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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을 타는 나뭇잎 Nov 30. 2024

미국 운전면허로 살아남기

우버야 고마웠어

단언컨대, 인생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 인구 60만의 중소도시에 살았던 나는 운전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회사와 집은 불과 10분 거리여서 걸어 다녔고, 섭외와 촬영이 있는 날은 회사 차량으로 이동했다. 공무원으로 이직했을 때도 역시 차로 출퇴근 10분 거리여서 운전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나 되었을까? 주말엔 늘 가족이 함께였고 운전은 베스트 드라이버인 남편의 몫이었다.


그랬던 내가, 미국에 와서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은 운전이었다. 한국과 뉴저지주는 운전면허 상호협정이 체결되어 있어 도로 주행 없이 필기시험만 합격하면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다. 필기시험을 위한 구비서류 제출에도 예약이 필요했고, 한 달 후인 3월 23일에나 신청이 가능했다.


여권과 비자, 국제 운전 면허증, 한국 운전 면허증(영문), 거주지 증명 서류 (전기세 납부 영수증, 은행 계좌 증명서), Debit 카드 등 6 point 서류를 준비하고 불친절하기로 소문난 로다이 MVC를 찾았다. 서류확인을 마치자 현장에서 바로 사진을 찍고 임시 운전면허증을 발급해 주었다. 포토샵 하나 없는 민낯이라니.. 대략 난감. 필기시험 날짜는 5월 25일이었다.


뭐든 예약하고, 기다리는 게 일상인 미국생활의 첫 페이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차량 구입도 쉽지 않았다. 3월 초에 주문을 넣었는데 4월에나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이 들과 나는 우버를 타고 다녔다. 아들 학교는 가까웠지만 어학원은 하이웨이를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로 주행 운전 연수를 3회 신청했다. 우버를 타고 오가던 길을 되짚으며 교통 표지판을 익히고 집, 학교, 어학원, H마트, Whole Foods, IKEA를 반복해서 운전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운전구간이었다.


미국에서 차 없이 산다는 건, 매일 숟가락 젓가락 없이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며 겁쟁이처럼 한 달이나 운전을 미뤘다. 한 걸음 나가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마침내, 우리 차량이 도착했다. 우버에서 벗어나 차량 독립을 하는 순간, 진정한 자유를 만났다. 그리고 숨 막히는 긴장감도 쌍둥이처럼 따라왔다.


아들이 발런티어하러 가던 날, 코너만 돌았을 뿐인데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왕복 12차선 하이웨이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도 하고, 아주 잠깐 방심한 순간 차선을 잘못 들어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뉴욕까지 가는 날도 있었다.


"오 마이 갓! 아들, 어쩌지. 우리 지금 뉴욕 가는 중인가 봐."  


목소리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아들은 평소와 달리 세상 다정하게 대답했다.


"엄마, 엄마, 침착하세요. 일단 직진만 하세요. 내비게이션은 내가 볼게"  


사람 변하면 죽는다던데, 위급한 와중에도 다정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위로가 되었다. 허드슨 강을 내려다볼 여유 같은 건 1그램도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조다리를 건너 다시 뉴저지로 돌아오는데 운전대를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어깨가 뻐근했다.


그 후로도 운전으로 인한 해프닝은 수도 없지만 한 단계 이뤘다는 자신감에 이게 뭐라고 뿌듯했다. 5월 말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우편으로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미국에서 운전을 시작한 지 2년  반이 되어간다. 무탈하게 2만 2천 마일을 나와 함께 해준 소중한 애마 BMW, 정말 고마워. 앞으로도 겁 많고 실수 많은 나와 잘 달려가 보자. 그리고 용기 없던 시절 나와 함께 해준 우버에게도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아들과 함께 우버를 타고 뉴욕과 뉴저지를 넘나들던 시간은 두고두고 펼쳐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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