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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Dec 07. 2021

볼테르와 입털기 이론

들리는 게 다는 아니라서


몰리에르가 가장 좋아하는 석고상이었다면 볼테르는 그리는 맛이 나는 석고상이었다. 굴곡진 볼따구가 서걱서걱 그리는 맛이 그만이었다. 볼테르가 내 인생에 중요한 팁을 던져줄 줄 알았다면, 그리는 맛만 느낄 게 아니라 공부 좀 해둘 걸 그랬다. 볼테르가 그랬다. "사람이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라고. 그렇다고 내가 할 말이 없어서 욕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응? 응..;;;



욕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괴롭다. 듣고 싶은 이야기로도 모자를 시간에 왜 욕을 할까 궁금했다. 할 말이 없어서 욕을 하는 거랬다. 말은 하고 싶은데 막상 할 말이 없으니 욕부터 하는 거랬다. 욕 하는 걸 들으면 원치도 않은 제사떡을 뭉텅이로 받아 든 기분이 든다. 그럴 때마다 볼테르의 말을 곱씹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안이 될까 싶어서. 아,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구나.. 뭐라도 주고픈 마음은 넘치는데 내어줄 수 있는 최선이 떡이라서 주는 거구나.. 관심 표현이구나..



욕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일단 들어주기로 했다.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냥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나랑 욕하면서 친해지자는 뜻이구나 생각하며 대충 흘린다. 무어라도 같이 하고는 싶은데 할 말이 없어서 그러는구나 생각한다.



어머님은 종종 욕을 하신다. 일상 공유의 텀이 길어질수록 공통의 주제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만난 지 1주일 이상 넘어가면 욕지수가 올라간다. 밀려 있던 입털기 탓에 물꼬 틀기가 어려우실 때면 욕을 바가지로 들어야 한다. 내 욕 말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욕을 말이다. 첫 대상은 늘 아버님이다. 간밤에 술을 얼마나 잡수셨는지 누구를 만나, 어디를 가고, 다시 누구를 불러내 어디서 무얼 잡숫고, 직립보행을 포기하고 네발기기로 퇴행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역진화론까지 끝이 없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하소연을 듣고 또 듣는다. 아버님 끼척이 들리기라도 할라치면 흠칫 놀라며 소곤소곤 치직치직 밥솥 증기 소리 내듯 욕을 하신다. 마무리 추임새는 '에효오오'다.



아버님 욕이 바닥이 나면, 좀 전까지 옆에서 귤을 따던 고모님 욕을 하신다. 나랑 할 말이 없다는 걸 욕으로 대신하는 어머님을 뵈니 그저 송구스럽다. 죄송합니다, 말이 막 나오려고 한다. 이야깃거리가 없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욕을 바가지로 들으면 숙연해지는 마음은 어머님의 입털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입털기가 원활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추임새를 넣는다. 어서 빨리 털고 다른 이야기 하자는 뜻으로 부지런히 넣어본다. 가장 많이 하는 건, 에에에에에? 그다음으론, 아이고오~ 다. 한바탕 웃어드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진짜 끝이 나면 어머님이 수고가 많으십니다로 맺어드린다. 그러고 나야 어머님의 말투와 억양과 주제가 모두 순화가 된다. 어머님 함자가 '순'자, '화'자인 이유는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욕으로 돈독해진 고부 사이는 이제 일주일간의 유효기간이 찍힌 <맘 편히 지내거라 이용권>을 발급받는다. 이제 난 일주일간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자유이용권을 가지고 돌아서는 거다.



돌아서며 들리는 건 내 욕이다. 내 욕만으로 아버님과 돈독한 관계 유지가 가능하다면 흔쾌히 욕지 인형이 되어드리리. 할 말이 점점 많아져야 어머님의 욕도 줄어들 텐데, 자주 시간을 내어 함께 해드리지 못하는 내가 순간만은 죄송스럽다. 하여 어머님의 정신 건강을 위한 입담은 어쩌면 필수템일지도 모르겠다. 귤밭에서 일을 하는 동료가 아닌 가족으로서 기꺼이 한풀이 대상이 되어드리리 생각한다. 남욕 안 하는 게 어딘가 싶다.



고모부님이 돌아가시고 욕도 맘 편히 할 수 없게 된 고모님이 염려가 된다. 마음고생이 많은 삶을 어디든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귀포 모정신의학과에 간 적이 있다. 진료 병증을 써놓는 벽에 눈이 가는 단어가 있었다. '화병'. 제주에는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이 많아 진료 목록에 '화병'을 따로 넣었다고 했다. 노인 일자리 봉사 중에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물꼬 막힌 물줄기가 속에서 얼마나 갑갑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속에서 끓는 마음은 몸으로 나타난다던데, 체한듯 파리한 얼굴로 귤 따다 퇴근하신 고모님이 염려되는 건 욕으로 다져진 어머님의 입담 덕이다.



욕으로 둔갑한 하소연은 누군가에겐 해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식 일이 궁금함을 공상으로 때우다 하소연이라는 푸념을 만들어내는 일을 나무랄 수가 없다. 푸념이 생겨나기 전에 우리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일은 어머님의 정신 건강을 위한 일이기도 하구나, 깨닫는다. 욕이라고 무조건 귀부터 막고 볼 일은 아니다. 어느 집이건 가정을 위한 꾸뻬 씨는 필요하니까. 오는주말에도 어머님 전용 꾸뻬 씨가 되어드려야 할까 보다.



'어머님 울화는 제가 책임져 드릴게요. 건강하세요.'라고 쓰고 나는 남편에게로 가겠다. 그러고도 남은 내 안의 말들은 나에게 쓰기로 한다. 나와 친한 팔순의 할머니가 되기 위해 지금부터 부지런히 쓰겠다. 실컷 쓰며 나와 더 친해지겠다.


우리 모두의 정신 건강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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