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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l 13. 2024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어머니, 시인은 월급이 없어요

오늘은 참회록을 쓸 각오를 하고
주말 특집으로
어질러진 나의 마음의 방을
정리하지 않고 그냥 다 보여준다


길을 가다가 가끔은 뒤돌아보아야만 한다


나는 잠시 나를 뒤돌아본다. 나는 너무 오래도록 교대근무를 하였다. 교대근무를 너무 오래 하면 한 십 년 정도의 생명이 짧아질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30년도 넘게 교대근무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어도에서 살았다. 바다만 바라보면서 스스로 이어도에 갖혀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며 이어도 시인으로 살았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서 지난주에는 부산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주에는 3일째 출근하여 나의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고 있다. 나는 이제 뒷방으로 물러났다. 밤낮없이 전기를 만들던 현장에서 물러났다. 나는 이제 별빛을 만들지 않는다. 선임전문위원이 되었다. 현장 업무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니 발전소가 더 잘 보인다. 발전소와 발전소 사람들에 대한 글도 이제는 부담없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윤동주 시인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얼마 전에 나왔던 모던포엠을 다시 본다. 모던포엠 초대석에 나왔던 배진성 시인의 글을 읽는다. 등단하고 썼던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를 다시 읽는다.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이다. 윤동주 시인도 시를 써서 돈 한 푼 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의 어떤 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 것일까? 시와 삶이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좋아할 것이다. 시는 그 시를 쓴 시인의 삶과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와 삶이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그 시와  그 시인은 비로소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와 삶으로 완성될 수 있으리라.


월대천 징검다리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월대천 징검다리를 건너며,

물의 고을, 여수를 지나 고향으로 간다

거문도를  지나 오동도를 지나 망덕포구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곡성으로 간다


징검다리 사이에서 노니는 은어를 따라

내도 앞바다로 간다 내도 알작지 앞에서

파도소리와 놀다가 이어도에서 올라오는

연어를 따라 가끔 남해 바다를 건너 간다


추자도와 여서도와 거문도로 가는 연어,

여수에서 멀리 마중 나온 거문도로 간다

여수의 아기 나비처럼 날개를 펄럭인다

내 고향보다 더 고향 같은 여수가 참 좋다


여수시(麗水詩)에는 아직도 첫사랑이 산다

여수시(旅愁詩)에는 늘 마지막 사랑이 산다

오동도 앞에서 동백꽃으로 떨어져버린 꽃과

향일암 앞으로 붉게 떠오를 태양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월대천 징검다리를 건넌다

다음 생에는 꼭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서

여수만을 생각하며 한라산에서 내려온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따라서 간다


연어의 종착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꼭

전생에 헤어졌던 당신을 만나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붉은 알을 함께 낳아야만 한다


강산

『너에게 나를 보낸다』


 배진성

 1966년 전남 곡성 출생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

『이어도공화국 0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02 -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

『이어도공화국 0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04 – 꿈섬』

『이어도공화국 05 –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공화국 06 – 서천꽃밭 달문 moon』    


모던포엠 초대석 배진성


1. 징검다리

2.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3. 길이 있는 풍경

4. 사과꽃망울

5. 나무 발전소 1

6. 세한도

7. 덜컥

8. 시집과 갈치의 가격

9. 고구마 꽃

10. 다랑쉬(큐알코드 영상시) 


<나의 시론>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시와 시론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둑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어머니, 시인은 월급이 없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 살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나무 발전소 1


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

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


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


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

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 하고 계신다


땅속 오래 묻혀 있던 나무들

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


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

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


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세한도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덜컥


<몸>이라는 글씨를 써 놓고 들여다본다

두 개의 입 같기도 하고 창문 같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두 장의 벽돌 같기도 하다

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데

나는 도대체 내 몸 안을 볼 수 없다

콘크리트 같은 내 몸 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 몸 안에서

암 덩어리라도 살림을 차린 것일까

이러다가 덜컥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나

지금껏 잘도 버텨왔는데

이러다가 덜컥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덜컥 가게 된다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덜컥 떠나야 한다면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일까

구속과 단식을 반복하고 계시는

양윤모 선생님 영상을 보며

강정과 해군기지와 사삼과 평화와

그리고 삼월과 사월과 오월을 넘어

시와 시인의 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건강을 핑계로 몸만 따라다녔다

내 마음이 주인이 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죽기 전에

나도 한 번쯤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

벽돌 한 장 내려놓으니

몸이 마음이 된다

창문 한 번 열어보니

몸이 마음으로 열린다

<몸> 글자를 지우고 <마음>이라는 글자를 덜컥 쓴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덜컥 보이기 시작한다


시집과 갈치의 가격


윤동주 시인의 시집과 전집과 관련 책들을 읽다 보니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을 사야만 했다 제주도 도서관에는 한 권도 없다 3년이 더 지났으니 희망도서로 신청할 수도 없다


1999년에 발행한 시집이 

5만 원이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고

오후에 산책을 나간다


윤동주 시인은 습작노트 2권과 자선 시고집 1권을 남겼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렵부터 날짜를 명기해 가며 습작품을 보관했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월대천 징검다리에서 왜가리 한 마리

여울물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고 있다

왜가리의 식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징검다리 건너지 않고 외도포구로 간다

외도교 아래를 지나 대원암 쪽으로 간다


눈이 내리는 바다에는 바람까지 거세다

바다에 누워계신 관세음보살을 씻는 파도가

해안까지 멀리 날아와서 나를 적신다

안경과 입술에도 소금 맛이 스며든다


파도가 날아오르는 연대포구에서

청해수산 홍보영상을 촬영 중이다

통통한 갈치가 싱싱하게 빛나고 있다

파도처럼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은 갈치가

한 마리에 5만 원씩이라고 한다

아, 갈치도 참으로 비싸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한 생명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한 시인의 삶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고구마 꽃


고구마 꽃이 피었다

고구마 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다랑쉬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한 명이 들려 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볼 뿐


https://youtu.be/DS63sv6GvQw


나의 시론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시와 시론


나는 요즘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시와 삶을 완벽하게 일치시킨 시인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삶과 시를 함께 성장시킨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과 깊이 대화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나의 시와 나의 삶을 함께 성장시키고 싶다. 윤동주 시인은 아직도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그 우물 속에서 막힌 물길을 다시 뚫고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아프신 아버지 대신 나가서 울력을 하곤 했다. 장마에 떠내려간 징검돌을 제자리로 옮겨서 징검다리를 다시 놓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우물 청소도 정기적으로 울력으로 했다.   


상수도 시설이 없었던 시절에는 공동우물이 참으로 소중했다. 지붕도 튼튼하게 잘 만들어 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해마다 깊은 우물 속 청소를 하였다. 울력 나온 사람들 중에서 언제나 내가 가장 어렸다. 그래서 내가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평소에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뜰 때에는 그냥 맨손으로 두레박줄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공동우물 대청소를 할 때에는 우물집 대들보에 도르래를 설치하고 큰 양동이를 매달아서 빠른 속도로 물을 퍼냈다. 우물 바닥이 보이면 가장 어린 내가 그 양동이를 타고 내려갔다. 혹시 막혀있는 물길이 있으면 다시 뚫어주고 이끼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낙엽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쌓인 뻘들도 걷어내고 나는 다시 양동이를 타고 올라왔다. 양동이를 탄다고 썼지만 사실은 양동이를 매단 밧줄을 붙잡고 올라왔다.   


검불 같은 시가 많아지고 따개비 같은 시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좀 더 의미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좀 더 치열하고 좀 더 생명력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고민하는 요즘이다.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글이 하나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의 시와 나의 글에 <꿈삶글>이란 이름도 붙였다. 그리하여 나는 의미 있는 시인들을 처음부터 다시 깊이 만나고 있다. 올드포엠, 윤동주 시인부터 만나고 있는데 모던포엠에서 생각지도 못한 초대장이 왔다. 올드와 모던의 만남이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을 잘 모른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 발행인 전형철 선생님을 잘 모른다. 자신을 시 비렁뱅이로 자청하며 돈수백배 하시는 공손함을 나는 배운다. 


나는 윤동주 시인에게 처음부터 다시 먼저 배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능력을 배운다. 특정한 사회와 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할 수 있는 정체성을 배운다. 개인적 체험을 넘어, 깊은 통찰력으로 그것을 변용하고 조직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배운다. 그리하여 시대의 아픔을 자기화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를 형상화하여 지고지순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끝없이 성장하는 인간성을 배운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무엇일까? 그리하여 나는 근본부터 다시 생각한다. 뿌리부터 다시 살핀다. 하나회보다 더 무서운 검찰조직이 무성하다. 통일조국을 이루지 못한 해방정국부터 다시 살핀다. 정방폭포가 나를 부른다. 정방폭포에서 사삼과 평화에 관한 서사시를 쓴다.  


나는 최인훈 선생님과 오규원 선생님께 문학을 배웠다. 최인훈 선생님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를 배웠고 오규원 선생님께 “진정성”을 배웠다. “장식을 걷어내고 진정성으로 승부하라” 그리하여 나의 평생 화두는 “진정성”이 되었고 최인훈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 문학의 방법론이 되었다.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시론이 하나씩 추가되는 셈이다. 자기 복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거듭나야만 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론을 개발하여 자신이 쓰는 시에 끊임없이 새롭게 적용시켜야만 한다. 시론은 어느 하나에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쓰고 싶은 시의 주제와 형식에 따라서 다양한 시론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비교적 다양하고 많은 시론을 배웠고 또한 다양하게 적용하려고 한다. 주제와 양식에 따라서 다양하게 옷을 입힐 필요가 있다. 요즘 활발하게 발표되는 디카시에도 관심이 많고 모덤포엠에서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큐알코드 영상시에도 관심이 많다. 시대가 변하면 시와 시론도 함께 변해야만 한다. 멀티 디지털 시대이므로 멀티포엠으로 가는 길은 더욱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아무리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혀도 근본이 변해서는 안 된다. 먼저 탄탄한 시가 된 다음에 다양한 옷을 입혀야만 한다. 미숙하거나 함량미달을 감추기 위하여 위장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나의 시론을 쓰려고 하니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오규원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시 창작은 우리들이 써서 제출한 시를 책으로 만들어서 합평을 하면서 배웠고 이론은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을 기본 교재로 활용하고 다른 많은 시론들을 곁들여서  다양하게 배웠다. 시의 생명은 비유와 은유와 상징에 있으며 압축과 진정성만이 좋은 시를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런 시론을 쓰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시 창작자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으며 또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간단하게 말하려고 한다. 나의 체질에 맞는 시는 어떤 시이며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어떤 시인지 말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시론은 시인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로운 시를 쓸 때마다 자신의 시론 또한 그에 걸맞게 성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시를 생각한다. 시인에게 시는 삶이다. 시인에게 시는 꿈인 동시에 삶이다. 나는 언제나 시인이 되기 위하여 시를 찾고 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시를 살고 있다. 나는 언제나 ‘詩’라는 글자를 생각한다. ‘詩’라는 글자는 재미가 있다. ‘詩’라는 글자 속에는 입과 발과 손이 모두 들어있다. 나는 발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삶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가슴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땀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눈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나도 시를 쓰기 시작한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는 산사에서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산사의 종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때 시를 찾아서 산사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절 사(寺)에 말씀 언(言)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시(詩)이므로 시는 산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범종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운판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법고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어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탁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죽비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염불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신이 자연에 숨겨놓은 말씀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빛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별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달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바람이 시가 아닐까, 바다가 시가 아닐까, 강이 시가 아닐까, 여울물 소리가 시가 아닐까, 나무가, 풀이, 꽃이, 가시가, 개구리가, 개구리밥이, 여치가, 버들치가, 은어가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조금만 눈을 떠봐도 세상에는 보석 같은 신의 말씀들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 봐도 세상에는 여울물소리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뜨고 다시 보면 세상에는 온통 시 투성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드디어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찾았고 꿈결 같은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며, 시는 아이들의 고요한 숨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시는 결국 그 생명을 낳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이제 시는 생명이다. 나에게 이제 시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낳아 길러주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록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랑을 도와서 고귀한 생명을 함께 낳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에게도 나의 대표작이 있다. 전생에 낳은 두 아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생명력이 강한 나의 대표작이다. 나는 어떤 시인들보다도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존경하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비록 내가 직접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인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나에게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이 있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가 있다. 아마도, 광주에 있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신 것 같다.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만 같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하다. 자식인 나는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부모님께 유일하게 받은 유산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도록 눈물의 왕으로 살았다. 이어도에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며 이어도로 살았다. 이어도에 살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무였다. 나 또한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땅을 보며 나무가 되어 나무로 살았다. 나무는 시와 산문으로 존재한다. 산문이 나무라면 시는 나무의 나이테일 것이다. 산문은 나무 전체를 설명하지만 시는 나무를 톱으로 켜서 나이테만 척 보여주는 형식이다. 그래서 시가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이테만 보고 나무와 만났을 바람이며 햇빛이며 별빛을 상상하는 행위는 우리들을 더욱 깊고 넓은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사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다시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서 함께 길을 찾아 나선다. 나의 <세상 읽기와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는 이렇게 모던포엠 가족들과 구독자님들께 먼저 인사를 올리고 함께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대량생산과 대량 복제품들의 시대에 수공업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시 한 편 쓸 수 있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가난한 수공업자인 모든 시인들의 문운을 빈다.


가을 저녁


추석(秋夕), 가을 저녁이 참 좋다

가을 저녁이란 말이 참 좋다

내가 아마

가을 저녁쯤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가을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8월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나는 왜 가을 저녁을 더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가위를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위라는 말을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들의 머리를 자르는 전단가위

우리들의 머리카락 자르는 이발가위

애끓는 마음까지 잘라버린 인연가위

배 속에 넣은 채로 봉합해 버린 수술가위

천의 피부를 싹둑, 싹둑 자르고 

인연의 실을 뚝, 뚝 끊어버리는 바느질가위

붉은 피 똑똑똑 흘리며 사지를 절단하는 부엌가위

마늘 모가지 따는 농업가위, 공업가위, 어업가위

아, 담벼락에서 거시기를 노리던 그 큰 거시기 가위

사마천의 거시기까지 잘라버린 그 크고 무서운 가위

그리하여 나는 아직도 한가위보다 추석이란 말이 좋다

가을밤 보름달 속에서 큰 가위 하나 보인다

가을 저녁을 가위질하며 큰 보름달 하나 하늘을 가른다


숲에서 길을 찾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를 미워하며 키만 키우고 있었다


소나무는 목숨에 대하여 말해 주었으나

가슴속으로 흐르는 물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나무는 길을 알려주려고 숲과 숲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되었다


뒤늦게 칡과 등나무는 서로의 강을 보았고

소나무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길을 보았다


다투어 하늘로만 향하는 길을 틀어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낭떠러지의 아득함과 절벽의 막막함으로 가는 길, 그래도 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길


칡과 등나무는 외나무다리를 부여잡고 돌고 돌아

으르렁거리는 물살 위에서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나

칡과 등나무는 서로를 안으면서 길이 되었다


먼 훗날 소나무 다리가 먼 길 떠난 뒤에도

칡과 등나무는 든든한 서로의 다리가 되리라


갈등(葛藤)의 다리가 강을 건너고 있다


https://youtu.be/M9oi4JGL5D0?si=d1yYcu1iXeY6VZFh



월간 모던포엠 2023년 10월호 신작시 2편 배진성     


배진성 (裵鎭星) 

              

1988년《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

1989년《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

『이어도공화국 0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02 -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

『이어도공화국 0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04 – 꿈섬』

『이어도공화국 05 –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공화국 06 – 서천꽃밭 달문 moon』

  yeardo @ naver.com                                      


가을 저녁


추석(秋夕), 가을 저녁이 참 좋다

가을 저녁이란 말이 참 좋다

내가 아마

가을 저녁쯤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가을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8월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나는 왜 가을 저녁을 더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가위를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위라는 말을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들의 머리를 자르는 전단가위

우리들의 머리카락 자르는 이발가위

애끓는 마음까지 잘라버린 인연가위

배 속에 넣은 채로 봉합해 버린 수술가위

천의 피부를 싹둑, 싹둑 자르고 

인연의 실을 뚝, 뚝 끊어버리는 바느질가위

붉은 피 똑똑똑 흘리며 사지를 절단하는 부엌가위

마늘 모가지 따는 농업가위, 공업가위, 어업가위

아, 담벼락에서 거시기를 노리던 그 큰 거시기 가위

사마천의 거시기까지 잘라버린 그 크고 무서운 가위

그리하여 나는 아직도 한가위보다 추석이란 말이 좋다

가을밤 보름달 속에서 큰 가위 하나 보인다

가을 저녁을 가위질하며 큰 보름달 하나 하늘을 가른다


숲에서 길을 찾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를 미워하며 키만 키우고 있었다


소나무는 목숨에 대하여 말해 주었으나

가슴속으로 흐르는 물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나무는 길을 알려주려고 숲과 숲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되었다


뒤늦게 칡과 등나무는 서로의 강을 보았고

소나무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길을 보았다


다투어 하늘로만 향하는 길을 틀어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낭떠러지의 아득함과 절벽의 막막함으로 가는 길, 그래도 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길


칡과 등나무는 외나무다리를 부여잡고 돌고 돌아

으르렁거리는 물살 위에서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나

칡과 등나무는 서로를 안으면서 길이 되었다


먼 훗날 소나무 다리가 먼 길 떠난 뒤에도

칡과 등나무는 든든한 서로의 다리가 되리라


갈등(葛藤)의 다리가 강을 건너고 있다


1. 징검다리

2. 경운기

3.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4. 길이 있는 풍경

5. 땅 냄새

6. 가시나무새와 누란의 양파꽃

7. 길 끝에 서 있는 길

8. 사과꽃망울

9. 나무 발전소 1

10. 세한도

11. 봄

12. 심장의 춤

13. 심우도

14. 덜컥

15. 소망

16. 시집과 갈치의 가격(신작)

17. 고구마꽃(신작)

18.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어머니의 시(디카시)

19. 다랑쉬(큐알코드 영상시)

20. 이어도공화국 1 (큐알코드 영상시)


<나의 시론>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시와 시론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둑에서

삐비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경운기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어머니, 시인은 월급이 없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 살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땅 냄새


비가 개인 다음날

아침

마당이 없어지는 시대에

마당에 나갔다

덮쳐오는 땅 냄새

아, 

어머니


우리들의 봄은

어머니 같은

사철나무 울타리 안으로

벌써

들어와

피어나고 있었다


강은 그렇게 땅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가시나무새와 누란의 양파꽃


당신과는 발가락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 해는 서산마루를

붉게 걸어가고 나는 잠을 깬다

  

밤에만 피는 꽃잎 속에서 나는

살아있다 어둠은 나의 집이다

그 집에는 천년을 열어도 다

열지 못할 많은 문이 있다

천년에 딱 한 번 한꺼번에

잠깐 어둡게 열렸다가 스스로 잠긴다

  

그 속에는 발가락도 닮지 않은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는 고민한다

고민한다 그리하여 나는 불러본다

불러본다 그리하여 나는 울어본다

울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웃어본다

웃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도망친다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는 쓰러진다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본다

돌아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살아난다

  

사랑하기 위하여 저만치

저만치 피어있는 꽃 한 송이

         

          

길 끝에 서 있는 길



길 끝에서는 언제나 

또다시 길이 열린다 

길을 찾아가는 길 

나는 언제나 그렇게 

길이 있으면 

길 끝까지 가보고 싶다 


희망은 늘 그렇게 있다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나무 발전소 1



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

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


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


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

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 하고 계신다


땅속 오래 묻혀 있던 나무들

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


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

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


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세한도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을 본다


봄이 몸으로 보인다

봄이 몹으로 보인다

봄이 봅으로 보인다


해가 조금씩 일찍 온다

해가 조금씩 늦게 간다


해를 보려고 새싹이 돋아난다

해를 보려고 풀들이 자라난다


봄은 봄(春)이다

봄은 청춘이다


봄은 스프링(spring)이다

봄은 통통 튀어 오른다


봄은 봄(bomb)이다

봄은 펑펑 터진다


봄이 왔다

봄이 봄으로 보인다


나도 이제 봄이다

봄이 환하게 핀다



심장의 춤



심장과 함께 걸어 보니 잘 보인다

심장의 춤사위는 참으로 황홀하다

심장은 두근두근 뛰지 않는다

동방결절에서 전기 신호를 받는다

우리들의 심장은 최첨단 발전소다


두방두심 두방두심

심방심실 심방심실

들어옴나감 들어옴나감

드롬나감 드롬나감

나의 심장은 이렇게 춤춘다


심장은 마음이어서 

마음으로 춤춘다

전기로도 춤추고

자율신경으로도 춤추고

호르몬으로도 춤춘다


심장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장은 가슴에도 있고

발에도 있고

손에도 있고

머리에도 있다


심장은 마음이어서

온몸에 있다

온몸이 심장이고

온 마음이 심장이다


나의 심장은 나에게만 있지 않다

나의 심장은 이제 너에게도 있다


너는 나의 심장이고

나는 너의 심장이다


나의 심장이 둥둥둥 북을 치며 오고 있다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덜컥



<몸>이라는 글씨를 써 놓고 들여다본다

두 개의 입 같기도 하고 창문 같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두 장의 벽돌 같기도 하다

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데

나는 도대체 내 몸 안을 볼 수 없다

콘크리트 같은 내 몸 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 몸 안에서

암 덩어리라도 살림을 차린 것일까

이러다가 덜컥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나

지금껏 잘도 버텨왔는데

이러다가 덜컥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덜컥 가게 된다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덜컥 떠나야 한다면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일까

구속과 단식을 반복하고 계시는

양윤모 선생님 영상을 보며

강정과 해군기지와 사삼과 평화와

그리고 삼월과 사월과 오월을 넘어

시와 시인의 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건강을 핑계로 몸만 따라다녔다

내 마음이 주인이 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죽기 전에

나도 한 번쯤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

벽돌 한 장 내려놓으니

몸이 마음이 된다

창문 한 번 열어보니

몸이 마음으로 열린다

<몸> 글자를 지우고 <마음>이라는 글자를 덜컥 쓴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덜컥 보이기 시작한다



소망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여행하고

만 명의 친구를 사귀어라*


하지만 나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단 한 곳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만을 사귀고 싶다


나는 평생

단 한 권의 당신을 읽고

단 한 곳의 당신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 당신만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만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망이다



※ 讀萬券書 行萬里路 交萬人友



시집과 갈치의 가격



윤동주 시인의 시집과 전집과

관련 책들을 읽다 보니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을 사야만 했다

제주도 도서관에는 한 권도 없다

3년이 더 지났으니

희망도서로 신청할 수도 없다


1999년에 발행된 시집이

5만 원이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고

오후에 산책을 나간다


윤동주 시인은 습작노트 2권과

자선 시고집 1권을 남겼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렵부터

날짜를 명기해 가며 습작품을 보관했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월대천 징검다리에서 왜가리 한 마리

여울물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고 있다


왜가리의 식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징검다리 건너지 않고 외도포구로 간다

외도교 아래를 지나 대원암 쪽으로 간다


눈이 내리는 바다에는 바람까지 거세다

바다에 누워계신 관세음보살을 씻는 파도가

해안길까지 멀리 날아와서 나를 적신다

안경과 입술에도 소금맛이 스며든다


파도가 날아오르는 연대포구에서

청해수산 홍보영상을 촬영 중이다

통통한 갈치가 싱싱하게 빛나고 있다

파도처럼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은 갈치가

한 마리에 5만 원씩이라고 한다

아, 갈치도 참으로 비싸구나

하며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한 생명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한 시인의 삶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고구마 꽃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어머니의 시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말씀이 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편지가 있다

나를 가장 울게끔 하는 유서가 있다

어머니는 이 글을 온 몸으로 쓰셨다

농약이 깊숙이 퍼질 때 울며 쓰셨다

내가 받아 온 유일한 어머니의 유산



다랑쉬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한 명이 들려 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볼 뿐



https://youtu.be/DS63sv6GvQw



이어도공화국 1

꿈과 삶과 죽음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 나라



나는 오십육 년 넘게 꿈속에서 살았다

나는 오십육 년 넘게 꿈섬에서 살았다

나는 오십육 년 넘게 이어도에 살았다 


나는 이제 가끔 꿈속을 빠져 나온다

나는 이제 가끔 세상을 보고 읽는다

나는 이제 가끔 사람을 만나 꿈꾼다 


꿈속에서 보았던 세상이 참 아름답다

꿈속에서 만났던 사람이 참 아름답다

꿈속에서 살았던 세월이 참 아름답다 


꿈속에서 보았던 세상을 옮겨 심는다

꿈속에서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

꿈속에서 살았던 세월을 거꾸로 산다 


집에서 기르던 개 한 마리가 주인을 물고

어느 이상한 나라의 왕으로 등극을 하니

세상의 모든 개들이 몰려와 물고 뜯는다


내가 이어도공화국 상머슴이 되어 바라보니

때죽나무는 지상을 향하여 하얀 종을 울리고

산딸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하얀 종을 울린다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맞추어 눈을 뜨고 보니 

꿈과 삶과 죽음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있다

나무와 함께 나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https://youtu.be/ZwYXb8Zj0Po?si=6_dfYc9-7u92gAUE



나의 시론 /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시와 시론


   

나는 요즘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고 있다. 윤동주 시인과 깊이 대화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아직도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그 우물 속에서 막힌 물길을 다시 뚫고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아프신 아버지 대신 나가서 울력을 하곤 했다. 장마에 떠내려간 징검돌을 제자리로 옮겨서 징검다리를 다시 놓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우물 청소도 정기적으로 울력으로 했었다.   

  

상수도 시설이 없었던 시절에는 공동우물이 참으로 소중했다. 지붕도 튼튼하게 잘 만들어 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해마다 깊은 우물 속 청소를 하였다. 울력 나온 사람들 중에서 언제나 내가 가장 어렸다. 그래서 내가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평소에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뜰 때에는 그냥 맨손으로 두레박줄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공동우물 대청소를 할 때에는 우물집 대들보에 도르래를 설치하고 큰 양동이를 매달아서 빠른 속도로 물을 퍼냈다. 우물 바닥이 보이면 가장 어린 내가 그 양동이를 타고 내려갔다. 혹시 막혀있는 물길이 있으면 다시 뚫어주고 이끼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낙엽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쌓인 뻘도 걷어내고 나는 다시 양동이를 타고 올라왔다. 양동이를 탄다고 썼지만 사실은 양동이를 매단 밧줄을 붙잡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검불 같은 시가 많아지고 따개비 같은 시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좀 더 의미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좀 더 치열하고 좀 더 생명력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고민하는 요즘이다. 그리하여 나는 의미 있는 시인들을 처음부터 다시 깊이 만나고 있다. 올드포엠, 윤동주 시인부터 만나고 있는데 모던포엠에서 생각지도 못한 초대장이 왔다. 올드와 모던의 만남이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을 잘 모른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 발행인 전형철 선생님을 잘 모른다. 자신을 시 비렁뱅이로 자청하며 돈수백배 하시는 공손함을 나도 배운다. 그리하여 나도 따라서 돈수백배하며 모던포엠 가족들과 구독자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올린다. 아름다운 인연이 되기를 꿈꾸며 진심을 다하여 절을 올린다.


나는 윤동주 시인에게 처음부터 다시 먼저 배운다. 삶의 진정성과 시의 진정성을 배운다. 시대의 고뇌와 개인적 번민을 통일시키는 정신을 배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능력을 배운다. 특정한 사회와 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할 수 있는 정체성을 배운다. 개인적 체험을 넘어, 깊은 통찰력으로 그것을 변용하고 조직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배운다. 그리하여 시대의 아픔을 자기화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를 형상화하여 지고지순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끝없이 성장하는 인간성을 배운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무엇일까? 그리하여 나는 근본부터 다시 생각한다. 뿌리부터 다시 살핀다. 하나회보다 더 무서운 검찰조직이 무성하다. 통일조국을 이루지 못한 해방정국부터 다시 살핀다. 정방폭포가 나를 부른다.  


나는 최인훈 선생님과 오규원 선생님께 문학을 배웠다. 최인훈 선생님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를 배웠고 오규원 선생님께 "진정성"을 배웠다. 그리하여 나의 평생 화두는 "진정성"이 되었고 최인훈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 문학의 방법론이 되었다.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시론이 하나씩 추가되는 셈이다. 자기 복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거듭나야만 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론을 개발하여 자신이 쓰는 시에 끊임없이 새롭게 적용시켜야만 한다. 시론은 어느 하나에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 시의 주제와 형식에 따라서 다양한 시론을 적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비교적 다양하고 많은 시론을 배웠고 또한 적용하려고 한다. 주제와 양식에 따라서 다양하게 옷을 입힐 필요도 있을 것이다. 요즘 활발하게 발표되는 디카시에도 관심이 많고 모덤포엠에서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큐알코드 영상시에도 관심이 많다. 이번 초대석에도 디카시 한 편과 큐알코드 영상시 한 편을 포함시키려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 시와 시론도 함께 변해야만 한다. 멀티 디지털 시대이므로 멀티포엠으로 가는 길은 더욱 자명할 것이다.


나의 시론을 쓰려고 하니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오규원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시창작은 우리들이 써서 제출한 시를 책으로 만들어서 합평을 하면서 배웠고 이론은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을 교재로 활용하여 다양하게 배웠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런 시론을 쓰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시 창작자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으며 또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간단하게 말하려고 한다. 나의 체질에 맞는 시는 어떤 시이며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어떤 시인지 말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시론은 시인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모던포엠 가족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이므로 이번에는 우선 나를 간단하게 소개할 작정이다) 

 

나는 언제나 시를 생각한다. 시인에게 시는 삶이다. 시인에게 시는 꿈인 동시에 삶이다. 나는 언제나 시인이 되기 위하여 시를 찾고 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시를 살고 있다. 나는 언제나 ‘詩’라는 글자를 생각한다. ‘詩’라는 글자는 재미가 있다. ‘詩’라는 글자 속에는 입과 발과 손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니까 시는 입으로도 쓰고 발로도 쓰고 손으로도 쓸 수 있다. 나는 그중에서 발로 쓰는 시가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삶으로 쓰는 시가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가슴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땀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눈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네이버에서 가져온 한자 구성 원리 이미지입니다.

詩라는 글자는 ‘시’나 ‘시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詩라는 글자는 言(말씀 언) 자와 寺(절 사)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寺자는 ‘절’이나 ‘사찰’을 뜻하는 글자다. ‘시’는 글로 남기지만 말로 읊조리기도 했으니 言자가 의미 요소로 쓰였다. 사찰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불경을 읽곤 한다. 이때는 운율에 맞춰 불경을 읽는데, 詩자에 쓰인 寺자는 그러한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詩자는 사찰(寺)에서 불경을 읊는 소리(言)를 ‘시’에 비유해 만들어진 글자로 해석된다.


나도 시를 쓰기 시작한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는 산사에서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산사의 종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때 시를 찾아서 산사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절 사(寺)에 말씀 언(言)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시(詩)이므로 시는 산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범종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운판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법고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어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탁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죽비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염불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신이 자연에 숨겨놓은 말씀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빛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별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달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바람이 시가 아닐까, 바다가 시가 아닐까, 강이 시가 아닐까, 여울물 소리가 시가 아닐까, 나무가, 풀이, 꽃이, 가시가, 개구리가, 개구리밥이, 여치가, 버들치가, 은어가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조금만 눈을 떠봐도 세상에는 보석 같은 신의 말씀들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 봐도 세상에는 여울물소리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뜨고 다시 보면 세상에는 온통 시 투성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드디어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찾았고 꿈결 같은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며, 시는 아이들의 고요한 숨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시는 결국 그 생명을 낳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이제 시는 생명이다. 나에게 이제 시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낳아 길러주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록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랑을 도와서 고귀한 생명을 함께 낳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에게도 나의 대표작이 있다. 전생에 낳은 두 아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생명력이 강한 나의 대표작이다. 나는 어떤 시인들보다도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존경하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비록 내가 직접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가질 수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인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나에게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이 있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가 있다. 아마도, 광주에 있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신 것 같다.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만 같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하다. 자식인 나는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부모님께 유일하게 받은 유산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도록 눈물의 왕으로 살았다. 이어도에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며 이어도로 살았다.   


나는 사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다시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서 함께 길을 찾아 나선다. 나의 <세상 읽기와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는 이렇게 모던포엠 가족들과 구독자님들께 먼저 인사를 올리고 함께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서 너무나 큰 영광이다.


* 한정된 지면관계상 여기서 줄이지만, 관련 내용의 글을 더 읽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큐알코드를 스캔하시면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삶과 나의 시와 나의 시론>을 이어서 계속 읽을 수 있습니다.

모던포엠 초대석 / 배진성 (brunch.co.kr)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삶과 나의 시와 나의 시론



나의 운명은 나의 심장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가슴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가난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건강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문학이 결정했다.   

  

째깍째깍째깍, 나의 가슴속에서 시계 소리가 들린다. 쿵쿵쿵, 나의 심장 속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슥삭슥삭슥삭 반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2017년 12월 22일,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에 나의 심장은 멈추어 대대적인 수술을 받았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심근증’이었다. 1990년 6월 8일에도 내 가슴은 열리고, 나의 심장은 멈추어서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란 병명으로 수술을 받았으니, 나의 심장은 이렇게 두 번을 죽고 또다시 세 번째로 살아났다.    

 

나의 심장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이다.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병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니까 내가 아마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으면 나의 심장병은 태어나면서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그것도 지질히 못 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심장병의 경우에는 대부분 청진기만 대어 봐도 이상 유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아무도 모르게 나 홀로 알았다.   

   

나는 심장 전문가는 아니지만 50년 넘게 심장병과 함께 살다 보니 심장에 대한 각별한 지식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의학계에서는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심장질환에 대한 정의를 최근에 내린 듯하다. 내가 1차 수술을 받을 당시에는 ‘비후성심근증’ 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대동맥판막하협착증’ 이라고만 하였다. “대동맥 판막 아래쪽에 선천적으로 혹이 있어서, 좌심실에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출구가 좁아져 있다. 그래서 온몸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적어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유발하고 있으므로 그 혹을 떼어내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심장수술을 받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는 ‘비후성심근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그 원인과 증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심장 돌연사의 대부분은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으로 돌연사하는 장면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사랑하면 죽는 병으로 알려지게 되어서 각별한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함께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들의 몸이 피를 많이 필요로 하는데, 온몸으로 나가는 출구는 좁아져있고 심장은 더욱 힘차고 부지런히 뛰어야만 하는데, 병든 심장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사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후성심근증’ 환자들은 언제라도 돌연사를 당할 수 있고 갑자기 복상사를 당할 수 있으므로 과로뿐만 아니라 과도한 사랑 또한 자제해야만 한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이라도 무리하지 않고 늘 조심해야만 한다. 그야말로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병이라고 한다.     

 

* 비후성심근증

정의 ― 좌심실 비후를 유발할만한 대동맥판막 협착증이나 고혈압과 같은 다른 증세 없이 좌심실 벽이 두꺼워지는 심장 질환이다.  ……, 

원인 ― 비후성심근증은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된다. 11개 근절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비후성심근증의 발생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증상 ― 좌심실의 수축 기능이 유지되면서 심부전의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운동 시 호흡 곤란, 피로감,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 호흡, 발작성 야간성 호흡 곤란 등이 특징적인 증상이다. 협심증과 유사한 특징적인 흉통이 동반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좌심실의 미세혈관 이상에 의한 허혈 때문으로 생각된다. 실신이나 어지럼증, 두근거림 등의 증상이 부정맥에 의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장 돌연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심부전 증상은 주로 좌심실의 이완 기능 장애에 의한 것이므로 좌심실 유출로의 폐색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 사이에 증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앞에서 인용한 의학정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의 직접 당사자인 나로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송곳이거나 칼끝으로 다가온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게질을 하였다. 물론 꼴 베기와 나무하기는 그전부터 하였다. 내가 지게질을 시작하면서 짝사랑도 시작했다. 나는 남몰래 선생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짝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때 여수 오동도 앞바다에서 돌아가셨다. 오동도 앞바다 붉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사랑의 행복이 아니라 이별의 아픔으로 끝장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진똘이 놀이도, 나이 먹기 놀이도 잘하지 못했다. 조금만 달려도 왼쪽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아파서 잘 달릴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내 몸이 허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몸을 튼튼하게 하려고 밤이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남몰래 달리기 연습을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말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나는 내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참 바보 멍청이였다.     


나는 체육 책에서 읽었다. 나처럼 왼쪽 가슴이 아프면 심장병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체육 책에서 읽었다. 나는 그때 나의 예금통장이 따로 있었다. 누나와 형님들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도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꼭 내 힘으로 중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리를 기르고 토끼를 기르고 겨울이면 산에 가서 산토끼도 잡고 꿩도 잡아서 팔았다.     


나는 나의 통장에서 돈을 찾아서 곡성 읍내 병원에 남몰래 혼자 찾아갔다. 늙은 의사 선생님께서 내 왼쪽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보시더니 바로 심장병이라고 말씀하셨다. 심장 뛰는 소리만 들어봐도 잡음이 많고 심장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틀림없이 선천성 심장병이라고 단언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광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온몸이 축 처지고 말았다.     


나는 며칠 후에 또다시 남몰래 광주까지 가서 검사를 받았다. 선천성 심장 판막증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하셨다. 심장 판막증은 무조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엄청 비싸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가난이 나의 입을 스스로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나는 언제나 이 부분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나와서 앞을 가린다. 지금도 눈물이 주르륵 나와서 나의 눈물을 이렇게 괄호 안에 삽입하고 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흑백텔레비전을 사 오셨다. 그 당시에는 수사반장과 수사본부, 그리고 전우와 타잔이 인기였다. 그런데 나의 눈에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이 너무 자주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님께서 어린이 심장재단을 만들어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을 외국으로 데려가서 심장수술을 시켜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화면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화면을 볼 때마다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 홀로 먼 들판으로 뛰어나가 홀로 펑펑 울었다. 그러면 나를 내려다보던 별들도 눈가에 눈물이 함께 맺혔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의술이 발전하지 못해서 심장수술 성공률도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서 수술비용이 엄청 비싸다고 하였다. 집안에 심장병 환자 하나 있으면 집안이 망할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홀로 결심했다.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우리 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아파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까? 어쩌면 심장이 아픈 나보다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안타까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더 좋겠다. 나 혼자 남몰래 아프다가 홀로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은 그래도 나를 잊고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결심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심장이 아픈 것보다 오히려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다. 하지만 내 몸이 자라면서 내 몸은 더 많은 피를 요구했고 나의 병든 심장은 더욱 힘들어했다. 나는 계단이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지 못하고 계단 중간에서 쪼그려 앉아 쉬어야만 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쪼그려 앉아 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장병 환자일 확률이 높다. 심장병 환자들은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 호흡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수술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꼭 고등학교는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라며 원서까지 직접 써 주셨다. 학비뿐만 아니라 기숙사비도 모두 무료이고, 옷이며 신발까지 모두 무료인 학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학 한, 서울에 있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는 나의 삶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 당시 한국전력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전기공고를 비롯하여 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철도공고 그리고 구미전자공고 등이 있었다.     


나의 서울 생활은 그렇게 강남에서 시작되었다. 주위가 온통 배 밭이었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마아파트에서 걸어가면 중간에 일본인학교 딱 하나만 있었다. 학교 뒤에는 대모산이 있었고 앞에는 구룡 마을과 개울이 있었다. 배 밭 주위에는 작은 시골마을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우리 학교 강당으로 대피해 와서 며칠씩 지내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실습 위주의 공업학교 생활보다 오히려 기숙사 생활이 더 힘들었다. 완전히 군대식이었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도 무섭고 선배들이 무서웠다. 바로 위층에는 1년 선배들이 있었는데 난방용 스팀라인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면 우리들은 언제라도 바로 뛰어올라가야만 했다. 선배는 그야말로 하늘이었다. 선배는 타오르는 태양이었고 후배는 꺼져가는 촛불이었다. 커다란 돌에 ‘면벽삼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우리는 3년 동안 “나 하나는 수도의 전부다”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 특히, 매일 밤마다 있었던 저녁 점호 시간이 가장 긴장되고 힘이 들었다. 모기가 물어도 움직일 수 없었고 등이 가려워도 긁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먼지 하나라도 발각될까 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저녁 점호를 무사히 받기 위해서 방 청소를 꼼꼼하게 하고 사물함 정리를 아무리 잘해도 중대장과 대대장들은 꼭 하나씩 지적을 하였다. 방문 바로 옆, 벽을 등지고 복도에 줄을 서 있던 우리들은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특히 사물함의 이불뿐만 아니라 런닝과 팬티 그리고 양말까지 모두 사각으로 각이 맞지 않으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지적을 당하고 기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은 아예 사각으로 만들어 꿰매서 점호 때마다 사물함에 놓고 실제로 입거나 신는 속옷과 양말은 가방 속에 숨겨놓곤 하였다.      


우리들은 또한 밤낮으로 자주 운동장으로 불려 나갔다. 자정에 운동장에 모여 운동장 흙바닥에서 굴러야만 했다. 우리 전교생은 새벽마다 운동장에 모여 대치동에서 오신 태권도 사범의 구령 소리에 맞추어 새벽하늘이 놀라 깨어나도록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태권도를 해야만 했다. 태권도를 마치고 대치동까지 뛰어서 다녀오기도 하였다. 새벽 운동이 싫어서 캐비닛에 숨어 있다가 사감 선생님께 걸려 벌점과 함께 심하게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나의 병든 몸은 그런 태권도와 구보가 너무 벅찼다. 곧 죽을 갓만 같았다.     


거기가 바로 서울 강남의 개포동이었는데 우리들은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 파일을 쿵쿵쿵 박기 시작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포동이 빠르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유명한 고등학교들이 이사 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개들도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 동네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꿈이 바뀌었다. 고향을 떠나니 고향이 더욱 그리웠다. 나라를 떠나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더니 고향을 떠나니 지지리도 못 살고 도망치고 싶었던 고향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교과서 외에는 잘 읽을 수 없었던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 아홉 시 점호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소등하고 강제로 잠을 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몰래 방과 복도를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별이 빛나는 밤마다 나는 그렇게 옥상에서 달빛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달빛과 별빛에 젖어 시인의 꿈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더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의 꿈은 재벌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시야가 좀 넓어지고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니 재벌보다는 시인이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재벌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결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재벌이 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아예 나의 꿈을 바꾸고 말았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꿈을 바꾸었다. 그리고 또한 나의 꿈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밤새 코피를 흘린 일이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기숙사 한 방에 여섯 명씩 함께 살았다. 그렇게 열 개의 방에 60명의 한 반이 살았고 한 과는 두 개의 반이었다. 그리고 다섯 개 과가 있었다. 그런 기숙사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초저녁부터 코피가 나오기 시작해서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베개와 이불이 다 젖도록 많은 코피를 흘렸다. 기숙사와 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양호실은 도서관 옆에 있었다. 낮에는 양호실에 간호사가 있었지만 밤에는 양호실 담당 학생들만 있었다. 그 학생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래서 3학년 형이 밤새 나를 간호해 주셨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함께 지내고 나서 나는 그 형님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그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 형님은 유행성출혈열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죽음을 계기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 시인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나는 몇몇 친구들을 모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긋니’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시집을 읽고 인문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일장에도 나갔다. 우리들의 모토는 하나였다. “공돌이도 시를 쓸 수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공돌이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시를 모아 동인지도 만들었다. 동인 중에 글씨를 잘 쓰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우리들의 시를 백지에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대학가 복사기 있는 집에 가서 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고에서 공돌이가 되어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문학 병은 그렇게 더욱 깊어졌다. 나는 나의 심장병을 잊을 정도로 깊숙이 문학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다. 심장병 대신 문학병 환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원로시인’이었다. 내가 좀 노티 나게 시를 쓴다고 하여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별명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자연과 함께 자연인으로 살고 싶으니까 차라리 ‘원시인’이라고 바꿔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글자 하나를 지우고 원시인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시(詩)는 절(寺)에서 하는 말씀(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절로 들어갔다. 해인사로 갔다. 해인사에서 참선과 절을 배웠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인사 위에 있는 성철스님이 계신다는 백련암 가는 길이었다. 해인사를 막 빠져나와 산을 오르는데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곳은 스님은 스님이되 스님 같지 않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자포자기를 한 스님들 같았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같았다. 내 눈에는 초라한 양로원 같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큰스님이 되지 못한 스님들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 스님들처럼 먼 훗날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해인사를 뛰쳐나올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나의 병든 몸으로는 수행이 어려울 것만 같아서, 참선을 할 때에도 그렇고 108배를 할 때에도 너무 많이 숨이 차서 이미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 길로 하산하여 부천에 있는 어느 학생회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그런 복지회가 많이 있었다. 학교는 가고 싶은데 돈이 없는 아이들을 모아 앵벌이를 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주로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날짜가 지나버린 주간지를 파는 일을 하였다. 그때에는 서울역에서 입장권을 팔았다. 가족이나 친척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입장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입장권으로 기차에까지 올라탔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동안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그때는 홍익회 직원들이 가장 무서웠다. 그 당시 기차에는 홍익회 직원들이 언제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수레를 밀고 다니며 계란도 팔고 김밥도 팔고 음료수도 팔고 주간지도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불법적으로 몰래 장사를 하는 고학생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 주간의 정식 새 주간지를 팔았고 나는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앵벌이 꾼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홍익회 직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홍익회 직원에게 잡혀 실컷 혼나고 수원역에 내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유난히 슬프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은 주간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학생회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는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당벌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헌책방에서 <문예중앙>을 읽었다. 이능표 시인과 이창기 시인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신인상을 받은 작품이 실려 있었다. 시들이 참 좋았다. 나도 그 진짜 시인들처럼 진짜 시를 잘 쓰고 싶었다. 약력을 보니 두 시인 모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출신이었다. 나도 그 학교를 나오면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용기를 내어 그 학교로 찾아갔다. 문예창작과 교수실에 최인훈 교수님과 오규원 교수님이 계셨다. 나는 꼭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학력고사 시험을 보고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꼭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소설은 쓰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소설은 거짓말이라서 쓰고 싶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대답을 하였다.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1986년에 서울 남산에 있는 서울예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도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그 남산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하루 24시간을 온통 시만 생각하고 시만 썼던 시절이었다. 물론 최인훈 교수님과 최창학 교수님의 소설 수업시간에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윤대성 교수님의 희곡 수업 시간 또한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문학과지성사 사장님이셨던 김병익 선생님의 수업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시를, 2년 동안 4년 치의 수업을 들었고 천 편도 넘는 시를 썼다.     


1학년 때에는 이근배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다른 반 수업인 최하림 교수님 수업을 도강하고 2학년 수업시간에 들어가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도강하는 줄 아시면서 너그럽게 눈감아 주셨다. 그리고 2학년 때에는 당연히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들었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1학년 교실에 들어가 또다시 시 수업을 도강하였다. 그리고 하숙집에 돌아와서도 책을 읽거나 시 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두꺼운 개인 시집을 복사하여 만들었고 많은 상을 받았지만 특히 오규원 교수님께서 직접 뽑아주신 예장 문학상에 당선되었을 때 가장 기뻤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도 있었다. 나는 2학년 2학기 수업을 듣지 못했다.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전력 공사로부터 최후통첩을 받고 잠시 고민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한전 장학생으로 나왔는데 졸업 후에 한전에 입사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깊은 문학 병에 걸려 한전 입사를 포기하고 시인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가을까지 한전에 입사하지 않으면 입사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과 의논한 결과 수업을 듣지 않아도 리포트를 제출하면 졸업시켜 줄 테니 한전에 입사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도강한 것들 합치면 수업일수가 넘칠 정도이니 그렇게 하라고 배려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1987년 가을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한전에 입사하게 되었다. 한전 연수원에서도 나는 발전소 교육보다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를 쓰고 시를 쓰느라 바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오직 시만 썼던 시간들이 아쉬웠다. 대학생활이란 어쩌면 학교 수업도 중요하지만 같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한 편으로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그 친구들 집에 함께 놀러 갔던 기억이 참 오래도록 남아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 전라도 장수면의 면장 아들이었던 홍이표 집에 갔을 때도 좋았고, 소록도를 지나 어느 섬에 살았던 한경은 친구 집에서의 하룻밤도 참으로 좋았다. 나는 그 섬에 들어가면서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타 보았다. 자동차도 함께 싣고 섬으로 들어가는 도항선을 탔는데, 그림으로만 보았던 배들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배가 거꾸로 가는 줄 알았다. 모든 배들은 언제나 앞이 뾰족한 줄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된 「길이 있는 풍경」은 바로 그때 쓴 작품이었다. 홍이표네 집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 집 바로 곁에 있었던 고추밭에서 썼다. 그리고 그날 아침부터 덕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올라가서 보았던 덕유산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심장이 아파서 높은 산을 오르지 못했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무슨 용기가 생겨서 덕유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아래쪽에서 양 떼 같은 구름들이 산 정상을 향해 기어서 올라오는 모습들에 나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서울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나는 첫 발령을 호남화력발전소로 받았다. 여수에 있는 발전소였다. 아니, 그 당시에는 여천이었고 여천공단에 있었다. 나는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들고 전라선 종착역에 내렸다. 겨울 새벽이었다. 택시를 타고 발전소에 가자고 했는데 내리고 보니 여수화력발전소 정문이었다. 여수에 발전소가 두 개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나의 잘못인지 택시 기사의 잘못인지 기억에 없지만 하여튼 나는 첫날부터 헤매고 말았다. 나는 여수화력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 퇴근버스를 타고 사택으로 갔다. 그 당시 발전소 사택은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그리고 한전 여수지사와 지점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한전에서 발전소가 분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한 식구였다.     


나는 그렇게 여수에서의 생활을 서툴게 시작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수에는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이렇게 두 개의 발전소가 있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여수가 아니라 여천이었다. 그리고 사택은 쌍봉동 한 곳에서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발전소가 한전에서 따로 분리되기 전이어서 발전소뿐만 아니라 지점과 지사 사람들도 같은 사택을 함께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지사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월급은 용돈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월급 외로 들어오는 돈이 많아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다.     


다음날부터 나는 호남화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신입사원들은 처음에 교대근무에 투입되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오히려 교대근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야만 정상적인 일근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교대근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근무를 한다는 것은 생체리듬에 맞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야간근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표를 내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왕에 입사를 했으니 딱 3년만 다니고 그만 두기로 작정을 했다. 한 3년 정도 다니면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심장병과 이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장수술이 실패를 한다면 나의 운명은 그렇게 끝날 것이지만 만약 수술이 성공한다면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갈 작정이었다.     


호남화력에서 조금 근무를 하다가 또다시 삼천포화력 연수원에서 발전소 실무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지금은 태안화력 발전소에 발전연수원이 있지만 ― 얼마 전에 숨진 고(故) 김용균(25)씨가 일하던 바로 그 발전소 ― 그 당시에는 삼천포화력에 발전 연수원이 있었다. 발전연수원은 아마도 얼마 있으면 대전으로 한 번 더 이사를 할 모양이다. 나는 삼천포에서 한 3개월 정도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짧은 삼천포 생활을 마치고 다시 여수로 돌아가 본격적인 여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수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바람이었다. 한 시도 가만히 앉아서 쉬어보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발로 쓰는 시가 진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싸돌아다녔다. 바람처럼 싸돌아다니는 날파람둥이였다. 나는 여천시 쌍봉동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여천시를 벗어나 주로 여수시 쪽을 돌아다녔다. 물론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여천 쪽도 많이 돌아다녔다. 한하운 시인처럼 문둥병(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산다는 신풍애양원을 비롯하여 사화복지법인 시설이었던 동백원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소호동 바닷가를 비롯하여 소라면 바닷가를 많이 걸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마을과 날마다 찾아가던 바닷가의 언덕 또한 나의 산책코스였다. 


회사에 가지 않고 쉬는 날에는 주로 여수시로 나갔다.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에는 길이 좀 단순했다. 여천시에서 여수시에 가려면 윗길과 아랫길이 있었다. 나는 주로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왔다. 버스 노선도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오는 노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주로 걸어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걸어 다니곤 하였다. 숨이 차서 한꺼번에 걸을 수 없으니 자꾸만 쉬면서 다녀야만 하였다. 내가 주로 다니는 곳은 여수항과 서시장 그리고 여수역과 자산공원이었다. 그리고 여수 어항단지와 돌산대교 등도 부지런히 싸돌아다녔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밤낮없이 여수항 부근에 나타나서 자꾸만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니는 바람에 나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파출소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철저히 미쳐 있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길에서 시를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홀로 쓴 시들을 모아 월간지와 계간지에 동시에 투고를 하였다. 월간지에서 먼저 발표하였다. 나는 그렇게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너무 몰랐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의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월간지 신인상 발표가 있은 뒤 계간지에서도 연락이 왔다. 계간지에도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나 이미 월간지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선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우리나라 문단 상황에 대하여 지금만큼만 알았다면 나는 아마 월간지가 아니고 계간지 신인상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시인만 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인만 되면 원고 청탁이 줄을 이을 줄로 알고 있었다. 시인은 그저 시만 쓰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문단활동이나 인간관계가 따로 있지 않아도 그저 시인만 되면 무조건 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처럼 지방에서 홀로 시만 쓰는 시인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시 쓰는 방법만 알았지 진짜 시인이 되는 길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문학사상에서는 상패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바뀌어서 상패도 주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 당시에는 상패도 없고 시상식도 따로 없었다. 그래도 문학사상 신인상은 문단에서 꽤 전통도 있고 권위가 있는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당시에 그런 것들에 대하여 너무 모른 상태에서 그저 실망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신인상 정도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발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당돌한 생각이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문단을 너무 몰랐고 몰라서 오히려 용감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정리한 시집 원고를 가방에 넣고 문학사상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문단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문학사상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는 그냥 나왔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시집 이야기는 한 마디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시집 이야기를 꺼냈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웃음이 나올 일인가. 신인상 당선되고 1년도 안된 놈이 불쑥 찾아와서 시집을 내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닌가.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며 어깨가 축 처지고 있었다.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타자를 쳐서 나름대로 시집을 만들었는데 시집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 모습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어서 타자기로 원고 정리를 하였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다른 일로 왔다가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기운이 빠져서 털레털레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 가판대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문에 신춘문예 응모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1부 사서 여수로 돌아왔다. 어차피 버려질 원고였는데 차라리 신춘문예에 응모라도 해보자. 그래서 나는 시집 원고 표지만 바꾸어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발표한 몇 편의 시들은 당연히 빼고 보냈다.      


아마도 신춘문예 사상 이런 응모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심사평도 이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해 동아일보에 응모했던 다른 분들께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렇듯 생뚱맞게 응모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좋은 시인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분들의 심사평 한 줄 없었으니 내가 많이 야속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심사평 ― 두 심사위원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배진성 씨를 당선 시인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는 두 권 정도의 시집이 될 만한 작품을 투고하였다. 오히려 어려움은 이 많은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결국 ‘길이 있는 풍경’과 ‘밤하늘은 반란이다’ 두 편을 골랐지만, 이 선정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배진성 씨의 작품이, 많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시는 오늘의 범람하고 몽롱하고 막연한 서정시나 비분강개의 시의 언어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탄탄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 ―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서정이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에도 흐릿함이 있고 탄탄함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수가 많은 만큼 또 고른 수준의 것인 만큼 그의 시가 믿을 만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수준의 한계가 이미 다 드러나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수준이 가장 바람직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오늘의 수다스러운 시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상과 표현의 압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심사위원 / 김우창, 신경림     


나는 이렇게 우연히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그 덕분에 첫 시집을 빨리 낼 수 있게 되었다. 신춘문예 심사를 맡으셨던 김우창 교수님께서 내가 응모했던 원고를 민음사로 넘기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김우창 교수님께서 민음사와 많은 관련이 있었던 탓에 그렇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음사와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글이나 시집은 따로 타고난 운명이 있는 듯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우연히 좋은 인연이 많이 찾아왔지만 나는 그 좋은 인연들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다.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시를 쓰려면 먼저 대학교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수가 되어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좋은 제자들도 많이 길러내야만 비로소 시인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가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출판시장과 문단풍토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꼭 좋은 시인은 아니지만 확실히 좋은 조건에서 시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회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꼭 대학 교수가 아니어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고 또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발전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학교수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교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방송대학에 편입을 하였다. 우선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 몸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병이 나를 가만 놔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망은 30살까지 버티는 것이었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서른 살까지만 살 수 있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몸은 도저히 서른 살까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몰래 쓰러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시집은 한 권 내었으니 덜 억울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남몰래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을 만큼 몸이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전남대학교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병원에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였다. 때마침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치료비도 많이 저렴해졌으며 또한 심장재단 덕분에 심장수술 성공률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드디어 심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고향 집에 들렀다. 고향 집에는 아버지께서 늘 아랫목에 누워계셨다. 젊은 시절 방앗간 천정에서 떨어진 이후로 후유증 때문에 언제나 아버지 등은 구들장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길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잘 아는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분께 돈을 드리며 내가 떠난 다음에 아버지께 개를 한 마리 잡아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출장을 가기 때문에 당분간 연락을 드리지 못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고 광주로 떠났다. 그렇게 나는 홀로 광주로 가서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심장판막 교체 수술을 하기 전에, 좀 더 간단한 시술을 먼저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나의 대동맥판막이 지금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먼저 풍선 확장시술을 한 번 시도해 보자고 하였다. 그 당시에 막 개발되어 시험 중인 시술법이었다. 우리 인간들의 대동맥은 심장에서 시작하여 양쪽 허벅지 안쪽으로 지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가장 굵은 대동맥이 바로 그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풍선 확장시술은 카테터라고 하는 관을 환자의 혈관 안에 삽입하여 주로 좁아진 혈관을 넓혀주는 시술인데, 이 시술 방법을 응용하여 심장 판막 확장에까지 이용하는 시술법이었다. 


나의 경우는 왼쪽 사타구니 쪽에 구멍을 내어 대동맥을 따라 거꾸로 관을 집어넣어서 대동맥판막까지 접근하게 한다. 그 관 안에는 작은 풍선이 달려 있다. 대동맥판막은 세 개의 조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조각들이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열릴 때에 세 조각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서 덜 열리기 때문에, 붙어 있는 날개 안쪽을 강제로 더 찢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대동맥판막 쪽에 풍선을 위치하게 한 다음, 그 풍선을 순간적으로 확 불어주면 자연스럽게 세 조각의 날개가 잘 분리되어 충분히 열어줄 수 있다는 원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 심장병의 첫 번째 오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오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 나에게 벌어진 일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선 확장 시술을 받기 전날 밤에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이 다른 가족들에게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시술받기 전날 밤에 주치의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풍선확장시술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광주에 사는 누나에게만 조심히 전화를 하였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에 관한 사실들을 누나에게만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시술 도중에 잘못되면 병원 측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자 동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아 달라는 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곧 누나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시골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도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혹시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것으로 알고 달려오셨던 것이다. 서울에 출장 가겠다고 떠난 자식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0년 넘게 홀로 앓아오던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나는 큰 충격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시술 동의를 받고 다음날 무사히 풍선확장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술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오진이었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며칠 후에 개복수술을 하여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하기로 하고 수술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여수의 직장 동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와서 혈액검사를 하였다. 수술하는 날 직접 와서 피를 뽑아주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미리 뽑아놓은 피보다 그날 바로 뽑아서 수혈하면 더욱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찾아온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다가 나보다 먼저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나와 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그런데 그 환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복실에서 그만 잘못되고 말았다. 마취가 풀리면서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만 인공호흡기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곁에서 당직의사나 간호사가 착 달라붙어서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만 자리를 잠시 비우고 말았다는 것이다. 환자 곁에 아무도 없는 사이에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인공호흡기가 빠졌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그만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그 환자의 가족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병원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고 말았다.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하는 바람에 병원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래서 수술을 담당했던 흉부외과 의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른 환자들의 수술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마침 그 병원에 먼 친척 되는 의사가 있었다. 그 의사 덕분에 나는 서울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곁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전대병원에서는 수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목숨을 허술한 그곳에 맡길 수 없었다.     


나중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약에 내가 그때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면 멀쩡한 대동맥판막을 떼어내고 인공판막으로 교체를 할 뻔했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병은 치료도 되지 않고 멀쩡한 대동맥판막만을 인공판막으로 바꿀 뻔하였다.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정밀검사를 다시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대동맥판막은 멀쩡한 상태였다. 대동맥판막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동맥판막 앞쪽에 혹이 하나 있어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혹이 있어서 출구가 좁아진 환자는 많지 않았고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 환자들 대부분이 판막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의 경우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진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많이 발견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비후성심근증’이라고 따로 정의를 내리고 치료법과 수술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대병원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나는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서울대학병원에 접수를 하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의 몸은 심각할 정도로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비밀이었던 나의 심장병이 가족들에게 들켜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나의 예상대로 가족들은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고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나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더욱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무작정 회사에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떼를 써서 응급실로 입원을 하였다. 그때는 이미 잘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를 수술할 의사 선생님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주 젊은 의사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그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훌륭한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아주 젊었지만 실력이 매우 좋은 분이셨다.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나는 우연히 그렇게 좋은 의사를 만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분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1990년 6월 8일에 1차 수술을 받았고 2017년 12월 22일에 2차 수술을 받았다. 2차 수술을 받을 때에도 우연히 한 번 찾아갔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수술날짜를 결정하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의 몸은 그만큼 위험한 상태였으나 나는 모르고 있다가 참으로 운이 좋게도 그분을 다시 만나 이렇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게 돌연사를 당할 뻔했었다. 그분은 나의 수술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야말로 그분은 그렇게 나의 하느님이 되셨다.     


서울대학병원에 처음 입원해서 나는 감기에 걸렸다. 감기에 걸리면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수술날짜가 뒤로 미루어졌다. 그 바람에 나는 더 많은 정밀검사를 할 수 있었다. 정밀검사 결과 심장판막증이 아니라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수술방법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원래는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할 예정이었으나 대동맥판막은 교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에 대동맥판막 아래쪽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것으로 완전히 수술방법이 바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심장 수술이었다. 아마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젊기도 하고 패기도 있고 실력도 있는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 수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좋은 의사를 만나서 판막을 교체하지 않고 심장 속에 있었던 혹 하나 떼어내는 수술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수술을 받고 나니 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쾌함이었고 가벼움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 환자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사람들의 몸 상태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좋았다. 심장병은 수술은 어렵지만 수술이 끝나고 나면 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신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수술을 받고 약 한 달 동안 입원을 하였다. 그리고 퇴원해서는 여수로 내려가지 못하고 인천에서 지냈다. 장거리여행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도 자주 가야 했고 또한 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큰형 집에서 두 달 정도 누워서 지냈다. 2차 수술 때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그런지 아니면 가슴을 봉합하는 재료가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개복한 부위를 봉합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새로 도입되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한결 쉬워졌음을 실감했다. 1차 수술 후에는 꼬박 석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는데 이번 2차 수술 후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를 번쩍번쩍 들어서 침대를 옮겨주기도 하고 바로 걸어 다녀도 좋다고 하셔서 나는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수술하고 일주일도 못되어 퇴원을 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비행기도 바로 탈 수 있다고 하여 제주도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술이 그만큼 발전한 것인지 그동안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인지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가 1차 심장 수술을 받을 당시에 큰 형은 인천 인하대학교 후문에 있는 새마을금고 2층에 살고 있었다. 형과 형수는 둘 다 직장에 나가고 나 혼자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아직 철이 덜 든 조카는 누워있는 나를 자꾸만 밟으려고 하여 마음 놓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6월 8일에 수술을 하였으니 그렇게 한 여름 3개월을 불안하게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심장병 수술에 성공하여 25년 만에 심장병과 첫 번째 이별을 하였다. 그런데 참 인생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심장병이 떠나고 나니 이번에는 간에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아니면 형 집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형과 내가 비슷한 시기에 간염으로 고생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내가 병원에서 옮겨왔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에게 더욱 미안하다. 나는 그 후에 간경화로 진행되었고 인터페론 주사를 맞는 등의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아 완치가 되었는데 형은 치료가 되지 않아 결국 간 이식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나는 또다시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을 하고 만 것이었다. (이번에는 일단 여기까지만 쓰고 다음에 이어서 쓸 작정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길, 그리고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0000 프로필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또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아 나선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함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0001 정리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부터 나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내가 언제 어디서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잘 떠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 늘 정리가 서툴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틈틈이 정리를 하려고 한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리를 잘해야만 한다. 영정 사진을 서둘러 찍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영정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나의 삶과 나의 꿈과 나의 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0002 함양 방짜징


함양 방짜징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자꾸만 징소리가 들린다. 수천 번의 두드림으로 만든다는 방짜징, 그 아픈  방짜징 소리가 해에서도 들리고 달에서도 들린다. 방정맞고 가벼운 꽹과리  소리가 아니라 깊고도 멀리 가는 방짜징 소리, 징소리가 들린다. 지리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한라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해의 가슴에서 빛의 징소리가 쏟아지더니, 오늘 밤에는 달도 보이지 않는데 달빛 징소리가 쏟아진다. 나의 몸과 마음이 함께 방짜징 소리를 달빛처럼 입는다. 


0003 꿈이냐 삶이냐 


요즘에 다시 꿈을 자주 꾼다

40년 가까이 떠나지 못하는

발전소에서 검은 기름을 흘려

온 세상이 붉게 타오르는 꿈


요즘에는 꿈도 연작으로 꾼다

내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꿈

꿈속에서는 왜 가능한지 모른다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드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강가의 바위들을

솔로 박박 이끼를 닦아내고 있다

그러니 강물이 콩물 되어 흐른다


두부가 너무 많아 처치 곤란하다

하였더니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콩물은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간다

바다로 가 파래 청각 미역 다시마

온갖 해초들 키워 목장을 만든다


넓은 초원 목장으로 소풍을 간다

언덕을 굴러가는 풀 더미들 사이

우리도 서로 끌어안고 굴러간다

하늘과 땅이 한 몸 되어 굴러간다


전화벨 소리가 꿈 밖으로 부른다

해운대 바닷가로 또 오라고 한다

이것 또한 꿈속의 꿈인가 삶인가


지리산의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함양군의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하늘에서 들리고 땅에서 들린다


코끼리 마늘이 피터팬 모자를 쓴다

팅커벨은 어디 가고 왜 혼자이더냐

다녀오는 동안 집 잘 지키고 있거라


0004 윤동주 시인과 함께 길을 떠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 드디어 별이 되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바로 눕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죽어서도 땅만 보고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도

이제는 그 아득한 길을 걸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 부처님과

서불선생과 설문대할망과 마고할미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윤동주 시인과 나는 함께

이어도 문을 열고 나와서 순례길에 나선다

설문대할망의 고향으로 간다

마고할미의 고향으로 간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으로 간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한라산으로 간다

지리산으로 간다 백두산으로 간다 북간도로 간다

다시 처음부터 세상을 깊이 읽으며

멀고도 긴 순례를 떠난다

30년도 넘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내 삶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제주도에서 온 영혼들이 함께 따라나선다

정방폭포에서 온 영혼들이 먼저 따라나선다


0005 누룩뱀과 뻐꾸기와 붉은머리오목눈이와 애벌레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열심히 둥지를 만든다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마른 풀잎을 물어온다

질긴 거미줄로 엮어서 튼튼한 둥지를 만든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푸른 알을 낳아 품는다

잠시 둥지를 비운 사이에 뻐꾸기가 탁란 한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푸른 알을 함께 품는다

뻐꾸기 새끼가 먼저 태어나 둥지를 차지한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뻐꾸기 새끼를 키운다

수없이 많은 애벌레들이 뻐꾸기 먹이가 된다

뻐꾸기 새끼는 등으로 알과 새끼를 밀어낸다

둥지 밖으로 떨어지는 알과 새끼가 불쌍하다


누룩뱀이 찾아와 뻐꾸기 새끼를 잡아먹는다

누룩뱀이 찾아와 알들도 모조리 삼켜버린다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어미의 눈이 붉어진다


사람은 누룩뱀을 잡고 뻐꾸기는 산에서 울고

연꽃은 꽃잎 떨어뜨리며 연밥의 종을 울린다


0006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읽는다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꿈속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보인다. 눈을 뜨니 방 벽에서도 눈이 보인다. 눈들이 보인다. 윤동주의 눈이 보이고 송몽규의 눈이 보이고 강처중의 눈이 보이고 정병규의 눈이 보인다. 벽에 서있는 나무판자에 눈동자가 많다. 옹이들이 죽으면 저렇게 벽의 눈이 되기도 한다. 아예 눈알이 빠져서 뻥 뚫린 구멍도 있다. 


오늘은 자꾸만 <자화상> 생각이 난다. 나의 자화상을 어떻게 그릴까.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제목은 처음에는 <외 딴 우물>이었다가 <우물 속의 자화상>이었다가 최종적으로 <자화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자화상은 최종적으로 어떤 자화상으로 남을 수 있을까. 나 자신도 나의 자화상이 궁금해진다. 나는 이렇게 다시 윤동주 시인을 읽는다. 아니,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東柱(동주)와 童舟(동주)와 童柱(동주)가 나를 읽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나서 함께 길을 찾는다.


0007 윤동주 시인의 거울을 보니


윤동주 시인의 거울을 보니 내가 보인다

송우혜 선생님의 <윤동주평전>을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려면 먼저 간도로 가야만 한다. 간도는 좀 특별한 곳이다. 간도를 한문으로는, 간도(間島)라고 쓰기도 하고 간도(墾島)라고 쓰기도 한다. 청나라는 병자호란 뒤, 간도를  봉금(封禁) 지역으로 정하고 조선 사람이든 청나라 사람이든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간도라는 지명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間]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여 땅을 새로 개간하였다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을 만나려면 사이섬으로 가야 한다. 개간한 섬으로 가야 한다.


"처음엔 두만강 위쪽 땅을 그냥 '간도'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라 하면서, 두만강 이북은 '북간도'로 구분해서 불렀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이 또한 특별한 곳이다. 명동촌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이 아니다. 1899년 2월 18일에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두만강변의 도시인 회령과 종성에 거주하던 네 명의 학자들 가문에 속한 22개 집안 식솔들로 이루어진 총 141명의 이민단이 그날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북간도 명동촌은 학자들 가문이 두만강을 건너 이국땅에 세운 개척마을이다. 윤동주 시인은 그런 특별한 마을에서 1917년 12월 30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나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0008 몸은 아래로 정신은 하늘로


윤동주 시인의 일생은
몸은 아래로 내려가고 정신은 하늘로 향했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의 명동소학교를 나와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진학했다.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그리고 1938년 4월 9일 드디어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또한 1942년 4월 2일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 경도의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편입학하였다. 다음 해 1943년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특별한 곳에서 태어나 평생 길을 찾다가 떠났다. 평생 공부를 하다가 길을 찾아 떠났다. 나는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태어났을까? 나는 전남 곡성군 삼기면에서 태어났다.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밤새 나를 찾아 헤매었다. 인터넷으로 주민등록표 초본을 열람하였다. 옛날에 내가 보았던 초본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간편하게 변했다. 초본에는 나의 출생지가 나와 있지 않았다. 나의 주소지 변동사항이 29번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1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957번지, 1975년 9월 23일 전입...., 나는 그 이전의 나의 행적을 찾고 싶었다. 1번의 주소지는 지금 내 고향집이 있는 주소지였다. 내 기억 속에는 그 고향집 징검다리 건너에 유년시절이 있었다.


0009 어머니의 기억과 아버지의 기억


나는 다시 제적초본을 열람하였다. 출생장소가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1099번지로 되어 있었다. 나의 기억과 달랐다. 나는 지금껏 징검다리 건너 월경리 외딴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살았던 월경리 2구, 행정리(행경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였다. 내 무의식적인 기억 속에는 방 벽이 기울어져 있고 방바닥도 수평이 아니고,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져서 방에 세숫대야를 놓고 밤새 빗물을 받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원등리 1099번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고일은 1968년 10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신고인은 아버지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왜 2년도 더 지나서 출생신고를 하셨을까. 그리고 왜 2월 28일로 출생신고를 하셨을까? 어머니께서는 늘 내가 2월 24일 아침 6시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태어나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제적초본에 기록된 나의 출생지와 나의 기억 속의 출생지를 비교하며 밤새 고향의 길들을 둘러보았다.   


0010 늦게 쓰는 일기


1966년 참꽃 불타는 2월 29일 새벽 두 시

그믐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눈썹이

떨어지고 닭도 울지 않았다 개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컴컴한 어둠을 향해

컹컹 짖었다 그리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 없는 아이로 태어나 누워만 있었다

송아지 울음소리가 걸어 나오는 물소리

가느다랗게 들리고 핑경 같은 별들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잠들지 못하는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별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태어났다

그 자리에 나의 탯줄과 함께 누워있는 어머니

무덤가 어린 쑥 잎에도 향기가 오르고

나는 어머니가 누운 만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숲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지상에

세상은 있었고 내가 태어나면서 같이 태어난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러한 아침으로

때 아닌 비가 내리고 담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0011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고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고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가고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되어 숲으로 살아간다


0012 도끼와 육철낫


시 한 편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 시인을 알아야 하고 그 시인이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만 한다. 시는 시인이 벗어놓은 옷이며 시대가 벗어놓은 허물이다. 시는 그 시인이 사용했던 도끼이며 그 시대가 사용했던 바늘이다. 시는 어둠을 쪼개주는 도끼이며 눈물주머니를 꿰매주는 바늘이다. 나는 오늘도 도끼를 갈고 있다. 아무리 찾아도 도낏자루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도끼를 숫돌에 갈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발라가며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고 있다. 시대의 돌담에 숫돌을 꽂아 넣고 조선낫을 갈 듯 도끼를 갈고 있다.


0013 좋은 시와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시와 글은 쓰는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그 결이 달라진다. 물론 그 시인의 사상과 의지와 세계관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쓰는 순간의 환경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 좋은 시인은 자신의 사상과 의지와 꿈이 잘 반영될 수 있도록 적합한 상황을 스스로 만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소극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시와 글을 쓸 수도 있지만 적극적인 시인들은 좋은 시와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때와 장소와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서 좋은 시나 좋은 글을 쓰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시와 글을 쓰기 위하여 스스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시와 나의 글을 쓰기 위하여 어떤 때와 어떤 장소와 어떤 상황을 만들어야만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결국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를 실천해야만 한다. 아니,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영혼이 자유로워야만 한다.


오늘은 어찌 보면 실질적인 임금피크 첫날이다. 앞으로 1년 동안 일주일에 3일 출근을 한다. 나는 일단 화수목 3일 출근하기로 하였다. 그 3일 동안은 화순에서 지낼 예정이다. 나머지 4일은 제주시에서 지낼 예정이다. 아침 7시쯤 아침을 먹고 서귀포시로 간다. 나의 제주 생활은 주로 서쪽에서 이루어진다. 제주시 서쪽 외도와 서귀포시 서쪽 화순에서 이루어진다. 제주도는 크게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누어지지만 문화적으로 생각하면 서쪽과 동쪽으로 나누어지는 경향이 많이 있는 듯하다. 나는 주로 평화로를 많이 이용하는 서쪽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평화로를 이용하여 한라산을 넘다 보면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날씨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장마철에는 그 차이가 많은데 주로 남쪽이 흐린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구름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나는 경우가 많은데 높은 한라산 봉우리에 걸려서 머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래서 제주시 서쪽이 내가 사는 서귀포시 서쪽 화순보다 맑은 날이 많은 듯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사는 화순은 장마철에 상대적으로 습기가 많아서 곰팡이도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구름이 한라산에 걸리는 경우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산방산에 걸리는 구름도 많은 것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열흘 이상 비워두었던 달문에 풀들이 많이 자랐다. 특히 이맘때 풀이 무섭게 투쟁적으로 잘 자라는데 길도 없어져버렸다. 오늘은 길이라도 풀을 뽑아야만 하겠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오후 네 시의 꽃이라는 분꽃이 피어나고 연꽃이 피어나고 목백일홍이 피어나고 자귀나무꽃이 피어나고 도라지꽃이 피어나고 붉은 칸나가 피어나고 범부채꽃이 피어나고 아가판서스가 피어나고 호박꽃이 피어나고 오이꽃이 피어나고....,


아, 내가 없는 사이에 복숭아들은 홀로 익어서 곤충과 벌레들의 잔치상이 되었구나. 특히 장수풍뎅이와 흰점박이꽃무지가 복숭아나무를 점령하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손을 타지 않은 복숭아도 있어서 나도 좀 맛을 볼 수 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복숭아 몇 개는 더 따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맙다. 나에게도 부드럽고 맛 좋은 복숭아를 먹을 수 있도록 남겨주어서 정말 고맙다. 오늘은 점심시간에 나가서 도서관에 들러 책도 빌려왔다.


0014 끊임없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기 성찰의 시인


제습기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물먹는 하마가 물방울을 빨아들여서 플라스틱 용기 가득 물을 채운다. 군용 반합 같은 물통 가득 물이 차오른다. 나는 아직도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서 저렇게 많은 물을 수집하는 원리를 잘 모른다. 세상에는 참 신기한 것들이 많다. 우리들이 호흡하는 공기 중에 저렇게 많은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참으로 신기하다.


내가 존경하는 권영민 교수님의 우리 시 깊이 읽기를 읽는다. 권영민 교수님께서 미국 버클리대학교 외국인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시들을 읽는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으로 여섯 편을 소개하고 있다. 쉽게 쓰여진 시, 길,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간 등이다. 내가 좋아하는 서시와 병원과 반딧불 등이 없어서 좀 아쉽기는 하지만 나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윤동주 시인의 모든 시와 모든 산문을 소개하고 싶다.


윤동주 시인  관련 책으로 가장 의미 있는 책은 아무래도 <사진판 자필 시고전집>과 <윤동주 평전>과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와 <정본 윤동주 전집>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는 시의 일부분들만 실어서 좀 아쉽다. 책이 좀 두꺼워지더라도 시의 전문을 실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혼자서 생각을 한다.


나는 이런 의미 있는 책들과 조금 결이 다른 윤동주 관련 책을 쓰고 싶다. 인터넷의 발전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정보의 홍수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나는 윤동주라는 거울 하나 들고 촛불 하나 들고 좀 더 의미 있는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 시인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수공업자일 수밖에 없으며 끝까지 홀로 갈 수밖에 없는 고독하고 외로운 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처럼 다정한 시인과 함께 동행할 수 있으면 그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고 높은 길이라도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카메라의 등장으로  구상화가 추상화로 발전하였듯이 우리들의 시와 소설 또한 좀 더 깊은 내면을 팀구구하기 위해서 더 깊고 아득한 내면 속으로 걸어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자명할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 인간들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바로 모기라고 사실을 알라야만 한다.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그렇게 약한 존재인 모기가 우리 인간들을 가장 많은 죽음 속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 밤에도 모기들이 많이 침투했다. 모기퇴치기의 푸른색 불빛이 엄지손톱으로 톡톡톡 이를 잡듯이 모기를 터트린다. 순간적으로 고압의 전기를 먹어버린 모기들이 기절을 하거나 타서 죽는다.


0015 아침에 풀을 뽑으며


오전 9시부터 비가 온다기에 6시부터 길을 점령한 풀을 뽑는다. 장마 때문에 뽑힌 풀들도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나의 죄책감도 덜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의 길을 차지해 버린 풀들과 아침부터 타협을 한다. 아니다. 내 입장에서 타협이라 말하고 싶지만 엄연히 일방적인 나의 폭력이다. 풀에게 길 밖에서 살아가라고 풀을 뽑아 길 밖으로 옮겨준다.


여뀌풀꽃 강아지풀 분꽃 사위질빵 닭의장풀 토끼풀 엉겅퀴 씀바귀 왕고들빼기 야생팥 환삼덩굴 그리고 청려장을 만드는 명아주풀과 원추리꽃까지 뽑아서 길 밖으로 옮겨준다. 아욱메풀도 앉은뱅이 풀들도 살짝 옮겨준다.


수국꽃도 시들고 코끼리마늘꽃도 시들고 나리꽃도 시들고 토란꽃도 시들고 방풍꽃도 시들고 장마철에도 이렇게 시드는 꽃들이 많다. 수국꽃이 다 시들면 장마도 물러날 것이다. 


9시쯤 비가 올 줄 알았는데 7시 30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를 맞으며 풀을 뽑는다.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풀을 뽑아서 길가로 옮겨놓는다. 최소한 며칠은 비가 올 것만 같다. 길 밖에서 뿌리를 잘 내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뽕잎과 호박잎과 깻잎과 왕고들빼기 잎을 따서 아침을 싸 먹는다. 온몸이 투명해질 때까지 뽕잎을 먹는다. 누애처럼 뽕잎을 먹고 투명해지기를 바란다. 하늘을 우러러 잠을 자는 누애처럼, 한 잠 두 잠 세 잠 네 잠, 다섯 살이 되어 완전히 투명한 몸이 되리라. 그리하여 자신만의 고치 속에서 새롭게 부활하리라. 그렇게 나는 허물을 벗기 위하여 새로 돋아나는 뽕잎을 갉아먹고 가볍게 출근을 한다.


0016 부관참시 집행관이었다


나는 발전소에서 부관참시 집행관이었다

죄 없이 죽어간 나무 조상들을 

무덤에서 꺼내어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죄 없이 죽어간 오랜 조상들의 잠을 깨우고

급기야는 보일러 속에서 화형을 시켜버린

나는 용서받지 못할 부관참시 집행관이었다

석탄과 석유는 나무들의 먼 조상님이었다

오늘 밤에도 똑똑히 지켜보았던 별들이 운다


0017 터빈


날개가 너무 많아서 슬프다

지옥이 너무 뜨거워 슬프다

지옥 밖으로 탈출을 꿈꾼다

멈추면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멈추면 너무 무거워 슬프다

날개가 많아도 날 수가 없다


기력 발전소의 핵심 설비는 보일러와 터빈과 발전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기의 대부분은 바로 이 기력  발전소에서 생산한다. 기력 발전소란 증기의 힘으로 전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화력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가 바로 이 기력 발전소인 것이다.


태양광 발전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발전소는 발전기 회전체의 회전으로 전기를 생산한다. 그 회전력의 핵심 설비가 바로 터빈이다. 보통 540°C의 온도와 127kg/cm²의 압력을 가진 과열증기로 1분에 3600바퀴를 돌려준다.


그러니까, 초대형 보일러나 원자로에서 생산한 고온과 고압의  속도 에너지를 터빈에서 회전 에너지로 바꾸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100°C가 되면 물이 끓기 시작하고 증기가 발생한다. 주전자 뚜껑이 들썩거리며 밖으로 나가려고 탈출을 꿈꾼다. 열에너지가 속도 에너지로 바뀌는 순간이다. 여기서 쉬지 않고 계속 열을 가하면 온도는 더 올라가고 속도 또한 더 올라간다.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속도를 가두면  압력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540°C의 온도다. 540°C가 되면 물의 속성이 전혀  없는 순수한 증기가 된다. 물기가 전혀 없는 과열증기가 된다. 무게도 형체도 완전히 없어진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은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그 많은 터빈 날개가 손상되지 않고 분당 3600바퀴로 쉬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숨어있다. 증기 속에  수분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면 터빈 날개는 부러지고 말 것이다.


여러분들에게도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몸을 완전히 벗고 영혼만으로 살아갈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그날의 가벼운 비상을 위하여 우리들은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  터빈은 일 년에 한 번씩 멈추고 한 달 동안 검사를 받는다. 터빈뿐만 아니라 보일러와 발전기도 일 년에 한 번씩 멈추고 약 한 달 동안 검사와 치료를 받는다. 고장이 나기 전에 계획예방정비를 한다. 우리 인간들도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쯤은 모든 생각과 생활을 멈추고 계획적으로 예방하고 정비를 하여야만 한다.





0011 언어의 온도


강가 개울가 이지성 님의 극찬이 있어서 <언어의 온도>를 읽었다. 50대 남자가 읽어도 참 좋은 책이었다. 배울 점이 많은 책이었다. 나도 한 수 배워서 당장 적용해야겠다. 핵심은 여백이다. 그리고 정제된 언어와 쉼이다. 여백과 정제와 쉼은 시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 아닌가. 시뿐만 아니라 산문을 쓸 때에도 적용하면 좋을 것이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시와 산문의 적정한 거리 조정이 될 것이다. 나의 글은 어쩌면 너무 시에 익숙해서, 보통 사람들이 상징과 비유를 따라오지 못해서, 어렵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상징과 비유에 익숙한 시인들은 나의 글을 읽기 쉽겠지만 산문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쓸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0012 윤동주 시인과 함께 다시 순례를 시작한다


이어도에서 나는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어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있었고 예수님도 있었다. 윤동주 시인도 있었고 바다에서 죽은 제주도 사람들도 있었다.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원이 마련되었다. 내가 일전에 서복선생과 함께 다녀왔던 서복 전시관 곁에 위령공간을 마련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영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도 함께 가겠다고 길을 나선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 뿐만 아니라 모든 죽은 것들까지 사랑하는 나와 윤동주 시인이 함께 길을 나선다. 이번 기회에 정방폭포도 둘러보고 제주도의 여러 곳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주로 죽음의 장소들을 위주로 둘러보기로 한다.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무등이왓과 큰넓궤, 곤을동, 북촌리, 다랑쉬굴, 터진목, 표선해변, 섯알오름, 주정공장, 이덕구산전, 관덕정..., 여수와 광주와 대전의 학살터까지 둘러보려고 한다. 정방폭포에서 백두산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고향 북간도까지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0013 뻐꾸기와 뻐꾹채와 엉겅퀴꽃 


요즘 뻐꾸기는 알을 낳지 않는다

요즘 뻐꾸기는 잘 울지도 않는다

옛날 뻐꾸기는 집 없어도 바빴다

젖동냥으로 키워도 그냥 낳았다

전쟁 통에도 아이를 낳아 길렀고

집이 없어도 새끼를 낳아 길렀다

뒷일은 생각도 않고 그냥 낳았다

그 바람에 뻐꾸기는 피를 흘렸다

밤낮없이 피 울음 토하며 울었다


뻐꾹채에는 뻐꾸기 피가 묻었다


요즘 뻐꾸기는 알을 낳지 않는다

요즘 뻐꾸기는 잘 울지도 않는다


뻐꾹채는 보이지 않고 엉겅퀴만,


먹을 것이 없어서

뻐꾸기 울음소리  먹고 자란

나는 오늘도 울음소리가 고프다


* 내가 어린 시절에는 인구가 너무 많다며 아이들을 조금만 낳으라고 하였다. 보건소에서 피임약과 콘돔을 매달 나누어주었다. 나는 보건소에서 30알짜리 피임약과 콘돔을 대신 받아오곤 하였다. 학교에서는 지구 밖으로 아이들이 밀려나 떨어지는 포스터를 그리곤 하였다. 배가 고픈 우리들은 골목에서 콘돔을 불어서 놀았다. 뻐꾸기가 자주 울었고 뻐꾹채가 많이 피던 시절에는 콘돔이 질겨서 가장 좋은 풍선이었다.


0014 윤동주 시인의 프로필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 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 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윤동주(尹東柱) 탄생 백주년을 넘기면서 많은 자료들과 영화 등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0015 연어의 종착역과 징검다리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이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라는 대사로 유명해진 <곡성>이란 영화의 무대인, 바로 그 곡성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부끄럽게도,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녔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곡성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 나오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옛날의 곡성역이 그 영화에 나오고 기차마을로 조금씩 알려진 이후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삼기천이 흐른다. 비가 많이 오면 삼기천의 물이 우리 집에까지 들이닥칠까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 가보니 ‘의동 마을, 원등 1구’라는 이름과 함께 ‘연어의 종착역’ 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몰라도 꼭 나를 위해서 지어준 이름인 듯, 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삼기천에서 아직껏 연어를 한 번도 직접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와 속성이 비슷한 은어는 많이 보았고 많이 잡아보기도 했다. 또한 연어와 은어와는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닌 장어도 많이 잡아보았다. 


연어와 은어는 강에서 태어나고, 연어는 먼바다에서 살고, 은어는 가까운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새끼를 낳고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이 민물장어라고 말하는 뱀장어들은 강에서 태어나지 않고 모두가 바다에서 태어난 놈들이다. 


0016 뱀장어를 아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연어와 은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장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민물에서 자라는 민물장어들의 산란 장소를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필리핀 인근의 깊은 바다에서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0~1,200만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고만 알려져 있다. 알은 부화하여 렙토세팔루스라 불리는 버들잎 모양의 유생기를 거쳐 실 모양의 어린 실뱀장어로 탈바꿈하며, 2~5월 사이에 무리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민물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 뱀장어

민물장어는 뱀장어라고 한다. 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뱀장어는 뱀장어목 뱀장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로, 장어류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류성 어류이다. 그러나 다양한 서식환경과 염분농도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일생을 강이나 바다 어느 한쪽에서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이 식용으로 소비하는 뱀장어는 주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를 그물로 잡아 양식을 통해 얻으며, 여름철 스태미나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몸에는 타원형의 미세한 비늘이 있지만 살갗에 묻혀서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끝이 뾰족하며, 배지느러미는 없다. 옆줄에 있는 감각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멍)이 뚜렷이 보인다. 


몸 색깔은 사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민물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에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따뜻한 민물에서 살며, 육식성으로 게, 새우, 곤충, 실지렁이, 어린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다. 낮에는 돌 틈이나 풀, 진흙 속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움직이는 야행성이다. 


간혹 밤에 뭍으로 올라와 이동한다는 보고도 있다.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굴이나 진흙 속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다시 활동한다. 수컷은 3~4년, 암컷은 4~5년 정도 지나면 짝짓기가 가능해지고, 8~10월에 짝을 짓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이때에는 생식기관이 발달하고 소화기관이 퇴화하면서, 굶은 상태로 산란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   


0017 나의 고향집은 


내가 나의 고향집이라고 말하는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식구들이 직접 지은 집이다. 마을 뒷산인 심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로 다듬어서 서까래로 쓰고, 그전에 살던 집 뒤꼍에서 자라던 거대한 미루나무를 잘라 대들보와 상량 목으로 만들어 올렸다. 나의 고향집은 마당이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집이고 우리 식구들의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삼기천 바로 맞은편, 둑 너머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하천 국유지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기천을 경계로 하여 면소재지 쪽이 원등리이고 맞은편 마을이 월경리였다. 원등리는 삼기천과 바로 붙어 있었으며 1구에서 5구까지 마을 다섯 개가 모여 있었고, 월경리는 삼기천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호남고속도로 공사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래방천에 붙어있는 왕산을 깎아내리는 공사가 가장 큰 난공사였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나무뿌리로 뿌리 탁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포클레인이 없어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가로로 장착된 긴 쟁기삽날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이어서 더욱 공사가 어려웠던 것 같다. 불도저는 그 후로도 가끔 신작로 흙길을 판판하게 다듬어주는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대부분 포클레인으로 흙을 푹푹 파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쟁기 형식으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였다. 그러니 큰 산을 밀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호남고속도로는 월경리 쪽에 붙어 있었다. 또한 월경리는 1구와 2구가 있었는데 2구는 더 깊은 산속에 뚝 떨어져 있어서 따로 ‘행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0018 징검다리 건너 외딴집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삼기천 둑 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둑 너머에 공터가 좀 생겼던 모양이었다. 정미소를 하시다가 잦은 고장과 큰 사고로 망한 아버지께서 그 공터에 불법으로 대강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월경리에 속해 있었지만 거리상이나 생활상의 영역은 원등리 1구에 더 가까운 생활권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향집과는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그 옛날 집터도 둑 높이까지 매립이 되어 그 위에 새로운 집이 지어져 있다. 물론, 남의 집이 지어져 있다.    


나의 기억은 징검다리 건너 그 옛날 외딴집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 바로 전에 살았었다는 ‘행경’이란 마을에서 더 작은 정미소를 할 때 태어났다고 전해 듣기도 하였다. 원등리 2구에 있는 큰 정미소에서 망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정미소를 하였는데 바로 그때 내가 태어났다고도 하였다.


0019 방물장수 혹은 봇짐장수(황아장수, 보부상, 행상)


그러니까 월경리 1구 시절, 마당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깊은 외딴집이었던 바로 그 옛날집에서는 많은 기억들이 흘러넘친다. 마당의 높이는 둑 너머 삼기천 바닥과 같았다. 그러니까 둑이 무너지면 외딴집은 바로 물에 잠기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위험하고 외로운 집에서 꽤 오래도록 쓸쓸하게 살았다. 


그 시절 어머니는 튼튼하고 커다란 미원박스에 각종 생활용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며 봇짐장사를 하셨다. 먼 마을까지 다니시는 바람에 밤늦게 돌아오시기 일쑤였고 다음날 돌아오시는 날도 많았다. 내가 아기였을 때에는 나를 등에 업고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멀리 장사를 나갈 때에는 잠자리가 불편하여 가장 힘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잘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동생은 잘 우는 바람에 주인집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먼 밖으로 나가 동생을 안고 많이 울기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0020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고


그리고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기도 하였다. 월경리로 건너가는 다리 아래쪽이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무서운 물살이 넘어와 흙탕물이 우리 집을 덮쳤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들은 원등리 1구 회관으로 피신하여 며칠씩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외딴집에는,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어서 아무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특히 월경리에 사신다는 ‘꽃 본 듯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밤마다 우리 집 시멘트 마루에서 남몰래 주무시는 바람에 많이 무서웠다. 그 할아버지는 정신이 좀 이상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동네 청년들에게 끌려가 산에서 얻어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는데 그때부터는 다시 동냥아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팔이 없거나 눈알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쇠갈쿠리 손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저 무섭기만 하였었다.


0021 오리와 호롱불


그리고 많은 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동네에는 이미 전기가 들어왔는데 외딴집이었던 우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불법건축물이어서 전기 신청도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때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날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원등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월경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나의 위치와 소속이 애매해서 나는 외톨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짐승들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물가에서 사는 바람에 오리를 많이 길렀다. 오리뿐만 아니라 닭과 토끼와 염소 그리고 나중에는 돼지와 소와 말까지 길렀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오리가 한 마리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리는 낮에 냇물에 나가서 먹이를 잡아먹고 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알도 낳고 잠도 자고 또다시 새벽에 물가로 나가 놀았다. 오리는 닭보다 훨씬 빨리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꾸만 동네사람들을 불러와 오리를 잡아서 함께 드시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빨래 줄에 오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오리 피가 몸에 좋다고 오리를 산 채로 빨래 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목을 잘라서 오리 피를 그릇에 받아내고 계셨다.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많이 울었다. 


그리고 또한 어느 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내가 사서 내가 기른 돼지를 잡아가버렸다. 그 전날 밤 아버지께서, 노름판에서 내 돼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 노름을 하시다가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많은 이야기들은 평생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0022 물고기들아 미안하다


우리 식구들은 물가에서 살아서 그런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서 먹었다. 장어를 잡아먹고 미꾸라지를 잡아먹고 참게를 잡아먹고 자라까지 잡아서 먹었다. 물론 피라미와 붕어와 중태기와 민물새우도 많이 잡아서 먹었다. 특히 저수지 물을 빼는 날이면 그야말로 물고기 천지였다.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면 장어와 잉어들이 수두룩했고 미꾸라지는 처치가 곤란할 정도로 너무 많았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께서는 섬진강에 가셔서 은어들을 잡아오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투망질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 투망질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불법이어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투망질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자동차 배터리를 등에 짊어지고 대나무 끝에 장착한 구리선으로 전기를 관통시켜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이들은 자전거 바퀴로 돌리던 작은 발전기를 이용하여 물고기들을 잡았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까지 민물낚시는 기본으로 하였고 겨울에는 주로 해머로 물속의 돌을 두들겨서 물고기를 잡곤 하였다. 그리고 족대라고 하는 작은 그물로도 잡고 맨손으로도 돌 속이나 풀 속을 뒤져가며 물고기들을 잘도 잡아서 먹곤 하였다. 


그때는 워낙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어서 물고기들 뿐만 아니라 새들이며 산짐승들도 닥치는 대로 잡아서 먹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동물학대죄로 모두 잡혀갈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뱀이며 개구리까지 잡아서 먹고, 고라니며 산토끼며 꿩들까지 잡아서 먹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0023 이어도에서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그런 이어도에서 나는 이제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길을 떠난다


0024 봄꽃


봄꽃은 백일사진이 없다

죄를 지을만한 시간이 없다

봄꽃은 늙을 시간이 없다

아,

영정사진 속 4월의 봄꽃들


0025 이어도 문을 나서며


이어도에서는 수평선이 둥그렇게 보인다

파도가 하늘을 살짝살짝 들어 올린다

하늘과 바다의 틈으로 보니 지퍼가 보인다

더 먼 곳에서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한 송이,

이어도해양과학기지가 지퍼를 열고 있다

태초에 빛과 어둠으로 갈라졌듯이

태초에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졌듯이

수평선의 지퍼가 조금씩 더 열린다

설문대할망이 만들었다는 한라산이 보인다

하늘에서 다시 보니 럭비공으로 보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불안하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다투어 발로 차더니,

미국과 중국이 다시 다투어 함부로 찬다

그래도 둥근 공은 끝까지 알이 되고 싶다

해양과학기지 주변으로 배들이 몰려온다

과학기지 날개 위에서 헬기가 날아오른다

바다의 지퍼가 열리고 하늘의 지퍼도 열린다

설문대할망은 한라산 백록담을 노래하고

마고할미는 지리산 노고단을 노래한다

윤동주 시인은 오늘도 「서시」를 읊조리고

나는 연어의 종착역으로 가는 연어가 된다


0026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태평양로 1

이어도 섬을 당신은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이어도를 아시나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섬

하늘과 바다를 이어주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

태평양으로 날아가는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제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꿈꾸어 오던 섬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뿌리 깊은 섬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의 꿈을 아시나요


그리고, 30년 넘게

이어도로 살았던 또 다른 이어도를 아시나요


0027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0028 여섬이 되었네

     

이어도는 최고

대상군 해녀네

깊은 물속으로

한 번 들어가서

나올 줄 모르네

비바람 불어도

모습 안 보이네

태풍이 불어도

나오지를 않네

해양 과학기지

테왁처럼 떠서

님을 기다리네

용궁으로 떠난

님을 찾아 나선

긴 사랑의 물질

끝날 줄 모르네

숨비소리도 없이

돌아오지 않네

나도 님 찾아서

이어도로 가네

사랑을 찾아서

여의도로 가네

전복보다 좋은

여섬으로 가네

이어도 여의도

여섬이 되었네


* 이어도와 여의도는 둘 다 여섬이었다


0029 이어도에서 출발한다


이번의 마지막 순례는 이어도에서 출발한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어도는 아니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떠나는 이번 순례는 나와 윤동주 시인만 알고 있는 이어도에서 출발한다. 우리들이 함께 출발하는 이어도는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가 있는 이어도가 아니다.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당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이어도는 삶과 죽음의 중간쯤에 있는 중음의 세상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유토피아, 피안이다.


이번 순례는 브런치스토리와 함께 할 것이다. 이렇게 좋은 플랫폼을 만들어준 다음 회사 측에 깊이 감사한다. 브런치 작가들 중에 종이책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브런치스토리가 더 좋다. 우선, 내 마음대로 편집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또한 언제라도 내가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어서 참으로 좋다. 더구나 많은 비용을 들여서 종이책을 만들고 홍보하고 배송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집필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그렇게 집중하여 탄생한 작품이라면 언젠가는 이 글들이 스스로 종이책으로 발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검증된 작품들만 종이책으로 발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을 작품들만 종이책으로 발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 브런치스토리 플랫폼이 앞으로 더욱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나는 다음이 처음 출발할 때부터 쭉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다음 카페가 많이 조잡했다. 그런 다음을 이렇게 성장시킨 것을 보면 믿음이 간다. 그리고 브런치 작가들도 브런치스토리를 위해서 마음을 합칠 필요가 있다. 다음과 작가들이 함께 성장해야만 할 것이다. 


0030 나는 나를 응원한다


나에게는 아픈 추억이 있다. 나는 20년 넘게 다음 블로그에 사진 등 많은 자료들을 보관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블로그가 없어져버렸다. 내가 개인 사정이 있어서 다음 블로그에 접속하지 못한 기간에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브런지스토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나를 응원한다. 나는 나의 꿈을 응원한다. 나는 나의 다음을 응원한다. 나는 브런치 작가들을 응원한다. 나는 브런치스토리를 응원한다. 나는 이제 너를 응원한다. 나는 이제 당신을 응원한다. 나는 이제 그대를 응원한다. 나는 이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응원한다. 특히, 아픈 사람들을 먼저 응원한다. 나를 진정으로 응원하고 싶다면 나의 이웃부터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을 때 나 또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강가 개울가 이지성 님의 브런치가 참 좋다. 요즘 많이 배운다. 편집자의 입장과 출판사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 종이책 출판의 전망은 밝지 않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이병률 시인도 요즘에는 어렵다고 했다. 책을 그렇게 잘 만들어도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병률 시인, 하면 <끌림>이 생각날 것이다. 나는 이병률 시인을 응원한다. 앞으로도 꾸준히 책이 잘 팔리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좋은 곳에 여행도 많이 하고 죽어서도 여전히 사랑받는 행복한 시인으로 살아남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강가 개울가 이지성 님의 브런치에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 텀블벅에 대한 공부도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0031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한 송이 있다

전설이 낳아 기른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태평양의 배꼽을 찾았다 태반과 탯줄을 잃은 배꼽을 이어도라 불렀다 이어도는 제주도 사람들의 고향이었다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배꼽을 보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소코트라록(Socotra Rock)’이라 불렀다 하지만 오래도록 이어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배꼽을 보고 싶었으나 배꼽을 볼 수 없었다 배꼽에 관한 소문만 무성했다


1984년에 비로소 태평양의 배꼽을 볼 수 있었다 KBS와 제주대학교 해양대학이 파랑도 탐사에 성공했다 한국해양소년단 제주연맹의 파랑도 탐사도 성공했다 파랑도는 그렇게 이어도와 만났다 꿈이 현실로 드러났다 1986년에 암초 수심이 4.6m로 측량되었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이어도 등부표’를 1987년에 설치했다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1995년 해저 지형을 파악하고 조류를 관측하는 등 현장조사를 실시하여 2001년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가 착공에 들어갔고, 2003년 6월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벌써 스물한 살 성인이 되었다


해양, 기상, 환경 관측 체계를 갖추고 해양 및 기상, 파고, 수온 등 해상 상태와 어장 정보, 지구 환경 및 해상 교통안전, 연안 재해 방지와 기후 변화 예측에 필요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 무궁화 위성을 이용하여, 관측 정보를 제공하며, 국립해양조사원에서 데이터 검증을 거쳐 기상청을 비롯하여 관련 기관에 실시간으로 자료를 제공한다


해저 지반에 박은 60m의 기초를 제외하고도 수중 40m, 수상 36m, 총중량 3,400t의 구조물이다 400평 규모의 2층 Jacket형 구조물엔 관측실, 실험실, 회의실이 있고 기지의 최상부에 가로 21m, 세로 26m에 이르는 헬기 이·착륙장 외에, 등대시설, 선박 계류시설, 통신 및 관측시설 등과 8인이 15일간 임시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마라도에서 149Km 가장 먼 해상에 설치된 해양과학기지는 평화의 연꽃으로 피어났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끝없는 도전의 상징이 되었다 제주도 생성시기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60만 평의 이어도 소코트라 암초, 그 위에 세워진 76m 높이의 철탑 위에 400평의 섬을 만들었다 사랑의 연꽃을 피웠다 3400톤의 쇳물로 평화의 심장을 만들었다 태평양의 배꼽에서는 이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린다 잃어버린 탯줄과 태반을 드디어 다시 찾았다


0032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이어도는 태평양에 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북위 32°07′22.63″, 동경 125°10′56.81″에 있다


이어도는 한․중․일 3국 중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의 유인도 마라도(馬羅島)에서 남서쪽으로 80해리(149km)

일본의 도리시마(鳥島)에서 149해리(276㎞) 

중국의 서산다오(余山島)에서는 155해리(287㎞) 떨어져 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바다의 거리는 236해리(436㎞)에 불과하다 배타적 경제수역(EEZ) 200해리(370.5㎞)의 두 배인 400해리(741㎞)가 되지 않을 경우 양국은 협상을 통해 해양경계를 획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인 획정 원칙인 ‘중간선 원칙’을 적용하면 당연히 한국의 관할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꾸만 자기들 바다라고 우긴다


이럴 때는 시인들이 먼저 나서야만 한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시인들이 손을 잡고

이어도에서 평화의 연꽃을 피워야만 한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섬이 되어야만 한다


이어도문학회와 이어도연구회가 손을 잡고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이 되어야만 한다


0033 이어도와 여의도


이어도라는 말의 어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여섬>이 변해서 <이어도>가 되었다는 설을 나는 믿는다

‘여’를 길게 발음하면 ‘이어’가 된다

여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말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어도를 여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섬을 문자로 표기하면서 이어도라고 표기를 했다고 한다

여섬, 이여도, 이어도, 등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에는 여의도가 있다

여의도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되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의도(汝矣島)는 汝(너 여) 자를 쓴다


이어도와 여의도는 재미있는 관계에 있다

여의도 또한 <여섬>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데

이어도 또한 ‘나의 섬’ ‘너의 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어도는 자신의 존재를 물속에 숨기었고

여의도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두 섬의 운명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 이어도(離於島) 이야기


섬을 뜻하는 한자를 보면, 섬도(島)는 바다에서 새(鳥)가 앉아있는 산(山)이고, 섬서(嶼)는 도(島)에 더불어(與) 있는 산(山)이다.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사람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섬은 도(島)이고, 살 수 없는 작은 섬은 서(嶼)이다. 그래서 도서(島嶼)는 ‘크고 작은 온갖 섬’을 뜻한다.

물에 잠겨 섬이 되지 못하는 바위를 초(礁)라 한다. 잠길 듯 말 듯 아슬아슬 애를 태우는(焦) 바위(石)라는 의미다. 드러난 바위가 노초(露礁)이고, 잠긴 바위가 암초(暗礁)다. 배가 다니다가 초(礁)에 올라앉으면 좌초(坐礁)라 한다.

그러면 밀물에 잠기고 썰물에 드러나는 바위를 뭐라고 할까? 간출암(干出巖)이다.

초(礁)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여’다.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다. 썰물에 드러나는 바위가 ‘잠길여’, 드러나지 않는 바위가 ‘속여’다. 물때에 따라 잠기느냐 드러나느냐를 놓고 이름을 다르게 붙인 것이다.

같은 뜻인 ‘여’와 초(礁)와 rock을 비교해 보면 우리 민족이 바다를 얼마나 유심히 관찰했고, 우리말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라도 서남쪽 149km 지점에 매우 큰 ‘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서로 1.4km, 남북으로 1.8km의 크기(수심 50m 기준)에 가장 높은 곳이 수심 4.6m 정도라, 파도가 매우 사나워지면 가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은 이 ‘여’를 ‘여섬’이라 불렀다. ‘여섬’은 용궁으로 떠나는 ‘나루터’였다. 그물질 나간 어부나 물질 나선 해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여섬’에 들러 용궁으로 갔다고 믿었다. ‘여섬’은 바닷속에 있는 ‘저쪽 언덕’, 곧 피안(彼岸)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에는 ‘여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표현돼 있다.

가수 정태춘은 ‘떠나가는 배’에서 ‘여섬’을 ‘평화의 땅’, ‘무욕의 땅’이라 불렀다.

민담 속의 ‘여섬’이 역사의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100년쯤 전이다.

영국 해군이 소코트라 록(Socotra Rock)이라 부른 데 이어 난데없이 일본이 파랑도(波浪島)라는 딱지를 붙였다. 제주대와 KBS는 1984년 공동 탐사를 통해 소코트라 록 (Socotra Rock)과 파랑도(波浪島)가 ‘여섬’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3년 뒤 해운항만청이 부표를 설치하고 2001년 국립지리원이 지명을 확정하면서 ‘여섬’은 공식 명칭을 갖게 됐다. 바로 ‘이어도’다. 장모음 ‘여’를 ‘이어(離於)’로 쓰고, ‘섬’을 도(島)로 붙인 것이다.

1993년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은 해양연구소 이동영 박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10년 만에 ‘이어도(離於島)’ 해양 과학 기지를 건설했다.

20년 뒤인 지금 벌어지고 있는 동아시아의 해양 분쟁을 내다본 선견지명(先見之明)이다.

해양 과학 기지 건설을 주도한 한국해양과학 기술원의 심재설 박사는 말한다. “분쟁이라고요? 세계적으로 알만한 해양학자들은 ‘이어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해양과학기지가 생긴 뒤 ‘이어도’에 관한 논문이 매년 30편 정도 국제학술지에 실리고 있고, NASA(미국항공우주국)에도 ‘이어도’에서 관측한 해양 기상 정보가 시시각각 업데이트 되고 있다.

이 논문과 자료에 ‘이어도 코리아(Ieodo Korea)’라는 출처가 따라붙는다. 민담에서 ‘저쪽 언덕(저승)’이었던 ‘여섬’인 ‘이어도(離於島)’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만든 것은 우리 과학자들이다.


0034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


월터 롤리 경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경험에서처럼, 바다를 지배한 나라가 부국과 강국이었다. “21세기는 해양의 시대”라고 했던 미래 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바다의 중요성은 미래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육상 자원의 고갈을 앞둔 오늘날 바다는 마지막 남은 인류의 보고이며 경제발전의 프런티어이다.


해양경계의 획정


우리 바다, 곧 해양 영토는 12해리의 영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해라는 범위를 넘어서 넓게는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대륙붕에까지 미치는 것이 해양영토이다. 그런데 아직도 해양영토의 경계가 명확하게 확정된 것은 아니다. 모든 연안 국가가 200해리의 EEZ를 관할할 수 있지만 서로 마주 보는 대향국간 바다가 400해리가 되지 않는 해역에서는 200해리의 경계가 중첩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항에 관해 유엔해양법협약은 협상을 통해 그 경계를 확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양영토를 둘러싼 분쟁


동아시아에서는 도서의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센카쿠/댜오위다오라는 도서를 둘러싸고 일본과 중국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있고, 동남아시아 해양에서도 베트남, 필리핀 등 그 지역 5개 국가와 중국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남중국해 분쟁이 있다. 심지어 우리의 확고한 영토인 독도에 대해서 일본이 자기네 도서라는 억지 주장으로 마찰이 거듭되고 있다. 2011년부터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무력충돌 위기까지 갔었다. 2014년 들어서는 중국과 필리핀 간에 남중국해 분쟁에서 유사한 무력충돌 위기를 겪은 바 있다. 이 모두 해양영토의 확장을 위한 국가 간 분쟁이다. 해양영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동아시아 해양영토분쟁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어도의 해양분쟁 이슈화


서해 혹은 황해(동중국해)는 한․중․일 3국의 EEZ와 대륙붕이 중첩되는 수역으로 해양경계 획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다다. 서해 혹은 황해(동중국해) 상에 위치한 이어도는 해수면에서 4.6m 아래에 있는 수중 암초로 한․중 간 EEZ 획정에서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슈다. 이어도를 사이에 두고 한․중 양국 해안선까지의 거리가 400해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도는 한․중 양국의 EEZ가 겹치는 지점에 위치해 있지만, 한국 쪽으로 28해리 가깝게 위치해 있고 일반적인 획정 원칙인 ‘중간선 원칙’을 적용하면 당연히 한국의 관할 영역에 속한다.


중국의 이어도(쑤옌자오)’ 관할권 주장의 논거


중국은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되는 원칙인 마주 보는 국가 간에 적용되는 ‘중간선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 EEZ 경계를 중간선 원칙으로 할 경우, 이어도는 중국의 관할 범위에 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해저 퇴적 지형에 기반한 ‘자연연장이론’과 해안선 길이 및 인구 비례 등에 근거한 ‘형평의 원칙’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또 이어도를 ‘쑤엔자오’(蘇暗礁)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그 명칭의 근원을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서인 산해경(山海經)에서 찾고자 시도해 왔다. 이를 테면, “동해(동중국해) 밖 태황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의천소산이라 한다”에서 ‘의천소산’을 이어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옛날 중국인들이 암초를 산으로 생각하고 표현했다는 주장은 억지로 끼워 맞춘 논리다.


중국의 주장에 대한 반론


중국은 해양경계의 원칙뿐만 아니라 역사적 근거 등을 자국에 유리하도록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질학적으로 이어도가 중국에서 비롯된 퇴적층인지 불분명하며, 인구를 해양경계획정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는 없고, 해안선 길이도 통상기선을 적용하면 한국이 중국보다 1.18배 더 길다. 국제적으로 해양경계를 획정하는 일반원칙도 ‘중간선 원칙’이다. 또한 중국이 내세우는 역사적 근거로 산해경(山海經)이 유일할 뿐 관련된 문화예술에 관한 생활상이나 관습의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은 이러한 빈약한 근거를 나름대로 보완하기 위해 최근에는 ‘중국해’라는 노래를 지어 “중화문명이 ‘쑤옌자오(이어도)’까지 뻗어나갔다”는 왜곡된 역사를 전파하고 있다.


이어도는 우리의 바당(바다의 제주어)’


이어도는 제주민들에게는 하나의 랜드마크로서 항해를 가늠하던 척도였다. 이어도 해역은 파랑이 심해 항해하던 선박이 난파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주변 해역을 항해하던 10척 중 7척은 난파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볼 때 조난이 잦았던 바다 등의 조건을 고려해야 이어도의 위치가 추론될 수 있다. 이어도 대표 민요에는 이어도로 추론되는 곳이 나온다. “강남(江南)을 가건 해남(海南)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엔 해라”(강남 가는 해남길로 보면 이어島가 절반이라더라). 이어도는 제주도 서남쪽 중국으로 가는 항로 중의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지금의 이어도해양과학기지가 위치한 곳이 바로 그곳이다.


왜 이어도인가


육당 최남선은 1953년 “해양과 국민생활”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이 바다를 알고 지낸 시기는 영광의 시기이고, 바다를 잊어버린 시기는 환란과 시련의 시기였다. 한국을 구원할 자는 바다의 나라로 일으키는 자이고, 한국을 구원하는 것은 바다에 서는 나라로 고쳐 만드는 것이다.” 이어도는 대한민국의 ‘바다의 나라’로 나가는 징검다리다. 그래서 이어도 관할권을 지키는 일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가운데 우리의 해양주권을 꿋꿋하게 지키는 길이다.


0035  고구마꽃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0036 토란꽃


꽃이 피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마라

조금만 더 뜨거워지면 꽃은 피리라

웃음 없다고 토란토란 토라지지 않고


오늘도 나마스테 나마스테 인사한다


* 나마스테 : “당신의 영혼에 경의를 표합니다” 인도의 인사말


0037 마늘꽃


사람들은 당신이

꽃으로 피기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늘이

꽃으로 필까 봐서

마늘종 목을 친다


나는 마늘보다

마늘꽃이 더 좋다

나는 늘 기다린다


당신이 활짝 피어야

나는 더욱 환해진다

나의 사랑은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그래야만 하리라

마늘꽃이 환하다


0038 꽃농사와 나비농사


나는 작물농사보다 꽃농사가 더 좋다

나의 꽃농사는 나비와 나방농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의 텃밭 이름이 서천꽃밭이다

감자와 파와 마늘을 심으려고 준비한다

나는 게으른 농부라서 수확에는 소질이 없다

구석에 있던 쪽파를 준비하고

꽃이 지고 한참이 지났는데 

이제 겨우 땅을 파서 코끼리 마늘을 찾는다

코끼리 마늘은 새끼 마늘들도 함께 있다

나는 아직 심지도 않았는데 벌써 꽃을 상상한다

벌과 나비와 나방들을 생각한다

어리호박벌과 배짧은꽃등에를 생각한다

가중나무산누에나방과 어스랭이나방을 생각한다

노랑애기나방과 흰띠알락나방을 생각한다

제주등줄박각시와 노랑줄박각시를 생각한다

왕자팔랑나비와 제주꼬마팔랑나비를 생각한다

청띠제비나비와 제비나비를 생각한다

갈구리나비와 줄흰나비를 생각한다

작은주홍부전나비와 바둑돌부전나비를 생각한다

왕나비와 암끝검은표범나비를 생각한다

암검은표범나비와 홍점알락나비를 생각한다

남색남방공작나비와 가락지나비를 생각한다

산굴뚝나비와 호랑나비를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호박꽃이 환하게 웃는다 

웃는 꽃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호박잎을 뜯는다

호박잎과 들깻잎으로 아침을 싸서 먹을 예정이다

나처럼 느린 민달팽이가 아침을 먹으려고 상을 차린다


0039 감귤꽃 속에서 탱자가 보인다


감귤 꽃들이 환하게 피었다

감귤꽃 속에 너와 내가 있다

꽃 속에 글쎄 너와 내가 있다

우리는 저렇게 함께 살았구나

우리는 저렇게 한 식구였구나

감귤꽃 속에서 감귤이 보인다

감귤꽃 속에서 탱자가 보인다

탱자와 감귤이 한 집에 살았구나

너와 나는 처음부터 한 식구였구나

그래서 향기가 저렇게 가득했구나

우리들의 사랑은 천년을 살겠구나

우리들의 향기는 하늘로 가는구나


0040 강아지 배추 뜯어먹는 소리


사람들은 가끔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강아지가 배추를 뜯어먹는 소리가 좋다. 내가 밭에서 일을 하면 강아지는 열심히 배추를 뜯어먹고 풀도 뜯어먹는다. 때로는 꽃밭에서 놀다가 꽃에 콧구멍을 들이대고 향기에 취하기도 한다. 또한 예쁜 꽃을 입으로 따서 다른 강아지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소나무재선충 때문에 소나무가 많이 죽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웃기도 한다. 주로 산의 주인들이 많이 웃는다. 뿐만 아니라 겨우 남아 있는 멀쩡한 소나무까지 마구 베어낸다. 알고 보니 산에 소나무가 없으면 밭으로 개간하기가 쉽다고 한다. 소나무가 많은 숲은 밭으로 만들기도 어렵고 주택지로 용도를 변경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땅값을 올리기 위해서는 산에 소나무가 없어져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리 비싼 밭에 소나무를 심는다. 비싼 밭을 싼 숲으로 만들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아픈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아픈 사람들의 보폭은 건강한 사람들의 보폭과 다르다. 나란히 손 잡고 걸을 수 없다. 함께 같은 속도로 걷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나의 속도에 맞추어서 산다. 나의 시는 나의 삶이어서 마침표가 없다. 나의 시의 마침표는 나의 무덤이 될 것이다. 또한 나의 시에는 숨표가 많다. 나의 쉼표는 나의 헐떡이는 숨이다. 숨이 차기 때문에 자주 쉬어 주어야만 한다. 시는 시인의 발걸음을 닮아야만 한다. 시는 시인의 숨결이 느껴져야만 한다.


나는 평생 숲을 가꾸는 것이 꿈인데, 숲이 아직은 나를 품어주지 못한다. 참나무가 많은 정읍의 종석산이  좋아서 가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종석산에서 산양삼을 재배하는 친구가 있다. 그곳으로 가려고 작은 임야를 구하고 교육을 받아서 임업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함께할 친구는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다른 듯하다. 나는 참나무 숲을 가꾸고 많은 사람들이 참나무로 부활하기를 꿈꾸는데 친구는 참나무를 베어내고 산양삼을 대규모로 재배하여 큰 소득을 올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물론, 약초 재배에 좋은 여건이니 어느 정도의 재배는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숲이 목적이 아니고 돈이 목적이라면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숲을 원한다.


나는 5년 전에 이미 평생 써야 할 시의  원고료를 선불로 받았다. 나의 심장 속 대동맥 판막을 뜯어내고 금속판막으로 교체하였다. 깨어나보니 나의 통장에 거금이 입금되어 있었다. 내가 수술을 받기 전날 입금을 하고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내가 깨어날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꼭 살아 돌아와 좋은 시를 써 주세요. 응원합니다." 이 응원 메시지와 그의 기도가 나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수술을 받는 동안에 꾸었던 꿈속의 천사가 나를 살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간절한 기도에 보답하기 위하여 지난 5년 동안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출사표를 던지고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어도공화국이 들어설 아름다운 숲을 구하지 못하여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쳤다. 그곳에 나는 서천꽃밭을 만들고 있다. 아름다운 숲에 만들 이어도공화국을 미리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 나와 인연이 닿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나무를 심고 가꾼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직은 함께 살 수 없지만 그들의 나무를 보며 날마다 생각한다. 그들의 나무를 가꾸며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숨을 쉰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꿈은 그렇게 천천히 자라고 시나브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서천꽃밭에 자란(紫蘭)이 피어나고 은방울꽃이 피어난다. 자란(紫蘭)의 꽃말은 "서로 잊지 않다" 은방울꽃의 꽃말은 "틀림없이 행복해진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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