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퀴하고도 꾸릿한 냄새. 지하철 첫차에는 그런 냄새가 있다. 오전 7~8시에 맡을 수 있는, 꾸며진 냄새와는 좀 다르다. 가끔 첫차를 탈 때 이런 냄새였지 하고 상기한다. 그리고 첫차 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람이 은근히 아니 꽤 많다. 사람이 만드는 습기와 열기가 그 냄새를 한층 더 짙게 만든다. 그들은 밤을 불태웠거나 어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아니다. 물론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극히 일부다. 대부분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점상이나 용역, 청소노동자 등 새벽부터 일을 준비하고 시작하는 이들이다. 또 숨겨지지 않는 한 부류가 있다. 꾸릿한 냄새의 주인, 노숙인들이다.
노숙인인 걸 어떻게 아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예전에 교회에서 자주 맡았던 냄새니까. 조금 퀴퀴하다고 해서 냄새로 특정할 수 없는 거 아니냐고? 특정할 수 있는 냄새도 있다. 다른 예를 들면 시취가 있다. 그 냄새는 한번 맡으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특수한 환경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냄새기 때문에 고유하다. 그들의 환경 역시 정상적이진 않고, 꽤 특수하다.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올해 초, 설 명절 간에 B시를 다녀왔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데, 오랜만에 아버지가 다니는 고향 교회를 함께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일하셨던, 노숙인 자활 시설에 있었던 아저씨들이 많다.(자활 시설은 얼마 전 없어졌다.) 우리는 보통 그들을 아저씨라 부른다. 그들은 역에서 보는 거리 노숙인들은 아니다. 시설 노숙인이라고도 하는데, 따지고 보면 노숙인이라는 단어보단 홈리스가 적합한 것 같다. 집은 없지만, 밖에서 자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설 명절날 어디 가지 않는다. 역시 홈리스란 단어가 적당한 것 같다.
00, 잘 지내제? 누군가 내게 안부 인사를 건넨다. 영철이다. 교회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영철이도 시설 이용자였다. 지적장애를 가졌고, 학생 때는 청소년 시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활시설, 자활시설이 없어진 후로는 교회 근처에서 방을 잡고 생활하는 녀석이다.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아버지도 나도 익히 알고 있다. 영철이는 특이하게도 아버지한테 항상 내 안부를 묻는다. 00이 잘 지내요? 하지만 그 후속 질문은 없다. 잘 지낸다고 하면 고개만 끄덕거린다. 영철이에게 내가 잘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잘 살면 안심이라도 되는 걸까. 안부 묻는 빈도만 보면 무슨 숨겨진 자식 수준이다. 00이 잘 지내요? 그래 잘 지낸다 이 녀석아.
이번엔 나도 영철이의 안부를 물었다. 너도 잘 지내지? 새로 방 잡았다며? 어, 여 근처에 잡았다. 그러고는 또 말이 없다. 내 걱정을 그토록 해주는 녀석이어서 말을 좀 더 걸어봤는데 별 반응이 없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혼자 좀 더 걱정해주었다. 하다 보니 쓸데없다는 걸 깨달았다.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철이는 지적장애를 가졌다. 눈매는 조금 사납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말투처럼 엉성한 인상이다. 영철이 옆에서 식욕을 관리해 줄 사람이 없어서인지 어릴 때 비해 살도 많이 쪘다. 평생 시설에 사는 걸 보면 부모님도 안 계시는 것 같다. 아니 없는 건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도 못 봤다. 그의 누나만 명절 때 간간이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영철이는 이제 머리도 벗겨졌다. 아, 영철이는 정말 지금 영락없는 아저씨다.
예배가 끝나고 함께 밥을 먹었다. 명절이라 그런지 신경 꽤나 쓴 밥상이었다. 문어숙회, 불고기, 각종 전과 나물까지. 영철이는 말없이 밥만 먹었다. 나도 딱히 더 얘기하지 않았고, 주변 아저씨들의 얘기를 들었다. 들어보니 명절이라 일부러 교회에 온 사람이 꽤 되었다. 그들은 얼마 전 자활 시설이 없어지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한 명은 일 때문에 경기도까지 올라갔단다. 그럼 여기 어떻게 왔어요? 누군가 물었다. 오토바이타고 왔죠. 역시 이곳은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 겨울에 경기도에서 4시간 동안 B시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고? 그날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는 없었다. 음식이 좀 특별하긴 했지만, 정상인은 문어숙회 먹자고 그런 기행을 펼치지 않는다. 그냥 예배드리고 밥 먹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사실 난 어릴 때 우리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답답했고, 뭔가 불쾌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었다. 옛날 우리 교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남성 노숙인, 여성 노숙인, 청소년, 외국인 노동자 등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몇 개의 복지시설을 운영한 탓이었다. 사람 냄새, 그놈의 사람 냄새가 즐비하다 못해 진동하는 곳이었다. 정신없고 복잡했으며 답답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떼인 돈 받으러 가고, 팔 잘린 노동자 산재 처리 도와주고, 도망간 한국 남편 찾으러 다니고, 그러다 또 임신해오고, 와중에 교회 뒤통수치고 도망가는 사람도 생기고. 교회는 그런 사람들과 매주 밥을 해 먹고, 그들을 도와줬다. 밑 빠진 독을 열심히도 부었다. 희망차지도 않은데 모여서 웃고 있는 게 나름 좋아 보이긴 했지만, 내 눈엔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교회에 사람이 많이 줄었다. 각종 시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아저씨들과 몇몇 사람을 포함해 25명 정도다. 그들은 왜 아직도 교회에 나오는 걸까. 시설을 운영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여기 뭐 문어숙회 맛집인가. 그런데 지금은 이 교회에 대한 감상이 좀 달라졌다. 희망이란 게 잘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 밥해주고, 사람이 줄어가는데도 계속 모이고, 그 속에서 웃는 사람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나도 나이가 드는 걸까.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사람이 왜 대단해 보일까. 사실 물 붓는 사람도 알 것이다. 이렇게 해봤자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어렸던 내 눈에도 보였는데 당연하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어리석었던 게 누구인 걸까 싶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걸 준 사람일까, 그 모든 걸 의미 없다며 관망한 사람일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그런 행동을 알면서도 관철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밥을 다 먹고 헤어지면서 인사했다. 인사하면서 영철이를 한 번 더 생각했다. 영철이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으면 누가 영철이를 챙겨줄까. 더 살이 찌고, 늙고, 머리가 벗겨진 영철이는 끊임없이 시설과 집을 왔다갔다하며 살게 될까. 홀애비 냄새를 풍기게 될까. 하지만 이런 걱정과 달리 사실 영철이는 꽤 잘 지낼 것이다. 매주 이곳에 와서 밥을 먹고, 아버지한테 내 안부를 묻을 것이다. 00이 잘 지내요? 그럼 아버지는 잘 지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너나 잘 지내라고 밥 잘 챙겨 먹고 일 잘 다니라고, 아버지는 영철이에게 충고해 줄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잘 지낼 것이다. 오랜만에 봐도 영철이에게 그렇게 대답하고 싶어서다. 응 잘 지내, 너도 잘 지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