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보지 않겠다고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반항을 했던 잠깐 동안에 엄마는 나를 끌고 링 위로 올라가
“너는 자기밖에 몰라, 정말 이기적이야.”라며 잽을 날려댔다. 두 팔로 가드를 하면서도 ‘내가 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나의 비혼으로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았는데, 어째서 철이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이 되어버린 것일까?
매년 성실히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있고 때때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는 모범시민으로서 살아왔다. 심지어 심리테스트를 하면 가끔은 ‘이타적인 마음의 소유자!’라는 유형이 나오기까지 하는 데 억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조상님의 핏줄을 끊는 불효를 저지르고 노인을 부양할 다음 세대를 생산해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느새 이기적인 인간이라 불리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불안한 가정생활을 지속적으로 목격하게 하고 트라우마로 남게 하는 일부 기혼자들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를 사지로 내몰았던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엄마, 이제 진짜 이기적인 사람은 누구인지 말해볼까?’ 나는 엄마의 양심에 카운터 펀치를 꽂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른다.
결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던 시절에 살아온 엄마는 대학교 교직원이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대구에 내려와 살림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머지 세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밤낮을 바꿔가며 회사에서 일을 했다.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엄마는 교대 근무를 했던 아빠가 깰까 봐 칭얼거리는 동생을 업고 나가 어둡거나 환한 골목길을 홀로 서성거렸다. 그때 그녀의 나이, 어리고 안쓰러운 스물여덟이었다. 5060 세대가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시절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노동자들의 땀, 보이지 않게 그들을 내조했던 배우자의 노고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물!”하면 엄마는 물을 갖다 주었고 아버지가 “밥!”하면 서둘러 밥이 차려졌다. 반면 엄마는 하루종일 우리를 돌보고 청소를 하고 밥을 했지만 그 어느 고생하나 인정받지 못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티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엄마가 치워도 어린 우리는 다시 어지르기를 반복했고 아빠가 올 때쯤 그저 그런 상태를 유지하면 다행이었다. 육아는 전적으로 엄마의 몫이었고 그녀에게는 퇴근시간이 없었다.
돈은 권력이고 그것은 어디에서나 잔인하게 적용이 되었다. 가난한 가족을 평범한 가족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애썼던 그들을 보며 어린 나는 자연스레 힘의 논리를 깨달았다. 바깥‘양반’과 안‘사람’. 경상도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던 것인지 유독 우리 집이 가부장적이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엄마를 부하 직원처럼 부리는 아빠를 보며 나는 결혼을 해서도 결코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사랑으로 엮인 가족이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늘 ‘을’의 입장에 있었던 엄마는 내가 그녀처럼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자처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엄마는 자신이 졌던 무거운 짐을 기어이 나에게도 지우고 싶어 했다. 엄마와 다르게 아기를 낳지 않고 남편의 내조에 관심이 없는 나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자녀의 생산과 양육이라는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죄책감을 씌웠다.
하지만 나는 전쟁이 난다 한들 돈을 벌 작정이었고 그러면서 집안일까지 그럴듯하게 해낼 자신도 없었다. 내가 이런 걱정을 비치면 엄마는 ‘요즘 남자는 아빠 같지 않다.’고 일갈하면서도 ‘결국 여자가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집안일은 누가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는 X세대의 딸에게 어떻게 모든 일을 딱 반으로 나눌 수 있냐고 격분하는 엄마를 보며 그녀는 어째서 항상 남자라는 단어 앞에 저자세로 나가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인지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아기가 생기면 애 밥은 안 해 줄 거야? 애 밥하면서 남편 밥도 하게 돼.”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아기의 밥을 남자가 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나는, 엄마가 보기에 얼마나 한심하고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가끔 엄마의 나이와 내 나이 사이에 고작 26년이 있다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놀랍다. 체감상 260년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자꾸만 나를 집안일의 영역 안으로 밀어 넣고 싶어 하는 엄마의 염려를 안다. 설거지는커녕 젓가락 질조차 서투른 내가, 훗날 보게 될지도 모르는 시어른들에게 밉보일까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자식을 잘 못 가르쳤다고 욕을 들을까, 혹은 자존심이 센 내가 싫은 소리를 듣고 속이 상할까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뼈다귀 해장국 속의 고기가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구분도 못하는 나를 보고 경악하며 식탁 맞은편에 급히 앉아 궁금해하지도 않는 요리 방법을 구태여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있는 시간 만으로 벅차고 12시간 동안 돼지고기의 핏물을 빼서 해장국을 끓일 여력이 없다. 대신 나에겐 스마트폰과 배달의 민족이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고, 엄마의 해장국에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니 좀 더 해롭고 심플하게 살기로 했다.
엄마는 주부이고 아빠는 직장인이었다. 주부이자 직장인이 되어야 하는 요즘, ‘한정된 기운을 어느 쪽에 더 쏟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결혼의 여부나 성별보다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대답이 나뉠 것이다. ‘뼈다귀 해장국을 먹는데 돈 말고 필요한 게 무엇이냐.’는 내가, 구시대에는 남자의 역할이라 규정되었던 경제인의 역할에 훨씬 더 집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초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한다는 것에서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에 내가 설자리가 있다 것을 상기시켜 준다는데 대단한 의미가 있다. 월요일 아침이면 썩은 동태눈을 하고 커피를 들이켜는 어느 평범한 봉급생활자 중 한 명으로서, 변변찮은 나의 직업이 기막힌 행복과 보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안팎으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게 해 주니 이 정도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든다.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힘은 ‘자궁’이 아니라 ‘봉급’에서 나온다. 나는 쓸모없는 자궁을 가진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다. 가치 없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라 그것뿐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