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110
* 이능표 시인의 『사랑하냐고 묻고 그립다고 대답했다』의 문장을 뽑아서 편집했습니다.
활자가 말을 전하지 못하고
종이가 생각을 담지 못하고
나는 다시
사람의 몸을 받지 않을 것이니
2024년 3월
이능표
장의차를 보고 속도를 줄인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한 생을 살았으니 경의를 표할 일이다.
들꽃을 보고 걸음을 멈춘다.
이름도 연유도 알 수 없지만
한 생이 피었으니 고개를 숙일 일이다.
강물을 따라 송어 떼가 지나갔다.
"저들은 다시 오지 않아!"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발목을 적시는 희미한 불빛처럼
사랑하냐고 그녀가 묻고 그립다고 그가 대답했다.
새벽 두 시의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강물을 거슬러 송어 떼가 돌아왔다.
"그때 그 송어가 아니야!"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발목을 적시는 희미한 불빛처럼
사랑하냐고 그녀가 묻고 그립다고 그가 대답했다.
새벽 두 시의 통화는 늘 그렇게 끝이 났다.
강물이 강물을 밀어내듯
천금 같은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개를 묻는다는 건 추억을 묻는 것이다.
까미가 죽었다
본래 이름은 카뮈였다.
====== 후략 ======
파미르고원이었지 아마?
언덕을 오르는 기다란 행렬 속에서
비틀비틀 무리를 빠져나와 너는 내게로 왔어.
다리를 접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을이 담긴 눈으로 무리를 돌아보던
너의 죽음이 산 자의 깨달음이 되고 있을 때
나도 한 번은 죽었던 거야.
망원경 속에 어둠이 내리고
초원의 바람이 너의 온기를 실어 나르는 동안
겁 많은 여우가 맴돌다 가고
떠나간 무리 속에서 너의 아이가 돌아와 애도를 마칠 때까지
내 숨은 멎어 있었어.
파미르고원의 이름 모를 평원에 뼈를 묻으면서
한 사내의 생사가 되었던 자,
너에 관한 시를 쓰는 일이
살아 있는 흉내를 내는 건지도 몰라.
오래전 그곳에서
죽은 자에게 삶을 가르친 모종의 존재,
그저 양이라 부를 수 없는,
그날 그 파미르고원의 마르코폴로.
눈길과 눈길이 마주치는 1초
눈길이 어긋나는 1초
그리고,
그 1초와 1초 사이의 1초
사랑에 빠지는 1초
사랑을 놓치는 1초
그리고,
그 1초와 1초 사이의 1초
꽃잎을 흔드는,
바람과 바람 사이의 1초
공중에 멈춘,
새들과 중력 사이의 1초
치타와 가젤 사이의 1초
수리부엉이와 다람쥐 사이의 1초
작살과 돌고래 사이의 1초
총알과 방아쇠 사이의 1초
함정과 발바닥 사이의 1초
그 모든 1초와 1초 사이의 1초.
폭설처럼,
목련이 쏟아졌다.
맞아, 저 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지!
꽃잎들이 날아올랐다.
====== 후략 ======
아닌 듯이 사랑하고
아닌 듯이 저버리고
아닌 듯이 무너지고
아닌 듯이 아파하고
아닌 듯이 비난하고
아닌 듯이 조롱리고
아닌 듯이 기다리고
아닌 듯이 확신하면서
사연 많은 두 세기에 걸쳐
그 모든 아닌 듯한 것들 속에 내가 있다.
원망하거나 반성하지 않겠다.
지구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크게 책임질 일을 저지를지는 않았으므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그 내가 내가 아닌 듯이
아마도 이 행성에 조금 더 머물 것이다.
해 저문 들판 어딘가에서
가끔은 꿈이 아닌 듯이 꿈을 꾸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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