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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Sep 02. 2021

지워버린 의미를 찾아서

마음을 열어야 보이는 것들


물건을 정리하면 마음까지 정리되는 기분이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마음 하나만 정리하려던 것이 화장대 한 구석을 점령하던 금은보화?를 들고 보석상 문 앞에 섰다. 한쪽만 남은 귀걸이, 중간이 끊어진 반지, 고리가 틀어진 목걸이 등 언젠간 다시 할 거라는 미련으로 어질러 놓은 액세서리들을 한데 모았다.     



집 정리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려고 물건을 줄이다 보니, 어느 날엔 보석상 앞에 서게 되더라는 것. 몇 번을 다시 봐도 다신 안 하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고 내밀었다. 아니, 궁상맞아 보일까 봐 최대한 시크한 척했다. 얼마나 쳐줄까. 상관은 않더라도 이왕이면 애들 반찬값 정도는 나와주면 좋겠다는 기대감은 있었다. 웬걸, 두 장 가까이 값을 쳐주신다. 하! 금은보화를 싸들고 가서야 금테크의 신비로움을 몸소 체험하는 신기하고 손해 보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목돈의 신비로움은 마음까지 풍요로와져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까지 들었다. ‘돈으로 자신감도 사는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들어 서글펐다. 틈을 비집고 서운한 마음도 밀려 왔다. 안 되겠다 싶어 그날의 기억을 순식간에 지우기로 했다. 금은보화와 금테크의 신비로움과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마음들을 함께.     



얼마 후, 유튜버 밀라논나의 영상을 보게 됐다. 소장 액세서리를 소개하는 영상이었다. 작은 액세서리도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정성스레 소개하는 모습이 소중하고 단정해 보였다. 할머니가 얘기하는 말은 왠지 곧이 들어야 할 것 같다. “인생은 그냥 사는 거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의미 없는 인생에 이렇게 의미 부여하면서 사는 거지.” 이 대목에 얼마 전 내다 판 나의 금은보화 생각이 나는 건 뭔가.    


 

나에게도 분명 의미 있는 물건들이 있었을 텐테 모두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가만가만 생각하다 떠올라버린 물건이 하필, 프러포즈 목걸이인 건 이유가 있을 터. 내다 판 금은보화 속에 의미를 지워버린 목걸이가 눈에 아른 거렸다. ‘이건 언제 하고 다녔던 목걸이지?’ 라며 쓱 쓸어 버린 나의 목걸이. 하! 별 거 없는 인생에 작은 의미라도 부여하며 살라는데, 난 부여했던 의미마저 지워버리며 살았구나. 이래 가지고 어떤 할머니가 될런지 아득해졌다.     



추억하는 일을 즐기진 않는다. 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갈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 과거를 돌보는 일보다 중요했다. 나도 모르게 지워버린 인생의 의미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하기도 전에 치워버린 의미들을 되찾고 싶었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린 목걸이가 물에라도 떠밀려 돌아오진 않을까, 아쉬워하기 전에 지워버린 인생의 의미들을 마음으로라도 되찾아야 할 것 같았다.

잃어버린 목걸이가 어떻게 나에게로 왔는지 기억해내는 일로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남편과는 6년을 사귀고 결혼했다. 사귄 지 6년이 다 되어가던 겨울, 지금의 남편인 그때의 남자 친구가 1월 1일의 뜨는 해를 보러 가자했다. 지금은 '가끔씩’ 낭만적이지만 그때는 ‘대체로’ 낭만적이던 남자 친구의 말에 ‘퓌식’ 정도의 웃음으로 화답했다.     



여행은 짐이 짐이 되면 안 된다 생각한다. 일단 몸이 떠나고 필요한 게 생기면 그곳에서 해결한다. 연애하는 동안 강원도를 심심찮게 다녔던 지라, 가볍게 떠났다. 몸도 마음도 어찌나 가벼웠던지, 한겨울의 강원도를 미니스커트와 함께 했다. 수줍게 번쩍이는 은색 양모 미니원피스와 상식 선에서 당연했던 검은색 스타킹으로 두 다리를 쫀쫀하게 감싸고 7센티 구두를 또각거리며 경포대 해수욕장을 걸었다. 부츠라도 신었으면 좋으련만, 동네 찻집 가듯 했다. 어디로 떠나기만 해도 좋을 시절, 설레는 마음만 가득 싣고 남자 친구와 10시간이 걸리는 동해로 새해 일출을 보러 갔다. 어찌나 낭만스러웠던지, 의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없는 날이었다.      



1월 1일의 경포대는 추웠다. 너무너무너무 추웠다. 추워서 짜증이 났다. 내가 덜 입은 생각은 못하고, 둘러멘 담요를 나무랐다. 남자 친구를 나무랐다. 뜨는 해를 보자고 새벽 4시부터 걸었다. 모래사장까지 가는 길도 어찌나 멀던지 일출 인파로 어둑한 길을 앞서 걷는 이의 뒤통수를 보며 걸었다. 추웠다. 너무너무너무 추웠다. 걸어도 걸어도 춥기만 했다.     



드디어 도착한 백사장 위에서 ‘인파’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구나! 깨달았다. 160센티의 내가 일출을 보려면 20센티의 힐은 신고 와야 가능하단 걸 알았다. 어디로 볼까, 요리로 조리로 허리를 꺾으며 있는 목 없는 목 쭉쭉 뻗었다. 해가 뜰 거라는 수평선은 내 시야로는 가닿지 못할 곳이었다. 추웠다. 너무너무 추웠다.     



추우면 돌아갈까를 묻는 남자 친구는 돌아가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줌이 마려운가 싶었다. 이제 2분, 이제 1분 남았다며 카운트다운하는 사람들을 보며, 발끝에서 얼음덩어리가 올라오는 안나처럼 섰다. 드디어 해를 보려는가. 머리끝까지 얼음조각들이 올라올 즈음, 두둥실 무언가 떠올랐다. 오색 벌룬. 하! 파란빛은커녕 하늘이 누렇다. 하늘색이 왜 이런지 사태 파악을 하기도 전에 주변이 밝아 왔다. 해가 이미 떴다는 건, 돌아서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알았다. 추웠다.     



난 추위에 떨었지만, 옆에서 다른 이유로 떠는 이가 있다는 걸 보지 못했다. 돌아가는 길은 더 추웠다. 혹한기 훈련도 이만할까. 담요로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찬바람이 들어올까 움직일 때마다 생성되는 바람구멍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총총총 걸었다. 모래에 처박히는 구두가 얄미웠다. 살기 위해 걸었다. 주차장까지 돌아오니 재빠르게 차에 시동을 걸어줬다. 사발면이라도 사오겠다며 남자 친구는 떠났고 쉽게 데워지지 않는 차를 미워하며 눈물지었다. 추웠다.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감각도 모르겠는 사발면을 두 손으로 들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때 아닌 춥고 배고픔을 겪으며 궁상스럽게도 들이켰다. 살 것 같다는 얼굴을 들고 남자 친구를 바라봤다. 눈물 콧물의 웃음이 났다.     

추위와 싸우느라 그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구나! 얼굴이 녹은 내 얼굴을 확인한 남자 친구는 불룩한 바지 주머니에서 정처 없이 맴도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을까. 국물 든 사발면을 무릎에 둔 채, 온갖 쑥스러움과 미안함과 사랑스러움을 얼굴에 가득 담아 체념한 듯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결혼해 줘서 고맙다, 했다. 눈물이 났다. 추웠고, 힘들었고, 배고팠지만, 행복했다.



나에게로 오는 좋은 마음은 눈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야만 보인다. 지나고 나서 들었는데, 떠나는 순간부터 목걸이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해가 잘 떠 주길, 용기가 나길, 타이밍이 좋길. 끝없이 빌며 떨었다고 한다.     



추위에 떨며 걷는 나를 보며 가졌을 마음과, 야속한 해를 기다릴 때의 마음과, 줄 수 있는 최선이 사발면이었을 때의 마음이 2008년 1월 1일을 떠나 2021년인 지금에서야 또렸해졌다. 누구보다 날 아껴주던 그의 마음이 이토록 의미가 있을진대, 난 무얼 더 바라 금은방에다 내 인생의 의미들을 다 팔아 버렸나 싶다.     



아픈 기억들에 떠밀려 소중한 추억까지 지워버린 지난 시절에서 어서 의미들을 건져내야 할 시간이다. 떠나보낸 프러포즈 목걸이를 이실 짓고 하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의리로라도 잘 살아보자는 말에 남편은 ‘사랑으로 살아야지’라고 화답한다. 결혼반지는 안 팔았으니 다행이지 않냐며 웃어 보이는 그 시절의 남자 친구가 여전히 내 옆에 있음을 기억하며 소중하게 살아야겠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별 것 없는 인생을 아끼고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일임을 잊지 않겠다.     



쓰고 보니, 양말 한 켤레도 무얼 사양할지 결정이 쉽지 않은 남자 친구가 목걸이를 고르며 흘렸을 진땀이 또록또록 귀엽다. 한 땀 한 땀 의미를 살리며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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