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적 없는 곳을 가고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때로는 상당한 에너지와 모험심이 필요하다. 물론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게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일 수도 있지만 처음 가는 여행지에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면 좀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이드와 함께 검증된 유명 관광지를 골라서 가고 미리 예약된 음식점에 가서 대기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거다. 그리고 패키지 여행을 가면 가이드가 각각의 관광지에 대한 역사나 사회적인 이슈, 쇼핑 팁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미리 공부나 검색을 하지 않아도 된다. 수동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패키지 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는 확실하다.
반면 능동적인 성향의 우리 가족은 패키지 여행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준비할 때 어떤 관광지를 어느 동선으로 다닐지 또 식사는 어디서 할지 맛집 검색을 하는 등 한국에서 80% 이상 꼼꼼히 준비해서 가는 편이다.
보통 그렇게 준비를 해서 가도 실전에서는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이번 독일 여행 구간은 거의 준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만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우리 가족을 위한 안전한 로컬 가이드가 있기 때문이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처럼 완벽한 가이드는 아니지만 처음 가는 도시에 지인이 살고 있다는 건 반가움은 기본이고 부루마블 게임을 하다가 황금열쇠 카드를 획득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일반 관광객들이 모르는 찐 로컬 맛집을 가거나 알려지지 않은 핫플을 알게 되고 굿딜의 쇼핑을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본격적인 여행의 첫날. 우리가 향한 곳은 빌링엔슈베닝엔의 올드타운.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습하지 않은 여름의 쾌적한 공기가 좋아 걷기로 했다. 집 뒤편 놀이터를 지나 길 따라 산책로가 있는데 자전거 타는 시민이나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와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 지구 반대편이라 특별해 보이지만 다를 것 없는 편안한 일상이다.
30분 정도 걷다 보니 큰 도로 건너편에 오래된 시계탑이 있는 성벽이 보인다. 아주 오래전엔 저 아치형의 성문으로 마차가 다녔을 법하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펼쳐지는 알록달록 파스텔 색상의 예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 놀이공원에 들어온 기분이다. 하늘은 파랗고 건물들은 예쁜 컬러의 옷을 입고 창문마다 늘어뜨린 꽃들에 아이들도 이 도시의 매력에 푹 빠진 느낌이다. 바닥은 울퉁불퉁 옛날 돌바닥이라 자전거 타면 엉덩이가 깨나 아프겠다.
늘어선 상점들의 쇼윈도를 구경하며 울퉁불퉁 돌바닥을 따라 걷다가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사인을 보더니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아이스크림 가게가 많다. 거의 모든 카페와 식당은 외부 테라스 테이블이 함께 있는데 우리도 밖에 앉기로 했다. 독일로 이주한 지 6개월뿐이 되지 않은 꼬마 숙녀들이지만 한국에서 온 환브로를 위해 독일어 메뉴도 설명해 주고 유창하게 주문도 해준다. 환브로는 윤서와 예윤이의 독일어가 신기하면서도 웃긴가 보다. 주문을 성공적으로 한 예윤이의 표정이 자신만만하다. 아이들이 주문한 꼬불꼬불 스파게티 모양의 아이스크림이 나왔는데 정말 비주얼이 그럴싸하다. 나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했지만, 알고 있었다. 유럽 카페엔 아이스가 없다는 걸,, 독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유럽에선 아이스커피를 시켜도 얼음이 없다. 심지어 아이스크림 커피를 준다. (달달한 냉기 있는 카페라테) 유럽에서의 아이스커피는 coffee+ice cream 인가 보다. 그래서 iced coffee please~ 하면 그냥 차가운 커피를 준다. 민경 씨도 독일에 와서 가장 그리운 것 중 하나가 한국 카페의 아아 (iced Americano)라고 했다. 더운 여름날에 미지근한 커피라니.... 마치 엄청 더운 날 살얼음 없는 미지근한 물냉면을 마주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우린 미지근한 라테 한 잔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테라스의 햇살과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긴 했다.
이제 달달한 간식도 먹었으니 아이들과 약속했던 놀이터가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넓은 공간의 Kinder Spiel Platz (어린이 놀이터)에 정말 다양한 놀이 기구들이 있었다. 놀이 기구들도 독창적인 조형물을 이용한 듯 디자인이 특이했는데 특별히 눈에 띈 건 바닥이었다. 잔디와 흙이 부분부분 섞여 있고 놀이 기구 아래엔 우드 칩 (wood chip)이 소복이 깔려 있었다. 놀다가 떨어지거나 넘어져도 충격을 완화해 줄 수 있어 보였는데 뭔가 정형화되어 있는 한국 아파트 단지 내 우레탄 바닥의 놀이터를 생각하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우리는 민경 씨가 집에서 미리 준비해 온 Lunch box를 세팅했다. 독일 사람들은 보통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많이 먹는데, 가격에 비해 내용물이 심플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달달한 소스도 없이 정말 드라이하기 때문에 보통 외출할 땐 도시락을 챙겨 나온다고 한다.
오전에 와이너리에 들려 구매한 미니 스파클링 와인도 함께 하니 추억에 잠긴다. 아이들 어릴 때 하교 후엔 종종 바닷가로 갔다. 아이들이 모래놀이하는 동안 엄마들은 캔 맥주 한 모금씩 마시면서 서로의 육아 스트레스를 위로하고 서로의 일상을 소소하게 나누곤 했었다. 물론, 과음 없는 목만 축이기였지만 그때도 오늘도 우리에겐 나름의 고된 업무 뒤 달콤한, 행복과 위안을 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