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서는 송강호 가족이 모여 피자 박스 접는 장면이 나온다. 일자리가 없는 백수 가족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아르바이트인데, 단가가 워낙 낮다 보니 빠르게 많이 접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족들은 유튜브를 보며 피자 박스 빠르게 접는 방법을 공부하기도 한다. 벌어봐야 얼마 안 될 아르바이트에 그토록 진지한 그들의 모습에 큭큭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요즘도 저런 아르바이트가 있구나.’ 생각했다. 어렸을 적 기억에 그런 비슷한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다란 철사에 진주 구슬을 꿴다거나 종이를 접고 풀칠해 봉투를 만들며 부업을 하던 모습 말이다.
갑자기 케케묵은 옛날 부업 이야기를 꺼내는 건 요즘 새롭게 알게 된 일거리 때문이다.
이전 경력을 살려서 갈 직장을 구하고 있지만, 넘치는 경력과 나이로 인한 취업의 문턱이 꽤나 높음을 새삼 깨닫고 한 가지 길만을 고집할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자리는 없는지 샛길도 기웃거리는 중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다른 일자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젊은 시절의 열정과 패기는 진작에 사라져버린 까닭인지, 오랜 시간 그래도 원하는 일을 할 만큼은 했다는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꼭 그동안 해왔던 그 일이 아니더라도, 더 나이 먹은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일들 중 할 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지 찾아보려고 한다. 마음은 그렇게 유연하게 바꿔 먹고 더 넓게 열었지만, 실상 선택의 폭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자리를 찾고 있던 친구가 구인 공고 하나를 보내왔다.
‘AI 인공지능 라벨러? 이름부터 뽀대 나네. 이 일은 대체 뭐지?’
4차 산업혁명시대라 일컬어지는 요즘, AI,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듣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AI 인공지능 라벨러’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관련된 일자리일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미래 지향적인 느낌에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사라질 사양 직종도 많다던데, 이 일은 향후 수요가 더 커질 성장 직종이 아닐까? 게다가 약간의 교육만 받으면 할 수 있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재택 아르바이트라니!
인생 이모작을 넘어 이제는 동시 다모작이라는 시대에, 또 여러 개의 ‘부캐’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트렌드인 이 시대에 다시 어느 직장에 들어가 매여 일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일거리를 구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름도 거창한 ‘AI 인공지능 라벨러’가 하는 일은 여러 가지 데이터를 목적에 맞게 가공하는 일이었다. AI 인공지능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대량의 데이터가 필요한데, 알고 보니 그 학습 데이터는 인간들의 ‘노가다’로 가공되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그 또한 언젠가는 인간의 노동력에서 기계로 대체될 날이 오겠지만). 데이터를 가공하는 일거리 중에는 외국어 어학 능력 등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도 있지만, 화면의 지정된 사람이나 차량, 시설물들을 바운딩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태깅하는 단순 업무가 초보 라벨러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컴퓨터와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특별한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인 만큼 단가 역시 무척 낮았지만, 놀며 시간을 보내느니 쉬엄쉬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항간에 왜 이 일을 ‘디지털 인형 눈알 붙이기’라고 하는지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이니 익숙하지 않아 느린 탓도 있겠지만, 그 속도로 하면 대체 이 일을 해서 얼마의 돈을 벌 수 있을는지. 이 또한 피자 박스 접기 아르바이트처럼 빠르게 많이 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러기엔 손목이며 어깨며 눈이며 안 아픈 곳이 없으니 원.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공지능 기술 발전에 일조하는 일이라는 부푼 마음은 이내 사라지고,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기계를 위해 혹사당하는 인간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경험이었달까.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가 중요해진 시대라던데, 실제로 양질의 일거리가 많아진다면 ‘직장’이라는 굴레에 매이지 않고도 삶을 좀 더 풍요롭고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양질의 일거리를 구하는 것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