 최근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 많이 쓰이는 '접두사' 중에 'K-'가 있다. Korea의 K를 따와서 한국 특유의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붙이곤 하는데, 물론 K-POP이라는 단어가 기존에도 있었지만 모든 단어 앞에 'K-'를 많이 붙이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 사례를 언급하며 기자들이 K-방역이라는 단어를 활발하게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온갖 단어에 'K-'가 붙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공감을 많이 했던 게 바로 K-장녀이다. 특정한 역할을 강요받는 한국의 장녀들을 이야기하는 단어로, 인터넷에서 떠도는 아래 사진 하나가 K-장녀라는 단어와 함께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2년 전쯤,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외국 저자들이 지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첫째 딸 두 명이 만나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이라서 그런지 공감이 많이 갔던 책이다. 첫째 딸들은 전 세계적으로 국적 불문, 인종 불문 어느 정도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확실히 주변의 친구들이나 회사에서 만난 동료들을 보면, 확실히 K-장녀들이 주는 특유의 느낌이 있다. 국적, 성별, 인종, 부모처럼 내가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지만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많은데, 태어나는 순서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그 선택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내 인생이 힘들어졌다면 나는 조금은 억울해해도 괜찮지 않을까?

 적당히 나이가 든 지금은 그런 마음이 많이 없어졌지만, 어렸을 때는 항상 오빠나 언니가 있어서 먼저 철들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그리고 첫째 딸인 나에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부담스러울 때도 많았다. 오죽하면 K-장녀들은 부모님을 빨리 실망시키는 것이 자기 삶을 찾는 법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을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이런 K-장녀 못지않게 무거운 짐을 어깨에 얹고 살았던 I-장녀 레슬링 선수의 실화를 다룬 <당갈>이다. '인도의 송강호'로 불리며 한국의 국민배우 송강호와 견줄만한 인도의 국민배우인 아미르 칸이 I-장녀의 아버지로 출연하는 영화인 <당갈>. 비록 인도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도영화이다. 물론 인도영화에만 한정하지 않고 내가 본 영화 전체를 통틀더라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이다. 처음에는 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억지로 본인이 이루지 못한 길을 가게 하는 마히비르의 행태에 분노했지만, 14살에 팔려가듯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친구의 대사를 들으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전국 체전에서 1등을 하는 등 충분한 재능이 있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과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레슬링을 그만둔 마히비르. 그는 본인을 대신해서 세계 대회 금메달의 꿈을 이뤄줄 아들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딸만 넷이 태어나는 마히비르의 집. (XX염색체와 XY 염색체를 결정하는 것은 XY 염색체를 가진 남자 본인이니 누구를 탓하겠나.) 하지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레슬링에 재능을 보이는 첫째 딸 기타와 둘째 딸 바비타. 이후로는 그 둘이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고 국가대표가 되고, 슬럼프를 극복한 기타가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감동 실화가 펼쳐진다.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할 때에는 마히비르가 주인공인 그저 그런 뻔한 가족 영화일 줄 알았는데, 이 영화는 사실 I-장녀 기타의 이야기다.

 

 기타와 바비타가 힘든 억지 훈련을 거부하다가 마음을 잡고 다시 열심히 훈련에 임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기타 친구의 결혼식이다. 몰래 훈련을 빼먹고 기타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기타와 바비타는 친구에게 하소연한다. 하기 싫은 훈련을 억지로 시키고 친구 결혼식 왔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게 무슨 아빠냐고, 아빠도 아니라고. 하지만 친구는 오히려 말한다. 나도 그런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적어도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생각하잖아. 우리에게는 요리와 청소를 가르치고 집안일을 하게 해. 14살이 되면 혼인시켜 짐을 벗어버리지. 생전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넘겨주는 거야. 아이를 낳고 기르게 만들어. 여자는 그게 전부야.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자식으로 생각하고 온 세상과 싸우면서 그들의 비웃음을 묵묵히 참고 있잖아. 너희 둘은 미래와 삶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고 말이야."




 그 이후 훈련에 매진한 기타와 바비타는 국가대표에 선발되기 이른다. 인도의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새로운 코치를 만난 기타는 아버지의 구식 훈련과 기술을 거부하고 코치가 가르치는 대로 훈련하고 경기에 임한다. 그러나 달라진 전략과 훈련이 기타에게는 맞지 않았고, 결국 세계 대회 1차전에서 모조리 탈락하고 만다. 혹 아버지의 방법이 구식이더라도 본인에게는 그 방법이 맞다는 것을 깨달은 기타는 아버지의 코칭을 받아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건다. 금메달을 걸게 해 준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내일의 전략을 묻는 딸에게 마히비르는 말한다.


"내일 전략은 한 가지뿐이야.
내일 이기면 너 혼자 이기는 게 아니야.
수백만의 여자애들이 너와 함께 이기는 거다.
그건 모든 여자들의 승리야.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평가받고
가사 노동을 강제로 하고
자식을 낳기 위해 시집보내지는 여자들 말이다.
내일 시합은 아주 중요한 거다.
왜냐하면 내일 너는 상대방 선수뿐만 아니라
여자를 하찮게 보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시작은 아버지의 강요였으나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세계 정상까지 오른 기타를 보면서 그녀 또한 우리 K-장녀 못지않은 I-장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맏딸들의 가장 큰 특징인 책임감. 그 책임감 때문에 첫째 딸들은 힘든 삶을 살아갈 때도 있지만, 마침내 그녀들을 작은 어떤 것이라도 해내곤 한다. 이 땅의 모든 첫째 딸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이 영화를 강력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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