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거, 그 사람이 위안이 된다는 거, 그런 감정들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그 공간에서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살펴주는 것이 시작이 아닐까?
재작년 겨울, 이맘때 나는 시골의 조그만 바닷가를 찾았다. 그곳에 간 건은 그 보다 앞 선 5년 전쯤 전의 가을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조그만 시골 읍에서 함께 자란 여학생, 남학생 친구들이었다. 사실 우르르 만나기는 했지만 여자 친구들에 비해 남자 친구들과는 특별한 추억이나 기억이 많지는 않다. 옆집 친구라든지, 특별히 친했던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J도 그랬다. 그냥 그는 당시 그 소읍에서 병원을 하던 집의 막내아들이었다. 하늘색 헐렁한 맨투맨 티를 입고, 운동장에 농구하러 다니던 좀 수줍고 귀티 나던 아이.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 될 무렵에 전학을 갔는데 그 장마철이 기억난다. 부산에 있던 학교에는 교복이 있었는데 여학생은 까만 주름치마였다. 아마 전학을 해서 그 치마를 입고 가지는 않았는데 반바지나 치마를 입고, 전학생으로 소개되었던 흐릿한 5학년 1반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더 어렸던,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학했던 날은 뚜렷이 기억나는데 고성에서의 기억은 오히려 별로 없다. 그냥 아이들이 부산 아이들보다 더 순하고, 시골아이들만의 순박함이 있었다. 그런 소읍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이 되었고, 중3 겨울방학 때였나, 각자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우리가 다닌 초등학교 운동장에 잘 어울리던 여자 친구 5명, 남자 친구 5명이 모여 조깅을 하러 다녔다. 새벽마다 대치동 어느 학원가를 가는 게 아니라, 초등학교 운동장을 돈 기억이 지금 생각해도 신난다. 게다가 운동장을 돌고 나서는 롯데리아를 간 게 아니라 고성읍 공룡시장에서 콩물을 사 먹었다는 것도 귀엽다. 집에서 부모님들이 사드시던 걸 따라 한 건지, 누가 먼저 마시자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콩물을 사서 먹고, 나는 집에까지 사 오고 그랬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기 전 겨울방학을 가끔 만나면서 보내고, 각자 고교시절을 보내고, 우리 집은 고2 때 완전히 고성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가세가 많이 기울어서 이사를 한 지라, 친구들도 내가 이사 가는 것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 후, 대학교 1학년 땐가 스무 살 때에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그때 그 멤버들이 같이. 그중 친구 J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영주야, 너 밥은 먹고 다니냐? 너희 집 망해서 학교도 못 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하던...
순간 부끄럽고, 울컥했지만, 그 말이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이후 나는 그 친구가 좀 편해졌다. 어쩌면 다른 친구들은 뒤에서 쉬쉬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친구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J는 부잣집 아들이어서 또래 친구들보다 풍족해 보였고, 나는 만날 때마다 친구까지 데리고 다니며 커피며, 술이며 어울려서 마시고, 놀았다. J와 아주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나누었던 소소한 대화까지 다 기억나는 걸 보면, 만날 때마다 J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가끔씩 추임새를 넣어주며 되새김질까지 해주었다. 간밤에 클럽에 가서 놀고 너무 늦어서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는 말, 서로 좀 놀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시절, 우리는 좀 맨숭맨숭 들러리가 되었던 기억까지... 그리고, 20대 후반, 서른 쯤 되었을까? 그 친구가 내가 다니던 프로덕션 근처 사무실에 다녔다. 그렇게 우연히 만나, 우리 프로덕션에 방문해서 편집실이랑 구경하고, 함께 일하던 PD 분과 인사도 나누고 그랬던 J다. 그런 조금은 각별했던 추억이 한참이 지나고 만났어도 서로의 생활들이 조금 가늠이 되며 그냥 반갑고 좋았다.
그렇게 또 소식 없이 지내다가 5,6년 전 가을, 시골에 갔다가 그 친구가 고향에 아주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른 여자 친구와 셋이 만나 처음으로 갔던 장소가 ‘바닷가에 햇살 한 스푼’이었다. 이곳에 갔던 것도 전날 친구가 사무실에서 만둣국을 끓여줘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가자고 했던 것. 오랜만에 함께 했던 옛 시절을 돌이켜보며, 아련하고 행복했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그리고, 다시 재작년 겨울, 그 친구와 갔던 ‘바닷가에 햇살 한 스푼’에서의 점심은 내게 특별한 점심이었다. 그간 그 친구가 나에게 해주었던 따뜻한 배려와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해주었다는 고마움이 새삼 그즈음 뚜렷이 각인이 되어 진심 고맙고, 그 친구에 대한 우정과 애정이 깊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돈가스를 먼저 먹고, 내가 파스타를 먹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테라스로 나가보고 와. 저기 엄청 좋아. 여기 내가 좋아해서 가끔 오는 집이다.”라고 하면서 권했다. 그 친구는 순순히 나갔고, 계산을 마친 나는 “어땠어?” 하니까 “바다가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더라. 날씨도 너무 좋고,” 하면서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는 해안도로를 드라이브시켜주고, 다음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서로를 생각한다는 건,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다는 것, 서로의 상태를 확인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조금의 위안과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것, ‘바닷가에 햇살 한 스푼’처럼 그렇게, 무한한 애정의 바다에 한 줌 마음을 보태는 것, 그런 따스함을 느끼는 순간을 내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사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