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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Jan 02. 2020

1월 1일이지만 출근

어디까지 왔을까.

미치게 바빴던 12월



2019년의 12월은 내 삶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바빴다.


투잡러(two jobs)인 탓에 일을 닥치는 대로 빼지 않고 하다 보니 제대로 쉰 날은 3일이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두 가지 일 모두 크리스마스 시즌을 타는 일이라 수지맞은 것 마냥 여기저기서 나를 찾아댔다. 크리스마스이브는 물론이고 크리스마스 데이, 뉴 이얼즈 이브, 뉴 이얼즈 데이까지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덕에 12월에 벌어들인 수익은 꽤 짭짤했지만 아이와 남편은 (언제나처럼) 나 없이 고스란히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버렸다.


매년 가을이 시작되는 9월쯤이면 이번 연말은 내쫓기듯이 보내버리지 않을 것이라, 꼭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보내리라 다짐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겨우 이삼일만을 남겨둔 채로 온통 일에 매여 보낸 시간을 아쉬워하기에만 급급했다. 벌써 몇 년을 엄마 없이, 와이프 없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인지 아무리 좋은 선물을 품에 안겨준들 남편과 아이는 행복해할까.


출근하는 나의 등 뒤로 남편이 괜히 무심한 척 흘리듯 물었다.


"내일도 일하러 가는 거지?"

"가야지, 알면서 왜 물어?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알면서도 얄짤없이 역시 나로 대답해주는 나는 참 매정한 와이프이지 않을까. 겨우 신발을 신었는데 그날따라 아이까지 따라 나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한다.


"엄마, 나 엄마 일하는데 따라가 볼까?"

 

갑자기 명치가 찌릿해지며 무엇인지 모르지만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 잽싸게 '다음에...'라 대답하고 집을 나서버렸다. 아이가 자라면서 많이 적응이 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는 아빠, 엄마보다는 친구들과 유튜브, 비디오 게임이 훨씬 좋아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아무래도 엇나간 예상이었나 보다. 그날의 아이의 포옹이 참 오랜만이고 진심이라 출근하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


항상 마지막엔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 좋자고 그렇게 일하는 거니?"




새해의 첫날이라는 사실은 아랑곳없이 나는 오늘 또 출근을 했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나오며 남편과 아이에게 몇 시간 후에 보자며 가벼운 손인사를 하고는 곧장 주차장으로 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직장까지 가장 빠른 루트를 찾아보니 3가지 길이 모두 일 이분 차이로 비슷한 소요시간을 보여주기에 가장 익숙한 길을 선택하여 출발했다. 평범한 수요일에 비하면 새해 첫날의 수요일의 도로는 한산하기만 했다. 영혼과 초점이라고는 없는 눈빛으로 한참을 달리다 조금 신나는 노래를 듣고 싶어 묵혀있던 노래 리스트를 재생시켰다.


-그래 오늘이 1월 1일이라 이렇게 도로에 차가 없는 거구나.


갑자기 빠른 템포의 노래와 함께 기분이 같이 좋아지며 교통 체증 없이 한 번에 직장까지 달릴 수 있는 지금의 순간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예외 없던 정체구간이던 곳 마저 한 번에 통과하고 오늘은 신호마저 내편인 듯 지나가는 곳마다 파란불로 바뀌어주었다. 괜히 새해 첫날의 출근길이 빵빵 뚫려 올 한 해가 같이 숭숭 뚫려 나갈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마저 들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내가 가는 길이 길고 따분한 길이 될 수도 있고, 신나고 감사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원초적인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웃으면서 일터로 향했다. 그것도 새해의 첫날. 


고생 많이 했지? 그런데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귀국할 거라 했던 친구들의 예측과는 달리 우리는 10배의 가까운 시간을 잘 버티어 내고 있다. 중간중간 이민법이 여러 번 바뀌는 통에 심장이 쫄깃한 긴장감으로 지내기도 했고, 적지 않은 고비를 넘기고 또 넘기며 무사히 여기까지 왔음에 다행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길은 더 멀찌감치 남아있다. 우리는 이제 겨우 합법적 거주의 고비만을 넘겼을 뿐 이민자로서 가야 할 길은 사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이름으로 된 집도 필요로 하고, 주말에 쉴 수 있는 제대로 된 직장도 필요하다. 이젠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삼십 대 후반의 대열에 제대로 진입하여 느끼는 시간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가 않다. 지금까지 나와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는 무엇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인가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늦은 밤 남편에게 소주 한 잔과 한마디를 건네본다.


"우리 참 대단하지 않아? 우리 힘으로 여기까지 왔고, 돈도 이만큼 벌었고, 먹고 싶은 것도 고민 없이 먹으면서 살고 있잖아. 초반 오육 년이 제일 힘들다고 하던데 우리는 초반부터 아주 잘 달려온 것 같아. 이제는 더 잘될 일만 남았다고 보면 돼.


물론, 지금 이 속도로 계속 달리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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