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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Jun 17. 2020

물욕이 중요하지 않는 생활.

 

한창 성장기인 아이의 발이 사정없이 커지는 바람에 운동화를 사러 갈 일이 생겼다. 한 손에 두발을 올려놓아도 다 감싸 질 만큼 작던 녀석의 발은 10년 새 훌쩍 커버려 이제는 나보다 큰 사이즈의 신발이 필요해졌다. 폭풍 성장을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더딤 없이, 이상 없이 잘 자라주고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이제는 키즈(kids) 라인은 고사하고 유스(Youth) 라인에서도 아이의 발에 맞는 사이즈는 없다. 조금 작은 어른 신발은 되어야 넉넉하게 신을 만해졌단다. 그동안은 학교가 클로즈되는 바람에 슬리퍼로 버텼지만 봉쇄가 하나 둘 풀리며 공원 운동시설 이용도 가능해지니 운동화를 사야 될 시간이 오긴 온 듯하다. 


다행스럽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아직까지 패션에 큰 관심이 없다. 옷을 고르지도 못할뿐더러 아침마다 집어주는 옷을 뭔지도 모르고 입고 나가는 것은 기본이고, 뒤집어 입는 일도 셀 수 없이 많다. 아이가 싫어하는 옷은 딱 하나, 불편한 옷뿐이다. 꽉 뀌거나 혹은 잘 늘어나지 않거나 단추를 꿰어야 하는 옷 등은 입기 꺼려한다. 그저 편한 트레이닝 복 정도면 주워 입힌 들 군소리 없이 입어주는 놈이다. 풍요롭지 못한 부모 형편엔 제격이지만 한 번씩 전혀 불평이 없는 모습이 어쩔 때는 걱정이 될 때도 있다. 패션이 자신감을 올려준다는 신념이 있는 아이 아빠는 항상 자신을 가꾸고 꾸미는 데에 관심을 두라고 조언을 하지만 뼈속부터 캐나다 마인드인 아이는,



나는 괜찮아. 패션 별로 안 좋아해. 




라며 뚝심 있는 발언으로 아빠에게 맞수를 두곤 한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한국에서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생활비의 최소 1-20% 정도는 의류 구입으로 할당이 되었던 것 같다. 사시사철 변하는 유행과 모모 연예인이 신고 나오는 신발, 헤어스타일 등 소비를 지체하기 힘든 사회이기도 했다. 차림새에 일차적 인상을 매기는 분위기 탓도 한몫은 했고. 물론 나도 옷을 이쁘게 입는 것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이쁜 옷을 고르기 위해 많이 걷고, 많이 찾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은 사양이었지만 유행에 맞는 옷을 사러 꼬박꼬박 백화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을 찾고 살았다. 이쁜 옷을 입고 나가면 괜스레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말투에도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꼭 그게 좋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지금 보다는 더 젊은)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재미있게도 이민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의 물욕은 하향 곡선을 타다 못해 무에 가까워질 정도로 구매욕을 당기는 일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한국보다 몇 배로 드는 고정 생활비 덕도 있겠지만, 이쁜 옷과 좋은 물건, 유행하는 아이템들에 대한 관심이 날로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도 계절마다 유행이 있고, 셀럽들의 아이템이 이슈화 되기도 한다. 쇼핑몰도 아주 다양해서 소비가 어렵지 않은 나라이지만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씩 흡수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캐네디언이나 한국인들은 적어도) 차림새로 사람을 입에 올리는 일은 거의 보지를 못했다. 


요즘은 유행하는 옷이 입고 싶어서가 아니라 꼭 필요에 의해 쇼핑을 하러 간다. 필요한 것만 사기 때문에 쇼핑몰에서 버리는 시간도 적고, 예상에 없던 불필요한 물건을 계산대 위에 올릴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인하여 생기는 '쓰지 않음'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소신, 외 보다 내를 더 꾸밀 수 있는 이유가 동반되어 한국과 캐나다의 삶을 비교해보면 차이는 정말 어마어마 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간혹 SNS에서 한국에 사는 친구들의 사진을 보면 한눈에 보아도 세련되고 이쁜 옷과 스타일에 놀라곤 한다. 우리 나이보다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이는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구매의지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갑을 열 때마다 몇 번씩 생각하는 습관이 생겨 마음을 다 먹고도 계산 직전에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도 허다한 일이 되었다. 아껴야 되는 이유, 가득하지 못한 여유가 반이라면 소비가 풀어줬던 스트레스는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음을 완전히 알았버린 것도 반은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코로나 덕분에 겨울과 봄 사이를 홀연히 보내버리고 봄 옷 준비는커녕 여름옷 골라내기로 넘어간 지금 옷 장을 열어보니 대부분의 옷들이 구입한 지가 최소 4-5년은 되는 것들이다. 무색을 좋아해서 다행히 유행을 탈 일이 없는 옷들이라 헌 옷 수거함으로 보내질 옷들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 대충 하의와 상의를 세트로 정해두고 요일별로 갈아입는 것으로 코디에 필요한 시간도 거의 없어진 것 같다. 신기하게도 그것이 전혀 신경이 쓰이질 않는다. 요즘 티브이만 돌리면 나오는 말처럼 '자존감' 이 높아져서 일까.  나의 차림새로 누군가의 평을 받을 이유가 없는 땅이라서 일까. 이유를 막론하고 물욕이 줄어든 다는 것은 가계를 위해서도, 환경을 위해서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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