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2년 2월 25일 삼성서울병원 암교육센터 정규 세미나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암 재발 두려움을 가진 환자와의 대화’를 주제로 한 강연을 지면으로 옮긴 것입니다.
저는 2012년 삼성서울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된 후에 노인정신의학 세부 전문의 트레이닝을 추가로 받고 미국으로 건너와 다시 정신과 전문의 수련을 거친 후 호스피스 완화의료 세부 전문의 트레이닝을 받은 의사입니다.
먼저 노인정신의학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떠올리실지 궁금한데요. 저는 노인의 삶은 상실의 삶이라고 한마디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노인이 된 우리가 겪는 일을 들여다볼까요. 자녀들이 성장하여 떠나가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신체적인 건강을 잃고, 또렷하던 기억력과 인지기능도 서서히 상실하죠. 주변의 친구들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하기도 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차고 희망에 넘쳤던 젊은 시절의 청춘을 떠나보내고 모든 종류의 상실을 온몸으로 겪는 것이죠. 더 이상 삶에 좋은 일이 남아있을까 절망하게 되고 상실감에 빠져있는 이들의 정신건강을 돌보는 일이 저 같은 노인 정신의학 전문의의 역할입니다.
제가 삼성서울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환자군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암을 진단받고 정신과 증상을 새롭게 겪고 있는 환자들입니다. 이들도 역시 상실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강했던 때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병을 가진 채로, 병이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을 가진 채로, 이 병으로 결국 삶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저는 이런 이들의 삶이 여전히 살만한 삶일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미국으로 가게 된 이유입니다. 정신종양학 학문이 조금 더 빨리 발달되고 환자를 돕는 시스템이 좀 더 잘 구축되어 있는 곳에서 더 많은 환자들을 만나 경험하고 내가 만나는 환자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제가 미국에서 다시 정신과 레지던트를 시작한 계기인 것입니다.
저는 정신의학을 좋은 삶에 대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서 좋은 삶은 후회가 적은 삶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를 한번 더 되풀이해서 산다고 할 때 나는 지금과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살 것인지,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적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이 시간을 조금 더 좋은 삶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정신과 레지던트를 하던 중에 호스피스 완화의료라는 학문을 접하게 됩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완치될 수 없는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고, 그 병으로 인해서 생명이 단축될 가능성이 높은 환자들을 위한 학문입니다. 정신종양학과 비슷하지요? 거기에 더해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 저는 좋은 삶에 대해서만 고민해왔지, 좋은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환자를 보면서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은 삶을 더 잘 알려면 좋은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배워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 생각이 저를 호스피스 완화의료 펠로우쉽으로 이끌었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공부하면서 암뿐만 아니라 치유될 수 없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고, 그 병으로 인해서 삶의 질이 심각하게 저하된 환자들의 정신건강을 돌볼 수 있었고, 그들이 가진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죽어가는 과정이 어떻게 하면 조금 덜 고통스러운지, 궁극에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배움을 바탕으로 최근에 책을 한 권 쓰게 되었고 그 제목이 ‘죽음을 읽는 시간’입니다. 이 책 덕분에 삼성서울병원 암교육센터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강연의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암 재발 두려움을 가진 환자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지만 제가 들려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결국 암이 주는 삶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