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56
오늘부터 이어도공화국 일기를 쓴다
오후 출근길에
감귤나무 한 그루 옮겨 심었다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에는
땅을 파면 어디라도 뚱딴지가 나온다
땅 속에서 꿀꿀꿀
아기돼지들의 잠꼬대 소리가 들린다
오늘부터
출근하면 먼저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일을 시작하라고 한다
우리 같은 팀원은 아니지만
확진자 한 명이 생겨서 그렇다고 한다
간이 검사를 하니
우리 팀원들은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 한 번 가지 못했는데
군에 간 아들이 운동화를 사서 보냈다
3월 17일이면 제대하여 만날 수 있으리라
백 년 된 나무는
백 년을 산 밑둥도 있고
이제 막 태어나
하늘을 기어다니는
잔 가지와 새싹이
함께 살아간다
나 또한 50년 넘게 살아가는
심장도 있고
이제 막 자라나는
머리카락과 손톱도 있고
어제 생겨난 세포도 있고
오늘 지금 막
만들어지고 있는 세포도 있다
50년 넘게 함께 살아온 심장이나
이제 막 생겨나고 있는 세포도
모두가 다 나인 것이 분명하다
어제의 나도 나고
작년의 나도 나고
내일의 나도 나고
내년의 나도 나일 것이다
오른쪽 어깨가 아파서 정형외과에 다닌다
몇 년 전에 지렛대로 큰 돌을 옮기다가
삐끗하여 갑자기 허공을 들어올린 적이 있다
그때 아마 어깨 회전근이 파열되지 않았나
의심을 하였다 그리고 가끔 치료를 받았으나
중간에 포기를 하곤 하였다
최근에 가까운 곳에 정형외과가 있어서
몇 번 가서 어깨에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전기치료와 단파치료와 찜질을 받았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어깨에 맞은 주사 때문인지 몰라도 자꾸만
오히려 어깨가 더 아프고 힘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의사가 3~4일에 한 번은 오라고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도 가끔 갔더니
그러면 어깨가 다시 뭉쳐서 효과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전에 침대에서
어깨 운동을 하라고 했는데
그 말도 무시하고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비로소 깨달았다
무심히 기지개를 켜는데 오른쪽 어깨가 너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아, 하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서 어깨운동을 하였다
처음에는 통증 때문에 어깨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통증을 참고 어깨운동을 하였다
오른쪽 팔을 왼손으로 잡고 천천히 위로 올렸다
오른쪽 팔을 올려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랬더니 천천히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뭉친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었구나
치료의 핵심은 약물이나 주사나 물리치료가 아니라
바로 이 운동치료 였구나
아,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구나
그리고 건성으로 들었던 주사에 대하여도 생각해보았다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언뜻
<인대강화주사>라고 들은 것 같아서 검색해보았다
3월 2일 병원에 가서 자세하게 들어보아야겠다
https://blog.naver.com/jinee0701/222429270544
프롤로 치료(Prolotherapy)란 증식(Prolferation)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 우리 몸의 자가회복 반응을 활용한 치료법으로 건, 인대 강화를 통한 통증 치료에 활용된다.
프롤로 주사는 고농도의 포도당을 손상 부위에 주사하여 염증 반응을 유도하고, 이 염증이 낫는 과정에서 세포증식을 유도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한다. 즉 손상된 조직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결국, 인대강화주사란 염증을 유발시키는 주사였구나!
오백 살 먹은 나무 한 그루 아직도 살아있다
맨 처음 태어난 밑동은 500년을 살았다
그다음 태어난 가지는 499년을 살았다
그다음 태어난 가지는 498년을 살았다
작년에 태어난 가지는 2년도 살지 못했고
올봄에 태어난 가지는 돌도 지나지 않았다
오백 년 된 나무는 한 늙은이가 아니다
오백 살 먹은 노인부터
이제 막 하늘을 기어 다니는 아기까지
오손도손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아름다운 고향 마을이다
오백 세대의 나무가 아직도 한 동네에 살고 있다
오백 살 먹은 나무 한 동네가 아직도 살아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의 취약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나라의 취약점을 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종교의 취약점을 똑똑히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미워도 다시 한 번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면
함께 죽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데
증오는 공멸을 낳는 씨앗인데
내가 너를 미워하면 너는 나를 미워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면 너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길만 있는데
어찌하여 부질없이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하는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른 길은 없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사랑은 없는데
나의 베아트리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의 아프로디테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오늘도 나의 산목련을 찾아서
목련꽃 아래 나무의자에 앉아 그대를 생각한다
산에 수유를 한다
산수유는 피어나고
봄비는
산에 들에 수유하고
우듬지를 향해 달려가는
나무 속 발자국 소리
물관 속에서 들려오는
봄의 아우성과 웃음소리
여울이 아름다운 가탄 해며강에 왔습니다.
다리가 없어
겨울엔 섶다리로
여름엔 나룻배로
건너는 마을이 있거든요.
(여기는 동강!)
우크라이나는 오래전 러시아에 당한 상처가 큰 나라다
그중 하나
1930년 과거 소련이 점령후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은 우크라 농민들의 농토와 가축은 물론 농산물을 강탈했고 농민들은 다 빼앗기고 굶어죽었다
어느 정도 였는가 하면 기아로 인구 3분의 1이 죽었다.
스탈린은 얼씨구나 자국민 러시아인들을 우크라이나로 이주시켰고 그 지역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게됬다.
할수없이 러시아 연방으로 주욱 지내다가 1991년 소련붕괴로 독립한 우크라이나
소련이 배치한 핵무기는 독립을 계기로 세계 3위 핵보유국이 됬다
이때가 우크라이나의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프랑스 독일 미국등은 우크라의 눈치를 봤다
누구나 살다보면 대박기회의 순간이 있듯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우크라에 있는 소련무기를 야금야금 팔아먹고 국민은 친러파와 친유럽파로 양분됬다 .
이렇게 갓독립한 나라나 애매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인 나라둘은 쉽게 강대국에 기대게 된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
친일 친러 친청(중) 친미 등으로 나뉘었던 과거 조선말을 .
대체 각각 다른 외국과 친하자며 국론이 나뉘는 것 부터 정상인가 . 자주국방 자주의식 없이 특별한 어느 강대국과 우방을 한다는 발상부터 병적 증상이고 비굴한 약소국이 되는 병신짓이다 .
우크라가 굴러온 호박인 핵을 완전히 해체하고 핵보유국에서 ‘평화로운’ 빈손이 된 10일 후 러시아가 알토란 같은 크림반도를 쳐들어와 러시아 국기를 꽂았다 그리곤 하는말
“ 원래 여긴 러시아인들이 많으니 러시아군이 들어와야지”
이번의 소련침공에도 푸틴은 똑같은 이유를 대고
나토 확장 .미국과 러시아의 힘의 견제등 전문가들은 복잡 어지러운 국제관계만 늘어놓는다
그러나 현실은 논평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우리는 우리를 봐야 한다
명확한 것은 어느나라나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사실그리고 내몸은 내가 관리하고 우리나라는 우리만이 지킨다는 것이다.
내몸은 의사가 ..나라는 강대국 힘의 논리에 맞긴다면 그까짓꺼 정부나 정권은 왜 있고 선거룰 왜 하나
미국이 독일이 유럽이 왜 다른나라를 위해서 싸워주나
강해서? 착해서 ?평화를 위해서?
개뼉다귀로 귀구멍 파는 소리다
무기지원도 모두 자국의 이해관계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좀 생각해 보자
만약 정말 만약 …
우크라이나가 1991년 독립후 1932년의 집단학살’.
스탈린이 저지른 그 기아. 1년 만에 300만명이 굶어죽은 그 잔인하고 비참한 역사를 제대로 이를 갈고 온 국민이
그 사건의 동기와 원인 과정등을 깊이 재고했다면
돌아킬 수 없는 시대의 과오로 묻지않고 뼈에 각인했다면 그랬다면 국내에 친러파 친유럽 .강대국으로 국론이 나뉘었을까? 그리고 과연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그리 쉽게 포기 했을까?
난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 전체를 싸잡아 역사의식의 부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
약소국의 신세타령 강대국의 이기심을 탓하며 청승떠는 언론과 방송을 뚫고 핵심을 보자는 것이다
이재명이 초보대통령이 어설프게 굴어서 이모양 이꼴이란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다
대통령이 코메디언 출신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각 중요각료에 극작가 배우등을 앉혔다
정치와 외교는 실로 외줄타기 곡예처럼 어렵고 전문적 지식과 경륜이 필요한 자리에 연예인 각료둘이 초보아니고 뭔가
지금 러시아와 미국의 태도 유럽의 대응만 집중보도 하며 욕심쟁이 침략가 푸틴을 비난하고 가여운 우크라이나 피난민을 뵈주며 동정한다
그것은 아주 표피다 . 우크라이나 안에 대한민국이 있다
지성인은 누구인가
표피를 뚫고 본질을 보려는 자다
적폐와 타락한 언론 검찰 정치가 지긋지긋해서
세월호의 어설픈 조사에 촛불바다가 된 것이 언제인데
다시 또 그 적폐의 심장인 검사 윤석열이 강력 대선후보가 될 수 있나
각설하고..
자국민의 개죽음을 역사에 묻고가는 지도자는 국가의 자존심에 침을 뱉는 자다
강대국의 힘에 의지하는 행위는 망국의 행위다 .
우크라이나를 보면서도 우방관계를 돈독히 하는것이 국방의 길이라는 후보는 당장 싸대기를 갈겨서 내쫒아야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거인 이어령 선생이 돌아가셨다. 20대 청년 시절, 한 출판사 편집부에 들어가 기획을 할 때 이어령 선생과 신작 계약을 했다. 당시로는 꽤 큰 계약금을 드렸다. 그 원고를 받으로 적선동 한옥을 개조해 쓰던 문학사상사 주간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오전에 업무를 마치고 오후에 출근하듯이 인사동에서 적선동까지 걸어서 이어령 선생을 만나러 가곤 했다. 그곳에는 늘 내방객들이 넘쳐났고, 사람들 서넛만 둘러 앉으면 이어령 선생의 열강이 펼쳐졌다. 주제도 다양했는데, 한번 말문이 터지면 3~4시간 정도 이어졌다. 그 열강을 들으면서 선생의 박람강기에 감탄하곤 했다. 늘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선생의 모습을 지켜보며 언제 글을 쓸 시간이 있을까, 염려하곤 했다. 결국 이어령 선생의 신작 원고를 받지 못한 채 출판사에 사의를 표하고 나왔다. 그 뒤로 개인적으로 선생을 뵐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행사장에서 스치듯 만날 때 인사를 드리곤 했다. 어제 이어령 선생의 부음을 들으며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실감을 받는다. 이어령 선생은 1933년생이다. 1933년생에 인재들이 많다. 민음사 창립자 박맹호, 전 노동부 장관 남재희, 고은 시인 등이 다 1933년생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수전 손택도 1933년생이다. 이들 중 살아계신 분보다 돌아가신 분들이 더 많다. 이어령 선생님, 이제 눈 감으시고 영원한 평안을 누리시길 빕니다.
한국문학의 우상파괴자 – 비평가 이어령
이어령(李御寧, 1933~2022)은 문학 평론가라는 직함에 가둘 수가 없는 인물이다. 그의 현란한 달변과 박식은 나라 안에서 견줄 만한 이를 찾기 어렵다. 그는 평론을 하는 한편 소설과 희곡을 쓰고, 많은 베스트셀러를 생산한 에세이스트다. 1972년 『문학사상』을 창간해 한국 문학을 지탱하는 문학잡지로 키워낸 인물도 그다. 그는 나라 안팎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학 교수이고, 한국 고전 문학의 연구자이며,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 · 폐회식을 세계적인 문화 이벤트로 만든 문화 기획자다. 정부에 문화부가 생겼을 때 초대 장관을 맡은 인물도 바로 그다. 어쨌거나 그의 문학 활동의 중심에는 비평 작업이 자리잡고 있다.
이어령은 1933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아산군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다. 호적에는 그가 1934년 1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자마자 두 살을 한꺼번에 먹어야 하는 아들을 생각한 아버지의 배려에 따른 것이다. 의협심이 강하고 반항 의식이 있던 이어령은 열한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어린 나이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안겨준다.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뒷날 그의 의식 속에 하나의 원체험으로 자리잡는다. 이어령은 온양국민학교와 부여고등학교 등을 거쳐 195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1956년 이어령은 평론 「우상의 파괴」를 들고 문단에 나온다. 스물셋 젊은 나이의 그는 「우상의 파괴」에서 전후 한국 문단에 봉건적으로 군림하고 있던 ‘우상들의 파괴’를 선언한다. 그는 이 글에서 김동리를 ‘미몽(迷夢)의 우상’으로,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하던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으로, 이무영을 ‘우매(愚昧)의 우상’으로 몰아세운다. 나아가 그는 황순원 · 조연현 · 염상섭 · 서정주 등 당시에 문단을 주도하고 있던 대가들을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기성 문단의 안이성과 공허한 대가 의식을 공격하는 그의 논리는 서구적 수사학으로 단련된 새로운 감각의 한글 문체로 뒷받침된다. 젊은 문학 평론가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와 「화전민 지역」 · 「분노의 미학」 · 「수인의 영가」 등은 우상을 깨부수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해머였다. 심지어 한국의 문학 평론은 그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문학’으로 격상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문학 지성의 눈에 패배주의와 은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고루한 기성들의 문학은 “대지가 아니라 허공에 뿌리를 뻗고 살아가는 슬픈 풍란 문학”이었다. 그는 ‘풍란 문학’을 청산하고 ‘대지의 문학’을 하자고 외친 것이다. 그는 “자기 상황에 대한 부재 증서를 쓰고 있는” 순수 문학론을 무서운 기세로 질타한다. 그러나 이어령이 주창한 참여 문학론은 1960년대 이래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민족 문학론이나 문학의 사회 참여 노선과는 결부터 다르다. 그의 참여 문학론은 개인의 실존에 초점을 맞춘 “휴머니스트의 문학”이다.
1963년 8월 12일부터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하잘것없는 단서에서 우리 문화와 의식의 실체를 찾아낸 그의 천부적인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이것이 한국이다’라는 부제가 딸린,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입체적이며 지성적인 한국론이다.
울음과 눈물을 빼놓고서는 한국을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것까지를 ‘울음’으로 들었다. ‘운다’는 말부터가 그렇다. 우리는 절로 소리 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운다’로 했다. ‘birds sing’이라는 영어도 우리말로 번역하면 ‘새들이 운다’로 된다. ‘sing’은 노래부른다는 뜻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반대로 ‘운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어령, 『흙 속에 저 바람 속에』(현암사, 1963)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1963년 ‘현암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뒤 1년 동안 국내에서만 10만 부가 나가고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컬럼비아대학교 등에서 동양학 연구 자료로 쓰이기도 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일본 학계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켜 이 책을 읽은 후쿠오카 프로듀서에 의해 「봉선화」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며, 타이완에서는 「기사 기풍(欺士欺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다. 40만 부가 넘게 팔려 나간 이 책의 인세로 이어령은 신당동에 집까지 마련한다.
수년 전만 해도 위정자들은 문화에 대하여 어수룩한 편이었다. 이 어수룩하다는 점이 실은 하나의 장점이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문화에 대한 무관심은 때로 정치적인 차원과 좀더 다른 문화적인 차원의 그 이원성을 인정해주는 문화 의식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원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정치 권력이 점차 문화의 독자적 기능과 그 차원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 할지라도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 자신들의 소심증에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린애들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막연한 ‘에비’를 멋대로 상상하고 스스로 창조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이어령,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 홍신선 편, 『우리 문학의 논쟁사』(어문각, 1985) 재인용
1968년에 들어 그는 김수영과 한바탕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은 이어령이 『조선일보』 1967년 12월 28일치에 투고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에서 촉발된다. 김수영과 몇 차례 부딪치며 그의 문학적 입지는 더욱 다져진다. 김수영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라는 글을 통해 이어령이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에서 펼친 논리에 반박하며 “오늘날의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의 소심증과 무능에서보다도 유상 무상의 정치 권력의 탄압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몰아친다. 그러자 이어령은 “문학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저울질하고 있는 오늘의 ‘오해된 사회 참여론자’들이 그런 것이다.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 자체로 감상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관의 문화 검열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최근 1, 2년 동안 김수영 씨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문학 비평가들은 참여라는 이름 밑에 문학 자체의 그 창조적 의미를 제거해버렸다. 그 대신 문학의 그 빈 자리에 진보적 정치 사회의 이데올로기라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들어앉히려 했던 것이다.”라고 김수영을 비판하고 나선다. 두 사람 사이에 거듭 오간 반박과 재반박은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이 논쟁을 통해 이어령은 사회학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인간을 옹호하는 자신의 문학론이 당대의 진보적 현실 참여론과는 뚜렷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진보적 민중 문학론이 득세하며 큰 흐름을 이룬 1970년대의 한국 비평계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좀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그는 이에 따라 1970년대부터는 문학 평론을 거의 쓰지 않고 “고독한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1982년 그는 일본에서 1년 동안 머물며 연구 생활을 한 뒤 일본 문화를 일본어로 비판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내놓는다. 일본 사회에 이어령 신드롬을 일으킨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서 쇄를 거듭하며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이어령은 이처럼 문학 평론 외에도 소설, 희곡, 에세이, 문명 비판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텍스트를 생산한다. 태어날 때부터 본디의 ‘나’와 문서(호적)상의 ‘나’로 분열을 겪은 이어령은 바로 그것이 자신을 문학으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나의 문학은 이렇게 실제 나이가 호적과 다르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 위조된 출생 월일은 상석에 모셔놓은 면사무소와 학교, 은행과 병영 그리고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법원이나 입법자들이 모이는 회의장 여기에서 살아남은 작은 움막집이 나의 문학이다. 이 공공 기물에 낙서하는 것이 나의 문학이다. 공문서를 소각하는 이 범법 행위―그래서 나와 나의 친구들이 결코 출석부 같은 것으로 호명되지 않는 책상에 앉기 위해서 진정한 이름을 하나씩 지어주는 모험이 나의 문학인 것이다. 모든 서류에 잘못 찍힌 나의 탄생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에게는 탯줄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어령, 『이어령 자전 에세이』 (문학사상사, 1994)
1966년 그는 『세대』에 첫 장편 소설 「장군의 수염」을 발표한다. 「장군의 수염」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과 6·25 그리고 5·16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김철훈이라는 지식인을 비롯해 그 주변의 진실한 사람들이 부조리한 사회 상황에 어떻게 짓밟히고 희생되는지를 조명한 작품이다. 전위적이고 자의식적인 요소가 강한 이 작품은 사회 문제와 현대사를 곁들이며 존재의 문제에 깊이 천착,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페이소스를 짙게 깔고 있다. 이어령은 개인과 집단의 갈등, 혼돈스러운 사회 상황과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된 개인의 실존적인 고뇌를 이 소설에 담아낸다.
「장군의 수염」은 구조와 주제 면에서 여느 소설들과 퍽 다르다. 이 작품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액자 형식을 곁들인 추리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러 결정적인 순간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장군의 수염’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무의식적이고 원시적인 힘, 권위적인 힘을 상징한다.
이어령은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2년부터 1966년까지 모교의 문리대 강사를 거쳐 1967년부터 1989년까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선다. 이 사이에 그는 『서울신문』 · 『한국일보』 · 『경향신문』 · 『중앙일보』 · 『조선일보』 등의 논설 위원을 거치는 한편, 1972년부터 1987년까지 『문학사상』 주간을 맡는다. 1979년 10월에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을 받은 그는 1990년에 들어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한다. 문화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그는 장관 시절에 ‘문화 발전 10개년 계획’을 내놓지만 반응이 냉담해 뜻을 펴지 못한다. 추정 예산 3조 원이 넘는 이 계획은 ‘꿈꾸는 자의 타령’, ‘거품 정책’ 등의 논란을 빚으며, 그저 문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일 정도로 남고 만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문화의 세기’라며 허겁지겁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마적에 와서 봐도 빈틈없고 앞선 느낌을 준다.
그 동안 독자들을 사로잡는 빼어난 에세이와 작품 비평을 내놓곤 하던 이어령은 2000년에 들어 비로소 자신의 첫 번째 문학 이론서를 내놓는다. 청마 유치환의 시가 어떻게 안과 밖, 위와 아래 등 공간의 대립과 구조를 통해 다른 의미소(意味素)를 낳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지를 분석한 『공간의 기호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그의 저술 활동에 한 전환점이 될 듯하다. 그는 『공간의 기호학』을 계기로 연구와 이론 정립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특히 기왕에 관심을 가져온 수사학, 은유론, 이상(李箱) 연구 등을 더욱 진전시켜 차례대로 연구서를 내겠다고 말한다.
이어령은 기호론에 관심이 많아 동서 문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분석하고 ‘기호학회’까지 창립한다. 그의 강연은 엄청난 독서량과 날카로운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강연을 할 때 동서 고금의 철학자나 문인들의 주옥 같은 명구를 남다른 응용력과 상상력으로 걸러 엮어낸 다음 유행어까지 버무려 현실의 맥락과 의미를 꿰뚫는다. 이제는 글보다 말로 뭇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어령은 한 시대를 풍미한 비평가임에 틀림없다.
장석주,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2000, 참조
이어령 선생 별세 소식을 접하며, 한 개인이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남긴 영향의 총량이 至大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
그는 쉼없이 특이하게 생각하고 깨닫고 탐색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터넷의 바다를 넘나들며 광막하게 쌓인 세계의 정보와 긴밀히 소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 사는 세계인이었고 첨단 정보의 탐색자였다. 그렇게 얻은 첨단 정보와 해박한 안목은 대한민국의 문화를 세계로 견인해내는 업적들로 나타나곤 했었다.
선생이 통의동 한옥에 월간 [문학사상] 사무실을 차렸을 때, 어쩌다 선생과 마주앉는 때가 있었다. 선생의 사유의 폭과 깊이가 바다같아서, 하늘같아서 선생 말 따라가다 보면 늘, 숨가쁘고 다리도 아픈 채, 새롭게 발견되어있는 신대륙에 겨우겨우 닿곤하는 것이었는데. .
세계인의 눈, 촛점이 집중된 88올림픽 개막 마당, 모든 소리를 소거한 채 소년을 불러 굴렁쇠를 굴리게한 이어령의 섬광이었거니, 직관이었거니. . .
디지털의 시대를 넘어 디지로그(digilog)의 시대가 온다고,
앞장서서 신대륙을 열어놓고 간 사람,
이어령, 한국사의 저 빛나는 자리에서 날개쳐 날아 오른
사람, 한국인 이어령,
그가 있어 행복했던 . .
(이어령 선생과 함께. 오세영.이건청.영인문학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