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건, 아마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큰 이유일 거다. 나 역시 회사 가기 싫다 싫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오랜 시간을 버티고 다녔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으니.
하지만 퇴사 이후 한동안은 경제적인 문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크게 와닿진 않았다.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덕을 보는 것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먹고 자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매달 드리던 용돈을 못 드리는 대신 평소 손도 안 대던 설거지며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하며 몸으로 열심히 때우면서 그럼 됐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약간의 뻔뻔함만 있다면 말이다.
물론 먹고 자는 일이 해결된다고 해서 돈 쓸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별러 왔던 여행이라도 길게 다녀오려면 목돈이 들고, 요즘은 취미 생활을 하려고 해도, 또 뭘 좀 배워 보려고 해도 다 돈이 드는 세상이니.
그렇다 보니 아직 '돈'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는 해도 직장 다닐 때의 소비 패턴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돈을 계획적으로 쓴 적도 소비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으로 여행 가고 싶으면 가고,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먹고, 사고 싶은 것 있으면 사고, 좋게 이야기하면 현재를 충실히 즐겼다 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경제 관념이 없었던 거다. 변명하자면, 사치품을 마구 사대는 것도 아니고 월급 안에서 내 형편에 맞게 쓴다면 괜찮지 않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물건을 사면서 이것이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집 안을 둘러보니 철마다 입을 옷이 옷장이 터져 나갈 듯 자리를 차지하고, 가방, 신발, 액세서리며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넘치게 많았다.
'와, 안 입는 옷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그동안 매일 입을 옷 없다고 했던 건 다 뭐지?'
그랬던 내가 퇴사 후 편한 추리닝 바지에 티셔츠 하나로 며칠을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를 활보하고 다니는 모습을 생각하니 참 어이없다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 시대가 시대인만큼 사람들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차려입을 일은 전혀 없고, 직장 다닐 때 입던 옷이며 가방, 액세서리 구두조차도 거의 입고 신을 일이 없어진 거다. 그렇다 보니 철이 지났음에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이 어찌나 많던지. 자연스럽게 집 안 곳곳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예전부터 날 잡아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시간 없다는 핑계로 늘 뒤로 미뤄 두었던 정리를 시작했다.
멀쩡한 물건을 두고 또 산 물건들, 유행에 따라 살짝살짝 바뀌지만 결국은 비슷비슷한 디자인의 물건들, 예전에 어떻게 이걸 입고 신었을까 싶은 물건들까지, 거짓말 살짝 보태서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정말 개념 없이 소비하며 살았구나!'
미니멀 라이프가 화두가 되어 사회적으로 관심이 높아져도 꿋꿋하게 맥시멀 라이프를 유지하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다 끄집어내 놓고 보니 '이건 아니지.' 싶었다.
필요하지 않은 이 많은 물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예전에 내게 잘 맞지 않았던 물건을 당근마켓에 올렸던 기억이 났다. 그땐 사진 찍어 올리고, 사람들 물음에 답하고, 시간 맞춰 만나야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생각보다 번거로워 한 번 이용하고는 말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는 게 시간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나 팔 물건이 많지 않은가.
나는 당근마켓에 물건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건 하나 올리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물건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가격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등 생각해야 할 것이 꽤나 많았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 둘 올리다 보니 어떻게 촬영해야 사진이 본래 상품의 이미지를 잘 보여 줄 수 있는지, 상품 설명을 어떻게 해야 포인트를 잘 전달할 수 있는지 등 '감'이 생겼다. 또 비슷한 상품들이 대략 어떤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지를 파악해 가격을 합리적으로(?) 책정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어깨너머로 주워들었던 마케팅을 이런 데서 활용할 줄이야.
몇몇 거래가 성사되는 경험이 생기자 귀찮게 여겨졌던 일이 재밌게까지 느껴졌다. 당근마켓에 정성스럽게 올린 물건들을 구매하겠다는 알람이 뜰 때마다 마치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장님마냥 흐믓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맛에 장사를 하는 건가?'
다달이 들어오던 월급이 끊기고 대신 통장 잔고가 슬슬 빠져나가는 중에 약간의 간식비(?)라도 생기는 게 나쁘진 않지만, 사실 중고 물건을 팔아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는가.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누군가에겐 필요한 물건으로 쓰여지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새것처럼 깨끗하지만 잘 들고 다니지 않아 자리만 차지하던 가방을 구매한 어떤 고객님(?)은 정말 맘에 드는 물건을 잘 샀다며 사진까지 찍어 감사 인사를 보내왔고, 어떤 분은 저렴하게 판매해 고맙다며 만나기로 한 장소에 시원한 음료수를 가지고 와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필요 없는 물건들이 집 안에서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하니 쌓여 있던 물건들이 정리되면서 마음까지 가벼워짐을 느꼈다. 버리면 충만해진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월급이 끊긴 불안한 일상이 오히려 돈과 소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가르침을 주었다고나 할까.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조화로운 삶> 중에서
소비도 습관이라 하루아침에 모든 걸 확 바꾸기는 어렵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현명한 소비 생활을 위한 작은 실천으로 오늘도 난 당근마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