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주 Dec 29. 2020

이혼한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역시나 12월은 바쁘다. 일이 바쁘지 않더라도 크리스마스며 연말이며 충분히 바쁜 일들로 천지인데 일까지 한몫 단단히 거든다. 코로나 사태로 실업자가 대거 속출하는 시대에 하루 10시간, 12시간씩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거겠지만 눈 깜짝할 새에 일주일씩 지나가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힐 정도다. 


잠자는 것과 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바쁘게 지나가더니 크리스마스를 코 앞에 두고 조금 여유가 생겼다. 엉망이 되어버린 집안도 꼼꼼히 치우고, 텅텅 비어버려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던 냉장고 안도 꽉꽉 채워 넣었다. 그리고 세탁기를 돌리려니 세제가 똑 떨어지고 없다. 하긴 세탁기를 내 손으로 돌린 게 언제인지 기억이 까마득한 것이 괜히 바쁘다고 짜증 부렸던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제대로 날을 잡아 구석구석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집안을 달달한 불고기 향으로 채운 뒤 집이 집다워지는 모습을 보고 책상에 앉아 탁상 달력과 펜을 꺼내었다. 혹시라도 챙기지 못한 기념일이라도 체크하고 남은 2020년이 며칠이나 되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12월의 페이지를 눈으로 훑는데 낯선 듯 익숙한 숫자가 들어온다. 



'18일... 12월 18일이 무슨 날이더라....'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이혼한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연락도 하지 않는 중고등학교 친구들 생일부터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지인의 생일까지, 나는 날짜에 대한 기억력이 상당히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은 몇 년 동안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이혼하신 지 오래되었기에 기억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서이겠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기억을 하고 살았을 법 도한데 말이다.


12월 18일이란 날짜를 기억하고 나니 아빠, 엄마가 결혼식을 하던 그 날이 기억이 났다. 부모님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내가 12살, 동생이 8살이 되던 해에 결혼식을 올리셨다. 그것도 외할머니의 성화를 못 이기고 올린 듯했다. 어려도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져버린 엄마가 결혼식도 못 올리고 첫 아이인 내가 열두 살이 되도록 나아지는 것 없이 어렵게 사는 모습이 많이 안돼 보이셨는지 아빠까지 다그치시며 결혼식을 올리라고 하시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요즘 같아선 아이를 낳고 살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아이들도 결혼식에 참석해 같이 축하해주는 분위기지만 그때만 해도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벌써 20년도 훨씬 전이니 아이를 낳고 살다가 올리는 결혼식이 떳떳한 분위기는 아니었는지 부모님의 결혼식날에 나와 동생은 평소처럼 티브이를 보면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어린 동생은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티브이를 보며 깔깔 웃고나 있는데 나 혼자만 속상해하면서 빨리 아빠 엄마의 결혼식 사진을 보길 기다렸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하얀색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와 멋진 턱시도를 입은 아빠의 모습이 몹시 궁금했다. 할머니, 외할머니, 고모, 이모들 모두 예쁜 한복을 입고 머리며 화장까지 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한껏 꾸미고 가는데 나와 동생만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아니 그 속에 우리는 끼면 안 될 존재라는 기분이 들어 속이 많이 상했었다. 그 결혼과 사랑의 결실인 우리는 그 날에 숨겨져 있어야 하는 존재였을까. 


결국엔 오래가지 못하고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둘 다 너무 어린 나이에 위태롭게 시작된 결혼생활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 그런 부모님의 결정이 이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어릴 땐 엄마의 시도 때도 없는 부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던 엄마는 속상함을 집을 나가는 것으로 해결했고, 그때마다 나와 동생은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나중엔 어린 동생이 안되었는지 동생까지고 데리고 없어져버려 나는 할머니 집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 따뜻한 정, 말 한마디 주지 않는 엄마에게 갈구했던 모정을 원망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살았다. 갈구가 깊어질수록 원망도 깊어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처음엔 더욱 엄마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만지는 것도 아까운 아이를 두고 어떻게 자기 속 편하자고 집을 나가버렸을까. 내가 가진 모든 이해력 세포들을 모아보려고 해도 해소가 되지 않는 감정들로 힘들었다. 


아이가 이쁜 만큼 더 힘들고 힘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신기하게도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빠에게 깊은 정 없이 아이들만 보고 살기엔 엄마는 아주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본인도 한창 어린 나이에 짊어지어야 했던 삶의 무게가 감당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이해하는 만큼 엄마와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나이가 들어가는 엄마는 이제 나에게 미안하다와 사랑한다는 말을 수시로 한다. '해준 것도 없는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다. 이혼을 선택한 엄마는 자유로운 만큼 외로운 인생을 사는 것 같이 보였다.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스스로를 외로운 대상으로 학대하며 사는 듯했다. 외롭고 헛헛한 마음을 밤낮없이 일만 하는 것으로 위로하면 살아가고 있다.


엄마의 그런 삶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차라리 조금 밉더라도 더 맞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받고 살길 바랐다. 그래야 적어도 엄마에게라도 신경을 덜 쓰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이기적인 마음에. 


아이를 낳고 12년 만에 올린 결혼식의 의미는 없어진 지 오래이고 힘든 결혼식만큼이나 힘들었을 이혼이라는 선택은 아빠나 엄마, 그리고 우리 남매 그 누구도 행복이라는 테두리로 받쳐주지 못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상처라는 같은 이름을 안고 살아가는 것만 비슷할 뿐이다. 각자 열심히들 노력은 하고 있을 것이다. 주어진 인생의 무게를 견뎌내 가면서. 


잘라내어 잊어버리고 살던 밝지 않은 인생의 한 토막이 생각이나 또 한동안은 우울해질 듯하다. 아마도 그래서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굳이 기억해내지 않고 살았었나 보다. 


외로운 마음에 아이를 한 번 더 껴안아 본다. 



이전 15화 아이에게 한 방 먹었던 시부모님 제삿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