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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당근 Oct 24. 2021

20년을 일했는데 1년을 못 쉰다고?

계획했던 퇴사는 아니었지만 이참에 쉬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안식년이 있을리 없으니, 한 해 직장인에게 허락된 휴식이란 연차를 긁어모아 낼 수 있는 보름 정도의 휴가가 최대치일 거다. 그것도 온갖 눈치 보며 내야 하는 휴가지만.

나의 갑작스런 퇴사 소식에 가족과 친구들은 당분간 쉬면서 긴 여행도 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래, 적긴 해도 몇 달은 실업 급여도 나오겠다, 1년은 맘 편히 쉬어야지.'


1년이란 시간은 뭔가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정도는 쉬어야 그래도 쉰 것 같겠지.'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기간이었다.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어떻게 쉴 건지, 다시 일을 한다면 그동안 해왔던 일을 계속 할지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할지, 언제부터 구직 활동을 해야 할지 등등의 복잡한 생각은 일단 접어 두었다. 원래부터도 계획적인 인간은 아닌지라 말 그대로 당분간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게 나의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당분간'이란 시간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달랐던 모양이다.

퇴사 후 두어 달 되었을 무렵이었다. 전 직장 동료와 톡을 하던 중이었다.



OO - 이제 슬슬 알아보고 있죠?

나 - 뭘 알아봐?

OO - 계속 놀 건 아니잖아요.

나 - 그러고 싶지만 안 되겠지?ㅋ 근데 뭘 벌써 알아봐?

OO- 아예 다른 일 준비하는 거 아니면 이직할 곳 알아봐야죠.

나 - 난 한 1년은 그냥 쉬려고 했는데?

OO- 네? 이직할 생각이면 3개월 이상은 쉬지 마요.



경력 단절을 걱정하는 동료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현장에서 계속 일하던 사람을 선호하지, 누가 오래 쉬어 소위 감 떨어진 사람을 뽑고 싶겠냐는.

출산, 육아로 인해 1년 반 정도를 집에서 보낸 다른 동료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어렵게 이직을 했지만 경력 단절의 이유로 연봉을 높여 가기는커녕 깎여서 들어갔다며 오래 쉬면 손해라고 했다.


'와, 20년을 쉬지 않고 일했는데, 고작 1년을 못 쉰다고?'


그 오랜 시간을 같은 분야에서 일했는데, 1년 쉰다고 해서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설령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 세상이라지만 그사이 새로워진 트렌드를 따라가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경력 단절로 인한 구직의 어려움은 꼭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여성의 비율이 높기에 경력 단절 여성을 뜻하는 '경단녀'라는 말이 나오고, 왜 그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지 조금은 실감이 되었다. 내 경우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인한 불가피한 경력 단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력 단절이 두려워 조급한 마음에 충분한 휴식 없이 구직 활동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말하는 '경단녀'가 되기로 했다.


퇴사 후 '당분간' 쉬겠다던 휴식은 이제 거의 1년을 향해 간다.

앞으로 원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미래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퇴사 후 얼마간 쉬다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맘먹은 것처럼 퇴사 후 해 보고 싶었던 것을 이것저것 도전해 본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논(?)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이 시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닐 거다.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조바심 없이 보낸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또 코로나 19로 인한 반강제 '집콕'이긴 하지만, 다 큰 어른이 되어 언제 또 이렇게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집 마당의 꽃과 나무가 계절별로 달리 이렇게나 예쁘게 피고 졌었는지, 옥상 한 구석에 동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자기 집처럼 자리를 잡고 살았는지, 아침 나절 느긋하게 올라가는 약수터 길이 그렇게도 시원하고 상쾌한 건지 잘 모르고 살았을 것들을(알아 두면 쓸데없는 일일지 몰라도) 알게 되고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회사 밖의 세상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 충족감과 함께 조바심에 등 떠밀려서가 아닌, ‘이제 다시 나가서 일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또 그런 마음이라면 앞으로 좀 더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중요한 요소가 짜증스럽다면, 무슨 살 맛이 나겠는가?
특히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있어야 하는 것이 그렇다면.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참된 경제 활동이란 당신이 날마다 하는 일 바로 그것에서
스스로 큰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정부 없는 사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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