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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리얼리스트 Jun 17. 2020

외가에서 맛보던 사계절 맛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의 기억

벌써부터 푹푹 찌는 이른 더위에 땀이 삐질삐질 나온다. 이럴 때 수박 한 덩이 먹으며 시원한 마당 평상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서울깍쟁이였던 나는 초등학교 때  방학  때 면  달간  외갓집에서 지냈다. 지금도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 오토바이 뒤에 실려 읍내에 있는 청과물 시장에서 복숭아, 참외, 포도, 수박 같은 여름 과일을 사다가 나르셨던 생각이 난다.

                                                                              

읍내뿐이던가? 할아버지 오토바이에 실려 충무-당시는 통영을 충무로 부름-까지 가서 강구안 앞에 있던 충무할매김밥 사 오던 기억. 여름철에 외할머니는 별미로 장어국을 끓여주셨다. 바닷장어로 추어탕처럼 뼈째 푹 고아 숙주를 넣고 끓이는 맑은 국이었는데 어린아이의 입맛에도 살이 오르는 느낌처럼 속까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장어국과 잘 어울렸던 나박김치도 생각난다. 무를 어슷 썰기로 썰고, 고춧가루는 많이 넣지 않고, 홍고추 간 걸로 듬성듬성 시원하게 멸치액젓으로 담근 김치는 여름방학이면 할머니 댁에서만 맛볼 수  있는 외할머니표 김치다.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메인이라면 봄철은 애피타이저다. 방학이 길지 않아 자주 머무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봄철이면 할머니 댁에서 먹던 음식은 멸치 회다. 멸치 회를 미나리와 무쳐서 먹는 맛이란! 입에 착착 감겨오는 감칠맛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거기에 봄철이면 삶아 먹는 음식이 털치-갯가재-다. 국으로 끓이거나, 된장찌개에 넣어먹기도 하지만 따로 삶아먹던 털치는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먹는 랍스터 저리 가라였다. 봄철에는 산란기라 알을 품고 있었는데 삶은 털치의 분홍빛 속살과 함께 알의 고소하고 달짝지끈한 맛은 고숩기가 하늘을 찔다. 거기에 털게를 간장게장으로 담가놓으셨다가 우리가 가면 내어놓으셨는데 여름철 입맛 없을 때 밥에 비벼 먹으면 그야말로 밥도둑!!


가을은 전어다. 추석 명절 때나, 전후로 외갓집에 가면 꼭 회를 먹었다. 전어 회는 무를 채 썰어 넣고 초고추장에 비빈다. 그렇게 해서 봄철의 멸치 회처럼 가을엔 전어 회를 온 가족이 둘러앉아 비벼 먹었다. 멸치 회엔 미나리, 전어 회엔 무채... 가족과 함께 먹을 때엔 커다란 양푼이에 멸치나 전어를 넣고 비벼서 할머니가 손수 담아 나눠

주셨다. 추석 음식으로는 찹쌀 전을 꼽을 수 있겠다. 봄철에 먹는 진달래꽃 넣은 화전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익반죽으로 찹쌀로 빚어 노릇노릇 지져낸 전에 꿀을 발라 먹었다. 쫄깃쫄깃 기름진 찹쌀전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찹쌀 전과 같이 그즈음 먹던 음식은 고추 지짐이. 방아 넣고, 홍합 넣고 청양고추 다져서 부추와 함께 지져먹는 고추 지짐이는 ‘소울 푸드’라고 할 정도다. 고추지짐이의 포인트는 방아 잎! 경남지역에서는 추어탕과 해물찜 등에 향이 진한 방아잎을 넣어 먹는데 입맛을 돋우는 데 도움도 되고 뭔가 맛을 완성하는 엑센트가 되는 것이다. 가을철 고추 지짐이를 먹고 돌아오면 추운 겨울을 지낼 힘이 될 정도로, 고추 지짐이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음식이지만, 안 먹으면 섭섭한 그런 음식이었다.


겨울은 방학이 길었고, 서울에서 학교 다녔던 이모, 외삼촌과 함께 좀 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 집은 서울에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했는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외삼촌이 서울로 돌아가는 날, 할머니가 새벽밥을 지어주던 기억은 늘 나의 추억 속 필름 속에 남아있다. 얼마나 정성된 밥상이었던지, 맛있게 먹는 외삼촌의 신난 표정이 어린 나의 눈에 도 흐뭇해서 덩달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외할머니는 미리 메기를 사다 꾸덕꾸덕 말려놓으셨다가 고방에서 메기를 가져다가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된장을 베이스로 고추장도 살짝 넣고 쪄냈던 메기 찜은 찜대로, 메기 된장국에는 씹는 맛도 일품인 메기 알이 들어간다. 그 메기 된장국과 할아버지․할머니가 다니던 절에서 튀겨온 김부각, 그리고 겨울철이면 늘 담가먹던 굴젓(석하 젓). 삼촌은 따뜻하게 내어 놓은 메기 된장을 먹으며 연신 후후거렸다. 하얀 김이 안경을 가리면 안경을 벗고, 코를 풀어가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숭늉을 내어 놓으시던 할머니. 외삼촌은 그 아침밥을 먹고, 첫차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나는 아마 며칠 더 있다가 부산으로 갔겠지. 외갓집에서의 추억이 참으로 많지만, 지금도 외할머니의 밥상을 받아먹던 까까머리 사춘기 소년의 먹성이 그렇게 좋았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는 떠나고 없지만, 우리는 그 입맛과 정성으로 이만큼 성숙했다.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첫차로 서울로 떠났던 삼촌은 올해 환갑을 맞으셨다. 그리고 언제나 따뜻한 인품으로 우리를 반기는 멋쟁이 할아버지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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