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New Zealand)와 웨일 라이더(Whale Rider)
몇 년 전 겨울, 가족들과 함께 안동을 다녀왔었다. 안동은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한국에서 전통을 매우 수준높게 보존하고 있는 끝판왕의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일전에 유럽에 가서 각종 궁전이나 박물관을 관람할 때마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조들이 물려준 것들의 덕을 보고 있는 유럽 사람들이 부러워지곤 했다. 하는 것도 없이 선조들이 지어놓은 건축물과 그려놓은 그림들만을 가지고도 항시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쉽게 돈을 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동을 다녀와보니, '유럽 사람들도 아무 하는 것 없이 무작정 선조들 덕을 보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선조들의 것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땅에서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옛 것들을 지키는 일이 무시당하고 개발이 우선시되는 모습을 자주 봤던 나에게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가치와 삶의 방식, 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있는 안동 사람들의 고집스러움에 존경심까지 느껴졌다.
다만, 이렇게 오랫동안 전통과 옛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식되는 부분들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는 수리가 필요한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는 개량 한복도 떠오른다. 기존에 한복은 입기도 불편하고 현대인들의 취향에도 맞지 않아 내게는 결혼식 때 어른들이나 입는 그런 옷이었는데, 좀 더 편하고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게 바꾸어 내놓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오히려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바뀌지 않았으면 오히려 한복은 박물관에만 남아있는 '전통의복'이 되지 않았을까.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을 통해 오히려 한복이 잊히지 않고 그 전통이 끊기지 않고 계승이 되고 있다. 이처럼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변화를 거부하기보다는, 그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필요한 변화는 받아들이는 게 진정으로 전통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오리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뉴질랜드 영화 <웨일 라이더>는 어떻게든 '지키려는' 자들의 갈등과 봉합을 그렸다. 고래 등을 타고 나타났던 선조의 전통을 이어갈 부족의 지도자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아들 이어야 한다는 할아버지 코로는 손녀 파이가 지도자가 될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이를 모른 척한다. 결국 할아버지는 손녀 대신 마을의 지도자가 될 '장남'을 찾기 위해 마을의 장남들을 모아 훈련을 시킨다. 본인이 그 누구보다 마을의 지도자 역할을 잘할 수 있고 스스로 본인이 리더라고 믿는 파이는 할아버지의 훈련을 몰래 따라하기도 하고 삼촌에게 따로 훈련을 받으며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래 떼가 육지로 떠밀려 오지만 할아버지는 고래와의 교감에 실패해 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내지 못한다. 결국 할머니에게만은 인정을 받았던 파이가 나서서 할아버지는 못한 일을 성공시킨다. 파이가 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할아버지 코로는 마침내 '장남'이 아닌 본인의 손녀를 본인을 이을 지도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4년 전에 갔던 뉴질랜드는 자연 풍광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곳이다. 이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마오리 족의 이야기를 그린 점에서 <웨일 라이더>는 디즈니의 영화 <모아나>와 결이 비슷하다. 파이와 모아나가 '여자'라서 안된다는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점까지도 닮아있다. 장자 계승이라는 고전적인 전통(전통이라기보다는 어떤 고집에 가깝다고 보지만)을 깬 그들의 모습에서 희열이 느껴지기도 한다. 고래 등을 타고 나타났던 부족의 선조처럼 다시 고래 등을 타고 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파이의 모습을 보며,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오히려 변화가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