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108
정방폭포 위에 감옥이 하나 있다. 쇠창살 안에서 달빛이 책을 읽고 있다. 나와 함께 책을 읽던 달빛이 뛰어내린다. 달빛이 부서지며 햇빛과 섞인다. 정방폭포 위에 있던 감옥도 함께 부서진다. 달빛과 햇빛과 윤슬이 만나 무지개를 만든다. 무지개 다리 위로 오늘이 환하게 웃는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이 있다.
책을 읽다가 꿈을 꾸었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었다. 바위 속에 숨어 있던 부처님께서 바위를 열고 피어났다. 나는 돌부처 몸에 피어난 지의류였다. 돌부처 아래 사는 밑들이벌이었다. 아니, 지의류에 숨어 사는 이끼개미귀신이었다. 아니다. 이끼개미귀신에 붙잡힌 돌좀이었다. 그러나 아, 이제 보인다. 섶섬 문섬 범섬이 보인다.
오늘도 나는 시를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너를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시는 사랑이다.
마늘꽃
사람들은 당신의
꽃이 피기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늘의
꽃이 필까봐서
마늘쫑 목을 친다
나는 마늘보다
마늘꽃이 더 좋다
나는 늘 기다린다
당신이 활짝 피어야
나는 더욱 환해진다
나의 사랑은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그래야만 하리라
마늘꽃이 환하다
꽃과 사랑
꽃이 핀다
사랑하면 죽는다는데
그래도 사랑하고 싶다
오늘 해야 할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꽃이 진다
아니,
꽃이 사랑을 낳는다
아름다운 폐가
일찍 핀 꽃은 일찍 지고
늦게 핀 꽃은 늦게 진다
일찍 핀 매화 일찍 지고
늦게 핀 살구꽃 한창이다
일찍 피었다고 웃지 말고
늦게 피었다고 울지마라
나뭇가지에 빈 둥지 하나
아름다운 꽃대궐 환하다
봄물
나에게 봄물 오르니
만물이 꿈틀거린다
건조한 너의 마음에
단비로 적시고 싶다
뼈와 인대
조개 한 마리
뼈 사이에 조용히
부드러운 살을 내밀고 있다
위험을 감지한 조개 한 마리
부드러운 발을
뼈 속으로 숨기고
뼈를 꽉 다물어버린다
밖에서는 더 이상
조개의 문을 열 수 없다
양쪽에 붙어있는
하얀 인대가
뼈보다 힘이 더 쎄다
세상은
뼈가 아니라
인대가 움직인다
다시 백미러
앞으로 잘 가려면
뒤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백미러 속에 길과 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강과 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강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이어도가 보인다
백미러 속에 그림자가 보인다
백미러 속으로 앞날이 보인다
앞으로 잘 가려면
앞만 보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잘 가려면
뒤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잘 뒤돌아 보아야만 한다
내가 걸어온 나의 길이
내가 걸어갈 나의 길을
뒤에서 잘 밀어줄 것이다
방황과 여행과 순례는 나에게
여행은 돌아올 곳을 여기에 두고 떠난다
방황은 돌아올 곳을 박차고 떠나 버린다
그리하여 여행이 끝나면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방황이 끝나면
나는 반드시
새로운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행보다 오히려
방황의 길이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순례는 나에게 무엇일까?
거시기와 어처구니
혓바늘
입 속의 혓바늘
바다와 나의 숨결이
바다는 언제나 숨을 멈추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바다는 언제나 숨을 멈추지 않는다
바다는 오늘도 살기 위하여 숨 쉰다
바다는 오늘도 쓰레기 가득 토한다
나도 자주 쉬지 않고 울분을 토한다
바다와 나의 숨결이 만나 춤을 춘다
바다와 나의 숨결이 만나 하늘 된다
바다와 나의 숨결이 만나 구름 된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 틈이 있어 산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 틈이 좋아 산다
바다와 나 사이에도 틈이 있어 좋다
하늘과 나 사이에도 틈이 있어 산다
오늘은 정방폭포에 다시 와서 시와 시조를 생각한다. 詩(시)와 時調(시조)를 생각한다. 時調(시조)에서 중요한 것은 詩(시)가 아니라 時(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시조(時調)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의 가객 이세춘이 당시에 ‘단가’라고 불리던 것을 ‘시절가조(時節歌調)’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 갈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1920년대 후반 최남선의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를 필두로 전개되었던 시조부흥운동과 더불어 문학 갈래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다시 시작하는 순례
<4·3과 평화> 여름의 얼굴이 된 정방폭포
상처가 깊을수록 많은 눈물을 쏟아서 더욱 하얗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얼굴 안쪽에 그늘처럼 흑백사진 한 장이 숨어있다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보이고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아왔던 서복이 머문 곳
지금도 대궐 같은 집에서 불로초를 가꾸고 있는 곳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그중의 한 사람을 따라서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서복불로초공원 한쪽에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간이 마련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_(1941. 11. 20. 윤동주 25세)
* 정방폭포에서 베틀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만가(輓歌) 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자장가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원자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이 항복하는 소리 들린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왜 제주도의 폭포는 남쪽에만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의 폭포들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요즘 시인이라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나는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점검하며 순례를 떠난다. 윤동주의 거울 하나 들고서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하늘을 보지 못해서 부끄럼이 너무 많구나! 나는 지금껏 죽어가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이제라도 나한테 주어진 길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서 걸어가고 싶다. 오늘 밤에도 나의 별은 잠들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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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브런치북] 작가님 참고자료 1. 에세이 (brunch.co.kr)
06화 Why I Write 나는 왜 쓰는가 (brunch.co.kr)
제주4·3평화재단 (jeju43peace.or.kr) 제주4·3이란 : 1947년 3월 1일,요란한 총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