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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제주 Oct 22. 2023

[13]. 수술 전 마지막 병원

이 편지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38주 1일

 어제는 평안이를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병원을 가는 날이었단다. 평소에는 퇴근하고 오후 늦게 가다가 아침 첫 진료를 받으러 가는데 출근시간인 데다가 교통사고 여파로 길이 꽤나 막혔어. 거기다가 평일 오전 진료는 처음인데 진료를 받으려는 산모들이 엄청 많았어


 의사 선생님과 초음파를 보는데 평안이는 여전히 머리가 위로 가 있었고, 몸무게 2.8킬로에 건강한 상태였단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에 대한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시고 불안해할 엄마와 아빠를 안심시켜 주셨어. 그리고 평안이가 잘 있는지 마지막 태동 검사와 함께 엄마는 독감예방접종도 받고, 엄마와 아빠의 코로나-19 검사 의뢰서도 받아왔단다.


 이제는 정말 평안이를 만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어. 평안이가 엄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컸다는 사실도, 지금도 계속 발차기를 해가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단다. 

지난 열 달 동안 점점 커져가는 엄마배에 매일 튼살크림을 발라주고(엄마의 임신기간 동안 아빠의 최고의 업적은 매일밤 엄마배에 튼살크림을 발라 매끈한 배를 만든 것이란다), 평안이에게 책도 읽어주고 그러면서 아빠의 목소리에 반응해서 뱃속에서 움직이는 태동을 느끼겠다고 엄마의 아직은 작은 동산 같던 배에 귀를 대보고 신기해하던 날들은 추억의 저 너머에 묻어두고, 세상에 나온 사랑스러운 평안이를 매일 재우고 책을 읽어주고 그러면서 새근새근 잠들어가는 모습을 신기해하는 아빠로 바뀌어 가게 될 거야


 엄마와 아빠는 평안이가 세상에 나와서 불편하지 않도록 많은 준비를 해왔지만, 세상의 흔한 표현으로 부모가 처음이라 많이 부족할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한번 잘 지내보자


 이런 편지는 출산 전날 쓰는 게 맞겠지만, 그때는 평안이를 맞으러 갈 준비를 하느라 정신도 없고 마음이 심란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리 편지를 쓴단다.


이제 진짜 곧 만나자 평안아


평안이를 만나기 전 마지막 주말 아침에

- 아빠가




38주 2일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안인의 비유가 나온단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해서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도 피해 갔지만 이방인으로 취급받고 멸시받던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구했다는 이야기지. 세상사람들은 물론이고 이 성경구절을 잘 알고 있는 신자들도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세상이란다


 오늘 엄마와 예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가니 이미 타려는 사람들이 꽤 많이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 엘리베이터는 나이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설치되었으니 엄마 같은 만삭의 임산부가 우선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은 없어 보였어. 뭐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 아무 생각이 없었단다.


 문제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르 앞만 보고 탑승했다는 거지. 분명히 배가 한참 나온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말이지. 사람들이 타고나니 엄마가 탈 자리는 넉넉해 보이지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으로 작은 여성분이 타자마자 만원 경고등이 켜졌어.  


 그 여성분이 어쩔 수 없이 내리고 나서 문이 닫히기까지 아빠가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일부러 쳐다봤는데, 일부는 민망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일부는 눈을 피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만삭의 임산부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내려가버렸단다. 엄마와 아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걸어서 내려왔단다.


 평안아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게 맞다고 배워왔고, 그렇게 하라고 또 평안이에게 가르쳐야 하겠지만 세상을 보면 그게 무조건 맞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불편하고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리를 양보하고 나면 기다렸다가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걸어와야 하니까.


 아빠가 이런 당연한 걸 고민할 만큼 사람들이 여유가 없는 사회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일요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예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고 회개하고 기도드리는 사람들이라면 비정한 제사장과 레위인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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