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을 쥐어 뜯어봐도 묘수가 없었다. 20년 맹학교 밥을 먹었건만 교육과정개발 공청회 토론 자료 원고 작업이 버거웠다. 거절 못하고, 밀려드는 부담감만 게워냈다. 평일 오전 두 시간씩은 온라인 점자 수업을 진행했다. 짬짬이 설거지했고, 딸아이 학원을 챙겼다. 개인 원고는 사적 영역에서 책임질 수 있었지만 업무는 달랐다. 토론 자료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이 일었다. 환기가 필요했다. 고맙게도 장애인 콜택시가 배차됐다. 수필 창작반 야간 수업 출석이 확정됐다.
공적으로 나는 특수교사이고 수필가다. 동시에 아내이며 엄마다. 2002년부터 지금껏 같은 직장에 몸 담았다. 2018년에 등단했고, 2021년에 첫 책을 출간했다. 나름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문득 자괴감에 휩싸일 때가 있다. 대부분 스스로가 성에 차지 않을 때다. 쓰기에 매진하는 수필가보다는 요리 잘하는 엄마이고 싶을 때, 소심한 일개미이기보다 쿨하게 성과를 내는 뱃장이 이고 싶을 때 난 은근한 몸짓으로 돌려 막기를 시도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원고가 안 풀릴 때 평소 부지런하지도 않던 내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온 집안이 요란하도록 청소기를 돌린다. 밀고 닦고 빨고 하다 보면 막힌 원고는 그대로이건만 뭔가 주부로서 최소한의 의무는 한 것 같은 면책감에 젖어들 수 있다. 마음에 안 드는 A수필가를 나일론 주부 B가 위로한다. 음식물 쓰레기 제조기인 나일론 B는 젬병인 요리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맹렬하게 설거지하며, 친정어머니와 남편의 팔다리어깨허리를 살핀다. 안마사 C가 침과 오일을 동원하여 성심껏 마사지하면 굳었던 근육이 풀리면서 목소리에 꼭짓점이 둥그러진다. 안마사 C는 보람을 느끼며 이 기술만 쉼 없이 연마해도 밥벌이는 할 수 있겠다고 안도한다.
수필가 A도 나일론 주부 B도 안마사 C도 명품 엄마를 선망하지만 덧없이 깨지고 부서지며 오늘을 갱신한다.
열두 살 딸아이와 카페 데이트를 나섰다. 한낮 여름 볕을 통과하여 버블티 전문점을 찾았다. 시그니쳐 메뉴가 무엇인지, 주문 요령이 어떻게 되는지 사실 급하게 유튜브 영상을 찾아 공부했다. 아이와 마주 앉아 흑당밀크티를 마셨다. 좋아하는 딸아이 모습에 잔뜩 흥이 나서 징그럽게 꽃혀 드는 이목을 밀쳐낼 수 있었다. 반복은 여유를, 여유는 의지를 낳는 법.
딸아이와 둘이서 외출할 때면 보호자 정체성 의식 정립이 필요하다. 아무리 어른이어도 타인들은 내가 아닌 딸을 보호자로 인식하기 때문인데, 그게 참 오묘하다. 스스로 움켜잡지 않으면 일순 초등학생 인도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가여운 맹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함께”라서 즐거운 순간인데, 타인들의 눈빛에 스민 “안쓰러운 돌봄”이 고장 난 내 눈에마저 간파될 때 가슴 저 밑바닥에 실금이 간다.
딸과의 달콤한 나들이가 오롯이 내 것이기 위해서는 그래서 질경이 같은 자기 최면이 필요하다. 수필가 A, 나일론 주부 B, 안마사 C가 의기투합하며, 맹인 엄마를 지탱한다.
수필가 A는 매일 밤 딸아이를 재우며 동화책을 읽어준다. 끈기 없는 엄마가 유일하게 고수해 온 책육아다. 요즘 읽어주는 책은 유은실 작가의 『순례주택』인데, 유주가 제법 귀 기울여 듣는다. 그 옛날 소공녀 느낌으로 주인공 오수림 어린이가 철딱서니 없는 가족들의 편견과 경솔한 언행을 하나씩 뜯어고쳐 가는 이야기다. “솔직히 말해서”로 시작되는 엄마의 고장 난 스피커 같은 발언을 오수림이 수습하면, 우리 유주도 한 마디씩 보태며 수림의 생각과 가치관을 배워간다. 1군들로 표현되는 엄마, 아빠, 오미림 언행이 못마땅할라치면 분기탱천한 유주가 묻는다.
“엄마 나 욕 좀 해도 돼?”
수필가 A는 찰 지게 욕하는 사람이 부러우므로 욕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이래도 괜찮나?’ 주저하는 사이 유주가 눈치를 살피며 욕 비슷한 것을 하면 왜 그렇게 웃음이 나는지 모녀는 한바탕 배꼽이 빠지게 웃는다.
안마사 C는 미우나 고우나 남편 목과 어깨를 푼다. 침이든 마사지든 귀찮은 속내 감추지 않으며 툴툴거려도 30~40분 집중해서 시술하고 나면 작은 마감을 한 것처럼 개운하다. 시도 때도 없이 안마를 주문하는 남편과 달리 한사코 거절하는 친정어머니 어깨와 허리는 살살 주무른다. 힘 좋은 무쇠손이 되기 위해 고된 훈련을 받은 탓에 안마사 C는 힘 빼기가 더 어려운 돌쇠가 됐고, 학생들에게는 ‘마녀’란 별명을 얻었다.
나일론 주부 B는 설거지를 수상 스포츠로 명명하고서 그릇이며 접시, 냄비들을 열심히 닦는다. 아침에 닦은 그릇을 저녁에 닦고, 이튿날에 다시 해도 이 단순 노동에 질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설거지가 식후 활동이기 때문일까? 나일론 주부 B는 아무거나 잘 먹는다. 포만감에 젖어있을 때 너그러워진다. 더우면 손빨래해야 하는 옷들을 추려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찬물을 틀고, 울샴푸를 풀고 요란하게 옷을 빤다. 여름옷은 얇고 가벼워서 세탁도 간편하다. 애써 빤 옷들을 집게로 물려놓지 않아 살림꾼 남편에게 또 핀잔을 들었다.
수필가 A는 책을 듣고 싶은데, 남편은 예능 토크쇼에 열광한다. 나일론 주부 B는 굳이 러닝머신을 접지 않고 청소해도 아무 상관없는데, 남편은 침대 밑, 소파 밑까지 먼지를 빨아내야 직성이 풀린다. 그때부터 나일론 주부 B가 손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음성 체중계며 러닝머신, 거꾸리가 남편 눈에는 쓰레기로 보인다. 공동 공간이 드디어 내 차지가 되면 큰맘 먹고 운동할 체비를 한다. 양말에 전용 운동화를 신은 다음 체육복까지 입고서 전투태세로 의기양양 러닝머신에 오르려는 순간 납작하게 접힌 채 수직으로 서 있는 발판이 손끝에 닿는다.
균형이 안 맞으면 위험할 수 있다며 펴는 법도 안 가르쳐주면서 번번이 깜빡하시는 그분에게 화가 치민다. 씩씩거리며 전투복을 벗어던지고 후퇴할밖에.
내 안에 내가 참 많다. 수필가 A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는 나일론 주부 B로 도망친다. 나일론 주부 B가 못마땅할 땐 안마사 C가 되고, 실시간 지적머신의 공격을 받을 땐 다시 수필가 A가 되어 속상한 마음을 글로 토한다. 소나무처럼 늘 푸르게 살 수는 없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가시나무 노래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이 귀 아닌 가슴에 꽂히고, A, B, C 닥치는 대로 도망을 쳐봐도 숨을 곳이 없을 때 비로소 난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껍질이 단단해서 산불에 그을려야만 씨방이 터지고 발아할 수 있다는 뱅크셔 나무열매는 어떤 모양일까?
부디 A가 B를 , B가 C를, C가 A를 사랑해 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 세상 떠나는 날 여한 없이 사랑했다고, 그럴 수 있어 고마웠노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