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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여름 Mar 27. 2024

행복한 패배자

14년 전 가을 금요일 새벽 3시 반의 신사동 거리. 술에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식은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던 내가 있었다. “따블!”을 외쳐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택시를 잡으면서도 그 시간까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생각했다.


‘잊어버려. 잊어버릴 거야.’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택시의 뒷자리에 앉아 검은 한강의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빠지면 많이 춥겠지?’ 문득 스치는 생각에 고요히 놀라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거나 죽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의욕, 그 자체가 없었으므로 바람 부는 강가에 몸을 던질 여분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너덜 해진 몸뚱이가 녹아 버려서 택시 시트에 스며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얕은 우울을 앓았던 것 같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로수길을 한 바퀴 돌면 커다란 카페 창마다 어느 팔자 좋은 젊은이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쟤네들은 도대체 뭘 하길래 이 시간에 저러고 있을 수 있지?”

“글쎄, 건물주 일수도 있지.” 동료가 하는 말에 ‘그래, 그럴 수도 있지.’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파스타가 한 접시에 삼만 원이 넘는 호사스러운 동네에서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쇼핑을 하던지 거리는 한 밤이 되어도 한가한 순간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길보다 한 블록만 안쪽에 들어가면 있는 세로수길의 허름한 건물 2층에서 모두가 취한 밤 취할 수 없는 밤을 보내곤 했다.


나는 지나치게 잘, 많이 자는 사람이었으나 중소기업의 신입사원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보통 저녁 9시가 넘어서 퇴근을 했고 자정을 넘긴 날도 수없이 많았다. 짐작건대 수면 부족은 우울의 주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야근은 계획하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루 중 압도적인 시간을 회사에서 소비한다는 것보다 그 양의 많고 적음을 뒤로하더라도 언제든 일정이 틀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더욱 지쳐버렸다. 내 업무를 모두 끝내도 사수가 퇴근을 하지 않으면 잔업을 받아와 일을 했으니 일찍 퇴근해주지 않는 상사가 야속했다. 회사에서는 야근수당을 주지 않았고 나 역시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모두들 이렇게 일을 배우는 거라고, 우리 직종이 다 그렇지 뭐, 중소기업은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기던 시절이었다. 예상치 못한 야근에 애인과의 약속을 취소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회사에 무슨 일이 언제 발생할지 몰라 이틀이 넘는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의 일과를 예측할 수 없으니 인생의 주도권을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 회사는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인력을 갈아 넣어 진행되던 일이었다. 제일 야근을 많이 했던 사람은 황 팀장이었는데, 그에게는 자신을 닮아 입술이 두툼하고 귀여운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가 우스갯소리로 ‘어제 야근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아들이 어색해서 엄마 다리 뒤로 숨더라.’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팀장이 되면 직장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분명 취직을 하기 전에는 커리어우먼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인 줄 알았는데, 직접 겪어보니 내 행복은 그곳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더 이상 이곳에 나를 방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미래의 나에게는 자신이나 가족을 돌볼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낳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부모는 늙어 갈 테니까.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힘들면 다 때려치우고 대구로 내려온나, 아빠가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나?’라는 말을 충실히 믿으며 사직서를 던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나를 낙하산으로 꽂아 넣겠다는 아빠의 계획은 정권이 바뀌면서 보기 좋게 어그러졌고 나는 실컷 자고 일어나 다시 구직활동에 나서야 했다.


하루아침에 꿈을 포기한 백수가 되었지만 더 이상 불행하지는 않았다.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하루를 살아내지 않아도 예상대로 진행되는 무탈한 하루가 휘청거리는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또, 적당한 양의 수면은 우울에 맞서는 무기가 되어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다. 쥐 똥 만한 월급을 받고도 쓸 시간이 없어 통장에 쌓여 있었던 몇 푼의 돈과 넉넉한 시간을 갖고 나서야 드디어 삶의 주인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높은 이상을 절반쯤은 포기하고 일과 휴식의 균형을 챙길 작정이었다.


마음이 회복되자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동종 업계에 머무르는 이상 나를 좀먹었던 철야를 줄이고 적당한 휴식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직업을 바꾸었다. 첫 번째와는 달리 적당한 시간을 일하고 작은 월급을 받는 직업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았던 직업이 되려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때, 그것이 행복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 자위하고 버티는 대신에 싹둑, 불행의 싹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아니, 힘들어서 도망가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쓸쓸한 기분 끝에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라던 김 과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결국 졌고 소박한 행복을 찾아 떠난 패배자가 되었다.


패배자의 삶은 생활에 안온한 만족을 주었다. 애석하게도 어린 시절 꿈꿔왔던 대단한 전문인력이 되지는 못했지만 삶의 가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도 하니까. 나의 행복은 목표의 성취에서 안정적인 삶에 기반한 편안한 마음으로 옮겨왔다. 새로운 직업을 얻은 지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만족할 정도로 자유롭게 시간을 낭비한다. 오늘은 연가를 내고 제주도 남원에 내려와 바다가 보이는 작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적은 돈과 여유로운 시간은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헝그러운 생활이 주는 만족감에 감사할 때, 이런 삶이 잔잔하게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 내게 닥칠 수도 있는 상황의 변화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제껏 미혼인 자가 미혼으로 늙어갈 모습은 명료하다. 안정적인 직장과 규칙적인 퇴근시간이 만들어내는 단순한 삶은 60살이 된 내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큰 문제가 없다면 정년퇴직을 할 것이고 연금도 받을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오늘처럼 제주도에 내려와 글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나에게 기혼자의 삶은 미지의 세계이다. 행복해지려고 겨우 불행한 상황들을 제거해 놓았는데, 다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가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엄마에게 조카를 맡기고 밀린 잠을 자기 위해서 다시 자기 집으로 향하는 동생의 지친 어깨를 보거나 친구들과 외박을 하기 위해 남편의 눈치를 보며 어렵게 허락을 받아낸 그녀를 보면서 결혼이 주는 행복과 현재의 여유가 주는 만족감을 저울질해 본다. 다시 정신없는 하루가 내 머리채를 잡아끌며 멋대로 흘러가고 우울에 잠식되는 지도 모르고 나를 잃어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는 불행이 틔운 싹을 자르기도 전에 불행의 열매까지 달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이 좋다. 나는 지금이 딱 좋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1인분의 커피 향기로 가득 채운 주말 아침을 사랑한다. 아이의 쨍한 울음 대신 재즈와 와인이 흐르는 붉은 밤의 거실을 아낀다. 가슴이 답답해서 터져버릴 것 같을 때 도망치듯 훌쩍 떠나는 여행이 겨우 터진 숨통이고 시간을 헤프게 쓰는 것은 기분 좋은 사치이다. 더할 나위 없는 현재라서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의 평온이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까?’라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만 이내 바스락 거리는 침대에 홀로 누워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둘러싼 적막에 마음이 고요해짐을 느낀다. 누릴 수 있는 작은 달콤함을 최대한 음미하며 눈을 감으면 ‘그래, 이게 행복이지.’라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행복해져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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