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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Nov 19. 2021

어머님은 귤 가져다 먹으라 하셨어

남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


어머님과 나에게는 큰 차이점이 있다. 어머님은 남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받으려시는 반면, 난 어떻게든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보려는 쪽이다. 웬만하면 그냥 혼자 하시지, 굳이 사람을 불러서 도움을 받으려 하시는 어머님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이라고 이해가 다 되는 건 물론 아니다.



일손 돕기를 그만 하기로 한 올해 가을, 지인에게 보낼 귤을 두어 시간 딴 거 외에는 귤밭에 가보지 못했다. 가보지 ‘않은’ 건 아니고 이러이러한 일들로 정말 가보질 ‘못’했다. 놉이라도 빌어 따시라고 나름의 푼돈을 드리긴 하였으나, 한번 끊은 발길은 쉬 찾아지지가 않았다. 귤 따기 싫어서 안 간 건 아니라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기엔, 미용실 갈 시간은 있었던 걸 동네방네 소문을 내버렸으니, 어머님이 혹여 아시는 날엔 섭섭해서 당장 귤 따러 오지 못할까! 역정을 내실 것만 같다.



현세의 시그널을 접신하듯 어머님의 전화가 왔다. 점심 먹으러 오라셨다. 근처 밭에서 귤을 따는 중에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니 같이 먹자는 전화였다. 밥도 같이 먹고, 아이들 먹을 귤도 좀 가져가라 하셨다. 어머님 눈칫밥 먹은 지 10년, 툭 치면 눈이 번쩍이다. 말씀 뒤에 숨은 뜻이 같이 들린다. '외롭고 심심하니까 너 와서 같이 밥 먹고, 귤 좀 따자'라는 속 마음이 같이 들린다. 대통령도 불러다 일 시키실 분이 우리 어머님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국회의원도 불러다 일 시키신 분이 우리 어머님이다.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최대한으로 받은 뒤, 후에 대처하겠노라는 어머님의 처세술은 앞뒤전후가 비슷하다. 도움을 받은 만큼 당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을 다 주신다. 이를테면, 손수 키운 파를 주시거나, 배추를 가져다주시거나, 고구마를 주시거나, 호박을 주시거나, 마늘 한 포대를 주시거나, 술빵 두어 개, 혹은 김치 두어 통 정도를 가져다주는 식이다. 나 같으면, 이깟 대파...라고 생각할만한 것들을 쪼개고 쪼개서 나눠 주신다. 현대식 기브앤테이크로 점철된 이해관계로는 절대 설명할 수가 없다. 사람이 주고받는 건 돈으로 주고받는 실리만이 아니라, 마음임을 오랜 시간에 걸쳐 알려주셨다. 오고 가는 기름값이 더 들 것만 같은 요즘에도 굳이 부추 한 줌 주려시려고 오고 가신다.



점심 먹자는 회유? 에 당연 빠져들지 않았다. 나름 일하는 시간을 사수했다.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가며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내 일을 해서 푼돈이라도 번다는 자부심은 올해 내가 누린 최고로 잘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귤밭에 나갈 수가 없다.



마음 먹기를 이렇게나 단단히 해두었음에도 다시 짬을 내어 귤밭에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파 한쪽이라도 나눠주셨던 어머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점심 먹자며 회유하신 어머님의 전화를 끝내 저버리지 못하고, 귤밭으로 달렸다.



공기마저 달라진 11월의 귤밭은 영롱하게 익은 귤로 가득했다. 귤 천지 귤 숲이 됐다. 예년보다 두 배 이상 많이 달렸다. 보기 좋은 귤밭을 흐뭇한 표정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이 귤을 모두 한 알 한 알 손으로 따야 하는 고충을 알기 때문이다. 귤 하나에 들어갈 가위질 하나가 함께 보인다. 어머님은 사람 부리는 고수. 내가 이 마음 가질 거라고 일부러 귤밭으로 부르시는, 남을 부리는 데 도가 트신 달인이다. 남에게 일을 시키려면 마음속부터 두드려야 하는 법. 대다나다, 우리 어머님.



귤만 덜렁 들고 그냥 돌아갈 수가 없다. 장갑을 끼고, 가위를 들었다. 노련한 건 손이 아니라 귀심이 된 지 오랜데, 어머님 이야기를 한창 듣고 가야지 싶다. 그동안 쏟아내지 못한 이야기가 어찌나 많으신지, 창고에서 막걸리 한 잔 잡수시는 아버님 뒷담화부터 시작하셨다. 귤 한 바구니에 쓸어 담지 못한 어머님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다 쏟아내신 후에는 잘 익은 귤들을 바라보며 아부지가 농사 하나는 잘 짓지 않았느냐 신다.



한 시간 동안 네 바구니를 땄다. 한 바구니의 귤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내 마음이 당신이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마음은 당신이 필요하다고 사랑한다 돌려하는 말이다. 당신의 도움으로 더 잘 살아갈 수 있으니 어서 와서 나 좀 도와다오,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전화가 사랑 표현으로 들리기까지 오래 걸렸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귤 따는 이 철에는 어디 여행도 못 가지 싶다. 이 마음이 공동체 의식이 시발점이었더라.



어머님이 남에게 부탁을 쉬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좀 힘이 드니 이번에 날 좀 도와주면 다음번 당신이 힘든 일이 생길 때 함께 도와주겠소, 라는 암묵적 협약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이 협약은 결코 애정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머니 세대는 이 협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를 지나왔고, 우리와는 다른 삶을 지났다. 내가 힘들면 고립되어도 좋다 말하는 요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머님의 공동체적 삶은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어 버렸는데, 세대 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공동체 의식이란 소중하기만 하다. 사람 사이에서 살 수밖에 없는 미개한 존재임을 스스로 이해하게 되면 어머님의 삶의 방식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가 된다.








그럼에도 주말에는 밭에 나와 귤 바구니 좀 날으라는 어머님의 마음을 사랑으로만 듣기엔 여전히 쉽지 않다.

내일은 이미 귤밭에 나가 있을 것만 같은 내 마음도 여전히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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