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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Dec 27. 2020

일상의 역설

양은냄비. 물은 적당히. 건더기 수프를 풀고 불을 올린다. 쉰 김치를 꺼내고 그릇에는 찬밥을 얼마 덜어둔다. 3분. 끓는 물에 라면과 분말수프를 넣는다. 아 생각해보니 만두가 있었는데. 급히 냉동만두를 찾아 넣는다. 개인적으로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는 편. 열심히 젓가락으로 들었다 놨다. 이러면 면발에 탄력이 붙는다. 가스레인지 앞. 더운 기운과 함께 매콤한 수프 향이 퍼진다. 코끝이 맵다.     


간식이 땡긴다.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 양모 플리스. 눌러쓴 모자. 그렇게 편의점으로. 투 플러스 원 스윙칩. 칭따오 한 캔. 비싸서 못 사봤던 나뚜루 녹차 아이스크림. 돌아와 주섬주섬 집어 먹는다. 문득 칼로리 수치들이 반사적으로 생각났다. 웃기는 일이지. 다이어트 중인 A였다. 하지만 이번엔 생략하기로.     


A는 이틀을 굶었다. 그동안 방문을 걸고 커튼을 쳤다. 어두운 공기가 내렸다. 이불을 덮고 모로 누웠다. 눈을 감았다. 침묵 속에 자신을 파묻었다. 그러자 밀려오는 가슴속 높은 파고. 몰아치는 감정에 격정이. 끝이라는 생각에 후회가. 그리고 왜 나에게라는 마음으로 억울함이. 한데 뭉쳐 가슴을 압박했다. 그 압력에 눈물이 났다. 짊어진 우울의 중량에 다신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캄캄한 방.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젖은 베개서 머리를 들었다. 배가 고팠다. 굶주린 공복에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A를 흔들어 깨운 건 이틀 묵은 허기였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 배가 고픈 거야? 눈물도 신음도 전부 소진해 버린 자리. A는 처음 황당함에 웃음이 났다. 다음에는 자신의 우울이 방해받은 것에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허기는 간단히 A를 일으켰다. 이내 걷게 했고 뛰게 만들었다. A를 분주하게 만들었다. 결국 살겠다고 A는 냄비에 물을 올리고 말았다.     


라면에 밥, 거기다 간식까지. 배가 든든해지자 가슴이 가벼워졌다. 그런 자신이 허무하기도 혹은 창피하기도. 먹은 자리에 다시 쪼그려 앉아 핸드폰을 보았다. 습관처럼 인스타 피드를 스크롤. 그러다 언팔로우. 그새 자란 손톱에 터치가 거슬린다. 손톱깎이로 또각또각. 그리고 A는 정리된 손톱을 한참 쳐다봤다. 세수부터 해야지. 그전에 설거지부터. 아니 밀린 빨래부터. 그런 후엔 경비실 밀려있는 택배를 가지러 가야겠다. 주문했던 스웨터 사이즈가 잘 맞아야 할 텐데. 그렇다면 A는 기분이 한결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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