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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Aug 26. 2021

소셜 네트워크는 우리를 소통하게 하는가 멀어지게 하는가

문자 만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나는 문자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 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는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문자를 잘 보지 못한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지만

사실 조금은 복잡하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심리 요인이 있다.

 

단순히 말하면, 기다리는 문자가 제 때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문자는 반역적이다. 그래. 딱 이 표현이 맞다. 반역이고 역적이다.

카톡의 일자가 사라졌는지 아닌지에 따라 생각의 사념은 춤을 추고 가지를 뻗는다.

내가 기다릴 때 문자는 오지 않고 내가 기다리지 않으면 뜬금없이 나타난다.

마치 시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는 시간이 가지 않고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새

훌쩍 시간이 지나가버리는 경우와 같다.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시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은 심리적인 불안감을 초래한다.

 

스키너의 심리실험은 조작적 조건형성으로 유명한 이론인데

파블로프의 실험과 같은 조건 형성과는 조금 상이하다.

종소리를 들은 개가 먹이를 반사적으로 떠올리고 침을 흘리는 것이 고전적인 이론이라면

스키너는 자극이 아닌 행동의 결과, 즉 보상에 초점을 두고 조건을 설계한다.

실험상자 안의 쥐는 지렛대와 먹이가 나오는 방식에 조건화 된다.

지렛대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오는 경우,

쥐는 먹고 싶을 때 지렛대를 누른다.

반대의 경우, 즉 먹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쥐는 더이상 지렛대를 누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다음에 중요한 조작적 조건이 나오는데

지렛대를 눌렀는데 어떤 때는 먹이가 나오고 어떤 때는 먹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쥐는 그 때부터 미치게 된다. 강박관념이 형성되어 시도 도 없이 계속 지렛대를 누르게 된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불안감에 지렛대 누르기를 멈출 수가 없다.

기다리는 것이 언제 나오고 언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문자를 주고 받는 방식이 이와 같이 조작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즉각적인 사회관계망 서비스 SNS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연결 상태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

잠시라도 핸드폰이 곁에 없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고 와이파이 신호가 없는 곳은 기피한다.

unconnected..마치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아무도 없는 낙오자의 섬에 나홀로 계류된 것 처럼 인식한다.

과연 인터넷 연결망은 우리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일까?

소셜 네트워크 때문에 우리는 더욱 소셜라이징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 만나도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의 핸드폰만 들여다 보는 것이 과연 소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오프라인 만남의 일대일 소통을 아예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 라며 전화를 끊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표정을 읽으면서 손동작을 섞어서 언어 외적인 의미까지 소통했던 대화는 이제 역사의 유물로 져버리려 하는가?

 

지금 세계는 또 한 번의 급속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을 파괴했고 서로의 접촉을 유예했다.

줌이라는 편리한 도구는 모든 오프라인 모임을 대체했다.

회식도 온라인으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 마시며 각자 즐긴다.

줌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면 느끼겠지만 온라인을 통한 소통은 집중을 방해하며

긴밀한 내적 대화를 나누기 어럽고 그로 인한 감정의 공감대 또한 형성되기 어렵다.

실제 전문가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핸드폰과 온라인을 통해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는 경우,

뇌의 모양마저 변하여 측두엽이 얇아진다고 한다.

측두엽은 사람사이의 감정교류에 작용하는 뇌의 부위이다.

용불용설처럼 쓰지 않는 부위는 점점 퇴화하여 더이상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교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 미래 처럼, her 에서 보았던 내용처럼 통제할 수 없는 인간과의 소통 보다는 안전하면서도 개별적인 OS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코로나 상황이 끝나도 사람들은 여전히 온라인을 통한 만남을 더욱 선호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미 세계는 버추얼 이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속도를 늦출 수 없을 것이다.

AR,VR 이란 기술적 용어에서 넘어가 이제 메타버스란 가상세계를 언론에서 앞다투어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희망없는 냉정하고도 우울한 현실 보다는 판타지 일지라도 우리는 낙관의 세계를 이미지로 느끼며 실을 안위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얼마 전 친구와 전화로 약속을 했다.

약속 당일 외출할 준비를 하고 나가려는데 문자가 온다.

연락이 없어서 다른 일정을 잡았다고 한다.

내게 있어서 약속이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이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약속이란 언제든지 변경할 수 있기에 문자로 확인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하는 듯 했다.

마치 구두 약속은 법적 효력이 없고 문서화되어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약속이란 서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믿음은 이제 구태의연한 발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변화무쌍한 현실의 속도 앞에 언제든지 변경가능한 것이 약속임을 나는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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