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쓰당근 Jan 22. 2021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퇴사한 지 이제 일 년이 넘어가고 있다. 주위에선 경력 단절을 걱정하며 너무 늦기 전에 다시 취업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꼭 일 년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 년이라는 기간은 어떤 야무진 계획에 의해 계산된 시간이라기보단 그 정도는 쉬어야 먼 곳으로 긴 여행이라도 한번 다녀오고, 쉬엄쉬엄 여가 생활도 즐기며 ‘이만하면 잘 쉬었다.’라고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내 마음이 정한 시간이었다. 또 그중 몇 달간은 실업 급여도 받을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 큰 부담감 없이 지낼 수 있겠다 싶은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코로나라는 놈이 꿈꾸었던 해외로의 긴 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맘 편히 다녀올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하긴 이 바이러스와의 길고 긴 싸움으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지금도 일선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나 휴업과 폐업 등으로 생계에 타격을 입고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불발된 여행 타령이나 하는 것이 사치임을 안다. 그렇지만 고대하던 이 기나긴 자유 시간을 집에서만 보내야 하는 현실이 한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많으면 뭐 하나.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일상적인 일조차 조심스러운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평범한 일상도 맘껏 누리지 못하는 이 상황이 우울하지만, 집 밖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은 코로나 시국에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대신 집에서 마스크 없이 자유로이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면 감사할 일이라고 혼자 위안을 하기도 했다.


하고 싶던 일들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그 일 년이란 유예 기간이 지나고 이제 슬슬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니 이 코로나 시국이 좀 더 엄중하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몇십 년 만에 온 한파만큼이나 취업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뉴스는 계속 봐왔어도 내 현실 밖의 일이었는데, 내가 구직 시장에 뛰어든 당사자가 되고 나니 이 혹한의 상황이 정말 내 일이 된 거다.

너무 오랫동안 이용하지 않아 휴면 계정이 되어 버린 구직 사이트의 계정을 살리고, 그간 집에서만 뒹굴고 지낸 덕에 확찐자(?)가 된 요즘이 사진 찍을 좋은 타이밍은 아니란 건 알지만 포토샵의 눈부신 기술에 기대를 걸고 이력서에 쓸 사진도 새로 찍었다. 예전 이력서를 수정하고, 자소서도 정성껏(?) 준비했다. 오랜 직장 생활만큼 빽빽해진 이력서와 자소서가 퍽 무겁게 느껴졌다.

비록 그려왔던 휴식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쳇바퀴 도는 듯한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집에서 무념무상으로 놀다 보니 사실 가슴 한구석엔 일하러 다시 직장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꼼지락댄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집에서 놀다 보니 좀이 쑤셔 회사에 나가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던데, 아직 내겐 휴식의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단순히 일하기 싫다기보다는 회사라는 조직의 복잡하고 치열한 경쟁사회에 또다시 뛰어들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꼭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이상 우선은 직장부터 구하고 일하면서 훗날 다른 길을 기약하자 마음을 다잡으며 구직 사이트를 돌아다닌다.

내가 직장을 구하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입맛에 딱 맞는 일자리가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입사 지원 서류를 넣을 곳 찾기조차 녹록지 않다. 나이나 경력이 회사에서 원하는 것보다 넘치는 걸 알면서도 몇 군데 입사 지원서를 냈지만, 내게 응답한 곳은 없었다. 수백 군데 지원서를 낸다는 취준생들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고, 재취업에 성공한 한 지인도 수십 곳의 회사에 지원했었다니 이제 겨우 몇 군데 지원해서 떨어진 걸 가지고 무슨 푸념을 할까 싶다가도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다 보면 원하는 일자리를 찾을  있을까. 다른 이들처럼 수십  수백 번이고 두드리면 취업의 문이 다시 열릴  있을까?'


그러다 문득 감수성 폭발하던 사춘기 시절 일기장에 꾹꾹 눌러 베껴 썼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시라면 평소에 한 자도 읽지 않고 사는데, 뜬금없이 왜 이 시 구절이 생각난 건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생각지도 않았던 이 시 구절이 갑자기 떠오른 건,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뭔가 마음의 위로가 필요했었나 보다.


‘그래,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자.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곧 기쁨이 날이 오겠지!’

  



이전 19화 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인형 눈알 붙이기를 하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