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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Nov 14. 2020

아이에게 한 방 먹었던 시부모님 제삿날.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 무슨 제사냐고들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일 년에 딱 하루 시아버님의 기일에 맞춰 시어머님까지 같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외아들에 집안의 장손이었던 남편 덕분에 이민을 오기 전 한국에서는 추석과 설날, 명절 두 번에 시할아버님, 할머님 그리고 시어머니 제사까지 일 년에 네다섯 번씩은 제사를 지냈었다. 캐나다로 오면서도 제사는 가지고 와서 지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적응하는 처음 한동안은 아버님께 부탁드리고자 했었다. 하지만 아버님까지 갑자기 돌아가시고 시집간 시누에게 제사를 맡기고 올 수 없어 시차가 다른 남의 나라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님은 남편이 결혼 전에 벌써 돌아가시고 안 계셨고 아버님은 우리가 캐나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마도 우리가 캐나다행을 준비하면서부터 본인의 병을 아셨겠지만 열심히 이민을 준비하는 자식들에게 차마 말씀하지 못하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님께서 위급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남편이 한국으로 갔지만 2주 후에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기일은 겨우 일주일 차이라 우리끼리 편하자고 하는 생각이지만 왠지 아버님께서 어머님 기일에 비슷하게 맞춰 돌아가신 건 아닐까 싶었다. 일주일 상간으로 두 번이나 제사상을 차리는 게 부담스러웠던 머릿속에서 고안해낸 핑계에 지나지 않겠지만 직장문제, 먹고사는 문제, 시차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억지로 끼워 맞춰 한 날에 지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처음엔 명절에도 하다못해 북어포와 과일 하나, 소주 한 병이라도 올리고 간단히 지냈지만, 


"돌아가시고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라는 남편의 한마디에 시부모님 기일 하루만 제대로 챙기기로 했다. 명절이면 카카오톡으로 시부모님 차례 잘 모셨냐는 친정 부모님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며 넘겼고 알면서 하지 않은 죄책감에 한동안 마음이 가볍진 않았다. 망각은 몸이 편할 때 더 열렬히 발동을 해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추석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 시부모님의 기일이다. 항상 제사를 준비하기 전에는 아이에게 그 날에 대해 각인시켜 주는데 한국말이 어눌한 아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는 기억을 하고 그 날은 다른 날처럼 장난치면 안 되는 진지한 날인 줄은 안다. 절도하고 술도 따르고 기도도 하면서 일 년에 딱 하루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라 사뭇 진지하면서도 한편 상기된 모습도 보이는 녀석이다. 엄마의 아빠, 엄마는 한국에서 살고 계시지만, 아빠의 아빠,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다며 혹시라도 아빠가 듣기에 슬프지 않게 말하는 센스도 보여준다. 


아침 일찍이 한인 마트 세 군대를 들려 장을 봐왔다. 웬만한 재료는 다 구할 수 있지만 그래도 깐 밤이라던지 제수용 오징어 포 등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이 꼭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들려 보지만 없는 것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지냈던 제사에 비하면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규모이지만 그래도 구색은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하루 종일 기름 냄새 뿜어가며 음식을 하고 그릇에 담아내면 아이와 아빠는 제사상 차리기 예시 사진을 봐가면서 열심히 차린다. 더듬더듬 한글을 읽어가면서 아빠에게 위치를 안내해주고, 아이 아빠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이의 지시대로 상을 차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캐나다 한가운데서 가장 한국적으로 지내는 제사를 아이가 어떻게 이해를 할까 내심 궁금하지만 묻는 것은 미뤄두고 제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상을 다 차리고 마지막으로 시부모님의 영정사진을 올렸다. 참 신기하게도 사진 속 아버님, 어머님의 표정은 볼 때마다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떨 땐 좀 언짢은 표정이시기도 하고 또 다를 땐 온화한 표정을 보여주신다. 이번 제사에서는 다행히도 두 분의 표정이 좋아 보이셨다. 내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거겠지만 두 분의 사진을 꺼낼 때마다 지난 일 년을 심판받는 기분이 들어 살짝 떨리기도 한다. 


초에 불을 켜고 아버님께서 너무 좋아하시던 소주 한잔을 올리면서 제를 시작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할 때부터 따라 하던 절이라 이제는 눈치껏 속도를 맞추며 절을 한다. 곁 눈으로 살짝 엿보는 게 느껴지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진지한 자세로 제사에 임했다. 아이도 우리를 따라서 열심히 절을 하며 술을 따르는 법, 올리는 법, 젓가락을 놔두는 법 등을 배우게 했다. 이해가 안 되는 눈치지만 그래도 잘 따라는 모습이 기특하다.  



사진 성주



제를 다 지내고 초를 끄기 전 잠깐 앉아서 아버님, 어머님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항상 가진다. 


"아버님, 어머님, 저희들 건강하게 잘 지켜봐 주시고, 열심히 사는 만큼 잘 먹고살게 돌봐주세요.

 OO아 너도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기도했어? 안 했으면 지금 말해봐" 

"응, 마음속으로 했어."

"뭐라고 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next life는 조금 더 행복하라고 말했어." 



예상치 못한 아이의 기도를 듣고 남편과 나는 한참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나는 눈물이 터져버렸고, 남편 눈가도 촉촉해지고 있었다. 


"아.. OO 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서 기도를 했구나. 그래, 그게 진정한 기도지.

  아빠, 엄마가 너무 부끄럽네.." 


우리 마음대로 편할 대로 시차도 맞지 않게 제를 지내면서 그것도 일부러 멀리 캐나다까지 제삿밥 드시러 오시는 분들께 끝까지 이기적으로 우리의 염원만을 바라고 기도한 것이 아이의 순수한 기도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아이기 아직 어려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더 컸다고 하더라도 생각해보면 늘 제사상에서 꺼냈던 우리의 기도나 말들은 '우리 잘되게 해 주세요." 였으니 말이다. 돌아가셔서도 지켜보고 돌봐 달라는 징징거림에 얼마나 듣기 싫으셨을까 죄송한 마음만 가득해진다. 힘든 이민생활 때문이라고 갖다 붙이기엔 이미 너무 많이 써먹은 카드라서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민까지 와서 시부모님 제사 꼬박꼬박 챙기는 착한 며느리라고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을까, 괜히 음식도 이집저집 나눠주고, 제사 지낸 사진을 찍어 시누이에게 안 빼먹고 지냈노라고 보고하듯 알리기도 했다. 우리 이만큼 챙겼으니 보답이라도 바라듯 우리의 잘됨만을 빌고 빌었던 모습이 참 못났다. 그리고 부끄럽다. 


실은 노고라고 생각했던 깊숙한 진심이 너무나 창피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는 날 위해 남편이 위로랍시고 한마디 던진다. 



"쟤는 아직 사회에 덜 찌들어서 그래, 우리가 이것저것 다 해주니까 아쉬운 게 없어서 그래." 




그래, 그렇다고 쳐도 아이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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