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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물건들

10평 방구석에서 혼자인 나를 응원해준 사물

by 피터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들렀는데 의사들이 정확한 병명과 치료법을 진료 차트에 기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워낙 희귀하고 큰 병이라서가 아니라, 뭔가 밸런스가 무너져서 우리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들. 스트레스가 만든 병이 그런 부류다.

나도 한때 그런 것에 걸린 적이 있다. 내가 애를 써 드러낸 것들이 대우받지 못할 때 마음은 지나치게 힘들다.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것은 공정한 싸움이 아니다. 타인의 반칙에 의해 마음이 요동칠 때, 눈두덩이에 작은 두드러기 같은 게 하나둘 생겼다. 약간 가려우면서 걸리적거리더니, 며칠 사이 붉은 수포 형태를 띠며 눈두덩이 전체로 골고루 퍼졌다.

너무 가렵거나, 눈을 뜰 수 없거나. 그 정도는 아닌 조금의 불편을 가져온 몸의 이상이 신경쓰여 몇 군데 병원에 들렀다. 의사들로부터 같은 진단을 받았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성 이상".

원인불상에는 정확한 치료제가 없다. 비슷한 증상에 대한 처방이 나오고 약효가 있는 지 없는 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별 거 아닌 눈두덩이 수포는 2주 정도를 계속가다 점차 사라졌다. 원인불상에 대한 처방전 덕인지, 2주 동안 몸과 마음 스스로 밸런스를 찾으려는 면역 시스템이 작동해서인지. 눈두덩이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공격당한 마음까지 치료된 것은 아니다.


퇴근하는 길이 어둡다. 도어락 비번을 누르고 현관문을 연다. 내일 출근할 때는 현관등을 켜고 갈까 생각하다 그런 게 뭐 대수냐고 생각을 접는다. 10평 자취방의 불을 켰다. 어지러운 생각들 사이로 방구석 사이사이에 놓인 작은 물건들이 마음에 들어왔다. 오래전 산 주전자부터, 침대 위 강아지와 펭귄 인형, 가지치기를 해서 화분 하나를 더 만든 몬스테라와 요즘 나의 최애 간식인 250g 한 봉자 피쉬 스낵까지. 많은 물건들이 내가 좋아하고 나를 응원하는 물건들이었다.

내 삶에 닥친은 고민들에 지쳐가느라, 정작 오랫동안 나를 바라봐주고 지탱해준 것들을 멀리했다. 다시, 시작하려하니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작은 방구석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10평 방구석은 위축된 몸과 마음만큼 작고 외로운 혼자의 공간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그렇게 공간을 차지하던 물건들이 말을 걸었다.

돌아보면, 나는 아주 행복할 때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 자체가 즐거워 기록을 남길 생각을 못했다. 내가 지닌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거나,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늘 불안하고 위축된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오는 '고비'가 지금을 잘 견뎌내서 더 소중한 인생을 살라는 사인같은 것이라면 그 증거를 찾고 싶었다.

이 책을 쓰면서 방구석의 물건들과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미친 소리 같지만, 그때는 그랬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들은 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내 옆에, 내 작은 공간에, 내 손이 닿는 그 곳에 계속 머물고 있다. 우리가 지쳐서 일상의 소중한 것들과 함께하지 못할 뿐이다. 작은 공간을 뒤적이며, 나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부정이 아닌, 내가 챙겨둔 사물을 통해 나만의 긍정을 알아챘다. 그 안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나만 아는 것, 나의 이야기가 듬뿍 담겨있었다. 귀하거나 비싸거나, 특별하지 않은 물건들이 많다. 내 삶의 누추한 공간에 이토록 나를 알아주는 물건들이 많다니. 혼자 있던 10평 방구석에서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내가 누군가를 응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지금부터 내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말없이 들려준 이야기를 참 아끼기로 했다. 방구석 사물이 들려준 눈물나게 무심하면서 다정한 위로였다.

당신의 작은 방 안에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는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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