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버야 고마웠어
단언컨대, 인생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
한국에서 인구 60만의 중소도시에 살았던 나는 운전과는 거의 무관하게 살았다. 방송국에 다닐 때는 불과 10분 거리여서 걸어 다녔고, 섭외와 촬영이 있는 날은 회사 차량으로 이동했다. 교육청에 있을 때도 10분이면 출퇴근이 가능했다. 주말엔 늘 가족이 함께 였고 운전은 베스트 드라이버인 남편의 몫이었다. 내게 운전은 인생의 1% 조차 차지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운전이었다. 뉴저지주와 한국은 운전면허 상호협정이 체결되어 있어 도로 주행 없이 필기시험만 합격하면 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필기시험을 위한 구비서류 제출에도 예약이 필요했고, 예약은 한 달 뒤에나 가능했다.
여권과 비자, 국제 운전 면허증, 한국 운전 면허증(영문), 거주지 증명 서류 (전기세 납부 영수증, 은행 계좌 증명서), 신용 카드 등 6 point 서류를 준비하고 불친절하기로 소문난 로다이 MVC를 찾았다. 서류확인을 마치자 현장에서 바로 사진을 찍고 임시 운전면허증을 발급해 주었다. 포토샵 하나 없는 민낯이라니. 이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필기시험 날짜가 두 달 후로 확정되었다.
뭐든 예약하고, 기다리는 게 일상인 미국생활의 첫 페이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차량 구입도 쉽지 않았다. 6주를 기다린 후에야 차를 구입할 수 있었고 그 사이 아들과 나는 우버를 타고 다녔다. 아들 학교는 가까웠지만 어학원은 하이웨이를 타야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로 주행 운전 연수를 3회 신청했다. 우버를 타고 오가던 길을 되짚으며 교통 표지판을 익히고 집, 학교, 어학원, H마트, Whole Foods, IKEA를 반복해서 운전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운전구간이었다.
미국에서 차 없이 산다는 건, 매일 숟가락 젓가락 없이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며 겁쟁이처럼 한 달이나 운전을 미뤘다. 한 걸음 나가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마침내, 우리 차량이 도착했다. 우버에서 벗어나 차량 독립을 하는 순간, 진정한 자유를 만났다. 그리고 숨 막히는 긴장감도 쌍둥이처럼 따라왔다.
아들이 발런티어 하러 가던 날, 코너만 돌았을 뿐인데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왕복 12차선 하이웨이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도 하고, 아주 잠깐 방심한 순간 차선을 잘못 들어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뉴욕까지 가는 날도 있었다.
"오 마이 갓! 아들, 어쩌지. 우리 지금 뉴욕 가는 중인가 봐."
목소리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아들은 평소와 달리 세상 다정하게 대답했다.
"엄마, 엄마, 침착하세요. 일단 직진만 하세요. 내비게이션은 내가 볼게"
위급한 와중에도 다정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위로가 되었다. 허드슨 강을 내려다볼 여유 같은 건 1그램도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조지 워싱턴 브릿지를 건너 다시 뉴저지로 돌아오는데 운전대를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어깨가 뻐근했다.
그 후로도 운전으로 인한 해프닝은 수도 없지만 조금씩 익숙해졌다.
여전히 겁이 많고 실수도 했지만, 우버 없이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5월 말 필기시험에 합격해 우편으로 운전면허증을 받았을 때는 또 하나의 독립을 이뤄낸 기분이었다.
3년 동안 3만 마일을 무사히 달려왔다.
때로는 길을 잘못 들어 당황하기도 하고, 주차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운전은 내게 단순한 기술 이상의 의미였다. 겁 많고 서툰 내가 이 낯선 땅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무탈하게 나와 함께 해준 J29 PYV 정말 고마워. 앞으로도 나와 함께 잘 달려가 보자. 그리고 용기 없던 시절 나와 함께 해준 우버에게도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아들과 함께 우버를 타고 뉴욕과 뉴저지를 넘나들던 시간은 두고두고 펼쳐보게 될 것 같다.
오늘의 메시지
두려움을 넘어선 한 걸음이 자립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