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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을 타는 나뭇잎 Dec 03. 2024

저는 비기너입니다만

초보에게 관대한 나라, 미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한쪽 문을 열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는 느낌이랄까. 낯설고 이상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채로 하루하루가 흘렀다. 영어라곤 30년 전 고등학교 때 배운 게 전부인 내가 인생후반전에 영어 현타를 맞아도 제대로 세게 맞았다. 생존하려면 영어는 필수여서 매일 어학원 수업에 집중했다. 읽고 쓰기는 따라갈 만했지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아들 학교에서 전화라도 받는 날이면 심장이 철렁했다. 정중하게 메일로 다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공공기관에서 보낸 메일임에도 구어체 표현과 낯선 미국 학교 시스템에 대한 내용이라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요즘은 ChatGPT 덕분에 한결 수월해졌지만 혹시 내가 뭔가를 놓치진 않을까, 한 문장씩 찬찬히 읽고 짧은 답장을 쓰는데도 1시간이 넘게 걸리곤 했다. 한국에선 5분이면 끝날 일을 1시간이나 붙들고 에너지를 쏟다니. 이게 뭐라고.. 하면서도 오늘도 하나 해결했어! 라며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심정으로 매일 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아들을 픽업하러 학교에 갔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아들은 얼마나 힘들까? 전학 초기라 무탈하게 적응해 주기만 기도했다. 우르르 쏟아지는 외국 아이들 틈에 섞인 아들을 발견하면 표정부터 살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엄마, 오늘 완전 스타 됐어요."


"응?"


얘기인즉슨, 미국은 중학교부터 학생들이 수업하는 교실을 찾아 이동한다. 그런데 아들이 실수로 다른 교실을 들어갔다고 한다. 이미 수업이 시작된 터라 선생님은 그 반에서 함께 수업을 들으라고 하셨고 한국에서 왔다는 전학생이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물으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들은 5살 때부터 꾸준히 몸에 익힌 태권도 4품의 실력을 바른 자세와 발차기로 선보였다고 한다. 박수와 함성, 한국에 대해 폭풍 같은 질문이 쏟아졌고 그날 이후 아들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 어떤 날은 외국 여학생들의 쪽지를 받아오곤 했다.


그런데, 만약 교실을 잘못 찾은 아이를 교사가 꾸짖었다면 어땠을까? 안 그래도 자신감이 부족한데 부끄러움과 자책 속에서 하루를 괴롭게 보내지 않았을까? 자기 학생이 아님에도 수업에 참여하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격려해 준 이름 모를 그 선생님께 감사할 뿐이다. 또, 영어도 서툰 동양 남자아이가 선보인 태권도 실력에 "쟤 뭐야?" 하지 않고 열광하며 친구로 지내자고 다가와 준 아이들에게도 감사하다. 7학년 3학기에 전학을 왔으니 마냥 어린것도 아닌데, 아이들에게 배어 있는 여유와 배려, 존중하는 마음이 고마웠다.


학교에 간 첫날, 아들이 말했다


"엄마, 애들이 너무 착하고 순수해요."


치열한 경쟁이나 대입이라는 스트레스가 없어서일까?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교장선생님 Mr. 젤란스키와 상담선생님 Ms. 로스는 그 후로도 아들에게 벌어진 황당한 일들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덕분에 아들은 중학교 졸업식에서 미국 대통령상을 받았다.


한국이었다면 가능했을까? 암기와 문제풀이, 공부를 못하면 자존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시스템 속에서 아들은 아웃사이더가 되었을 가능성이 다.  비기너에게 관대한 나라.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됐으니 영어를 못하는게 당연하다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성적이나 결과 보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더 크게 평가하는 이곳 교육환경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힘든 상황을 상쇄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다.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사랑해 버린 모든 건

이 별에 살아 숨을 쉬어 난 떠날 수 없어.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고르지 못했다고 해도

나를 실수했다 해도 이 별이 마음에 들어                 

                                                   - 윤하 '별의 조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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