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꽤 먹고 나서, 불과 몇 해 전에 돌싱이 된 대학동창을 만났다. 같은 과 친구는 아니고 학교 방송국 친구였다. 학교 때 그 친구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샌님이었다. 늘 즐겨 입는 옷만 입는 타입였는데 그땐 모든 게 넘쳐나던 시기까지는 아니었으나.. 멋쟁이까지는 아니지만 댄디한 느낌의.. 그러나 약간 귀티 나는 친구, 마마보이 같기도 하고 와일드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좀 성숙해 보이고 기댈만한 사람이 필요했기에 이 친구는 관심 밖이었다.
근 20년이 지나 만난 동기의 모습은 가수 김세환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해 줬다. 게다가 직업도 개인 기획사. 음악공연 프로듀서였다. 원래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편인데 같은 예술학교 동창에 기획력까지 갖춘 이지적인 친구로 보였다.
우린 다른 친구 한 명과 처음 만난 날 거의 새벽까지 마셨다. 그리고 각자 살아온 얘기 등등을 했다. 우리 둘 말고 한 친구는 우리가 둘 다 혼자이다 보니 둘을 연결시켜주려 애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안됐다.
그 친구와 몇 번을 만나고 별 일 아닌 일로 안 만나고, 화해하고 동창으로는, 동창이니까.. 또 만나 지고는 했지만 이젠 정말 소원해졌다.
그와 데이트하던 어느 날 그가 다른 친구 J를 불렀다. 그 친구도 동창이었지만 나는 처음 보는 친구였다. 그런데 우리 둘의 대화가 곧잘 되었다. 방송일 하는 것도 그렇고, 그 친구는 영화를 전공해서 나와 관심 분야가 비슷했다. 처음 만나 제법 쿵작이 맞는 걸 보고 나와 막 사귈락 말락-요즘 말로 썸이었나 보다-하던 친구 S가 돌연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는 게 아닌가?
J도 놀라 전철역까지 가서 S를 달래 나한테 돌려보냈다. 나는 LP 틀어주는 바에 같이 가겠냐고 했는데 친구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우리는 그날 좀 더운 봄날이어서 빙수집으로 갔다. 친구는 나 때문이 아니며, J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이다. J가 번번이 자기의 여자 친구들만 만나면 오버한다는 것. 나는 거꾸로 S의 친구라 잘 대해줬던 거뿐인데.. 어쨌든 눈 앞의 그가 당황스럽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아직 서로의 관계가 무르익지 않았을 때 제삼자가 끼는 건 별로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가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면 모를까. 청춘을 지나고 와 보니 그런 디테일한 감정에는 참 무뎠었구나, 한다. 더 웃지 못할 사실은 내가 그 후 지방에 살게 된 S를 한 번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J가 알면 "봐. 니들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할 줄 알았다고?" 했을지도..
원래 인생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사랑 역시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