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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Jun 11. 2020

염려를 안고 살아가는 삶.

바쁜 시기를 밀어내 버리고 숨 좀 골랐을 뿐인데 어느덧 6월이다. 



일 년의 반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보다 현실감 떨어지게 바이러스 나부랭이와 뒤 섞여 지낸 2020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고 있음에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투(two) 잡을 넘어 쓰리(three) 잡으로 겨울을 가차 없이 달리고 나니 여유와 함께 찾아온 칩거 생활은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듯하다.  말도 안 되는 캐나다 날씨가 무심하게 느껴질 만큼 아직도 캐나다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열심히 싸우고 있기에 당분간은 집에서 얌전히 시간을 때워야 할 것 같다. 


조금 살만해지니 한국에 있는 가족이 많이 그리워진다. 마치 잊어버린 듯 머릿속에서 한동안 떠올려지지 않던 가족들의 소식이 궁금하고 알고 싶어 졌다. '먹고살기 바빠서' 란 막강하고 보다 편한 이유가 좋은 핑곗거리라 두세 번의 휴대폰 터치로도 닿을 수 있는 가족과의 통화도 깡그리 뒷전으로 하고 살았는데 말이다. 


얼마 전 지인의 가족이 갑작스레 세상을 달리하는 일이 일어났지만 형체도 없는 바이러스는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는 것 마저 허용치 않았다. 멀리서 지켜볼 작별인사라도 자가격리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눈 앞에서 실감할 수 없었던 가족의 죽음을 요즘 말로 '랜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심정이야 오죽할까. 아니면, 시대가 발전하여 휴대폰 화면으로나마 가족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까. 




겁이 났다. 



그래, 먹고사는 거 바빠 드문드문했던 연락이었지만 나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영주권도 취득했고, 직장도, 살 곳도 탄탄하게 다져가며 노쇄해져 가는 부모님과 좋은 캐나다 공기를 함께 맡으며 사는 날을 그려나갔다. 탄식이 흘러나오는 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따뜻한 차 한잔으로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낯간지러운 정을 표하며 중년을 맞이할 소소한 꿈을 담고 앞만 보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 


나의 계획대로 그들이 기다려줄 수 있다고 누구도 보장할 일이 아니었다. 건강이던 돈 때문이던 힘들다는 소식이 듣고 싶지 않아 소식을 묻는 것이 꺼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들 당장 달려가 볼 수 없는 형편만 한탄스럽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주저할 일이 아니었다. 때아닌 딸의 전화에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는 그저 밝기만 했다. 안도감, 후회감 그리고 묵직한 그리움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야들해진 환갑이 넘은 아빠도 곧장 따라서 눈물을 터트린다. 언제부터인가 아빠의 세월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가슴을 시큰거리게 만들기 딱 좋아져 있었다. 


아빠가 머리 쪽 MRI 검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 한마디에 갖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가벼운 검진으로 끝나 웃으며 잘 되었다고 넘길 일이길 바라지만, 삶에 열정적인 그의 모습과 반하게 이제 이곳저곳 고장이 나기 시작할 만큼 아빠는 늙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조금씩 낡아가는 것일 뿐 깊이 있는 병은 아니길 바란다. 내년쯤 한국을 방문하려 했던 계획이 무사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언젠가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말이 뇌리를 스친다. 


조금 살만하니 또 새록새록 솟아나는 고민들은 모처럼 가지는 여유와 비례하여 불안함으로 다가온다. 불안함을 긍정으로 끓어 올릴 패기는 숨어버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결국 친구에게 털어놓자 괜찮은 문구의 위로가 돌아왔다. 



하이데거가 중점을 두려고 했던 것은 현존재의 자기 존재와 관련된 것으로 바로 '염려'이다. 이 세계에 그 실존이 내던져진 현존재들은 각자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 부담을 떠안고 있으며 이를 감내해내야 한다. 『존재와 시간』에서는 염려 신화까지 끌어들여 염려를 인간의 타고난 특성으로 보았는데, 이는 시간의 유한성 즉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감내해야 하는 염려를 우리는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로 털어놓고 살면 어떤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어떤 것은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고 또 어떤 것은 나만 전전긍긍하는 일이 아닌데 마치 나는 불안을 어느 정도 즐기는 것 같아져서 그 불안이 더 불안하게 느껴진다. 염려가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라니 조금은 안도해볼 만하다. 어차피 내 걱정의 정도에 상관없이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이 곳이 캐나다가 아닌 한국이었다면 불안감이 덜 해졌을까. 내 손으로 짐을 싸고 발 디딘 이민의 삶 속이라 갑절이 되는 그리움과 함께 동반되는 불안감을 잘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도 우리 삶의 한 길이겠지. 늘 자주 하는 말처럼 이것 역시 나의 선택이었으므로.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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