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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페디엠 Aug 24. 2020

아무도 모른다

어른들은 모르는 슬픈 동화

  고레에다 히로카주 감독은 1995년 환상의 빛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 오셀리 오니상(최우수 감독상 수상)을 수상한 사람으로 그를 작품을 좋아하는 마니아 층이 있는 감독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주 감독은 와세대 대학(문학부)을 졸업하고 10여 년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마치 다큐멘터리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엄청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생존의 이야기가 묻어나고 있습니다. 인생의 큰 사고를 겪고 난 이후의 삶을 먹먹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합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이 친엄마에게 버려졌다는 상실과 가장 어린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이후에도 견뎌내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영화는 아이들의 얼굴에 대한 클로즈업을 많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감독은 1년 이상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아이들이 귀여워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얼굴을 담아내었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현실의 잔인성을 희석시키게 되었습니다. 카메라는 관객을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아이들의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찰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내가 저 상황이라면'이라는 생각보다는 '저런 아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키라가 가지는 분노는 이제 우리 모두의 분노로 전이될 수 있게 합니다. 1   

  엄마가 없어도 처음 겨울에는 어떻게든 견뎌낸 아이들이 봄과 여름을 지나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악화되고 상처를 받는 순간마다 아이들은 침묵하며 외부를 응시합니다. 카메라는 유독 손을 자주 클로즈업하며 허전하고 외로운 사랑의 손길을 간구하는 아이들의 부각합니다. 아이들 가난과 배고픔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사회에 아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마치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지하실 골방에 소녀를 방치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 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 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유토피아인 오멜라스는 그 아이가 지하실에서 나오는 순간 유토피아가 아닌 곳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의 불행이 오멜라스 사람들의 행복을 담보하는 조건과 계약이라고 말합니다.  

  

   아이의 손은 영화의 마지막 다시 클로즈업됩니다. 사고로 죽은 막내 유키를 하네다 공항에 묻고 아키라는 손을 심하게 떱니다. 그 순간 여자 친구 사키는 아키라의 손을 잡아줍니다. 슬픔을 견뎌내도록 돕는 것은 오멜라스의 사람들이 아닌 슬픔을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사키도 학교에서 왕따로 상처를 입은 학생입니다. 학교를 가지 않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아키라 가족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도와주는 존재가 됩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키라를 돕고 심지어 유키의 시신을 하네다 공항앞에 묻는 일도 돕습니다. 사키의 모습을 통해 상처 입은 사람만이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화를 모태로 하는 영화입니다. 1988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 이 사건은 15년 전 한 남녀의 동거에서 비롯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출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


   이웃에 대한 무관심 

  아이들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 같이 사는 주변 이웃 그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만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일은 너무도 쉽게 잔혹하고 슬픈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긴급복지제도를 만들게 된 슬픈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4년 대구에서 아이가 굶어 죽은 사고”입니다. 네 살배기 남자 어린이가 집 안방 장롱 안에서 굶어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2004년 대구 불로동 김 아무개(39·노동)씨 집 안방 장롱에서 김 씨의 네 살짜리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된 것입니다. 당시 김 씨의 아들은 외상 등 타살 흔적은 없었지만, 몸이 바짝 말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였습니다. 또 방 안에서는 김 씨의 두 살배기 딸이 영양실조로 목숨이 위험한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2년 전부터 김 씨를 도와온 대구 불로성당 사회복지위원장 구자문(53)씨는 “김 군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치와 쌀을 전해주기 위해 집에 들렀더니 아버지 김 씨가 장롱문을 열어 죽은 아들을 보여줬다”라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경찰에서 “지난 16일 일을 나간 사이,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는 아내가 몸이 아파 며칠째 음식을 먹지 못하다 숨진 아들을 장롱 속에 넣어뒀다”며 “당시 겁이 나 신고를 하지 못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8년 전 동갑내기 부인과 결혼한 김 씨는 그동안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왔으나, 최근 경기가 좋지 않아 일감이 줄면서 가족들의 끼니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 씨는 상가 건물 3층에 1달 25만 원짜리 사글셋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경찰은 집안의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등 먹을거리가 거의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3

    영화와 그 모티브가 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과 우리나라의 대구 불로동의 사건를 보면서 과연 누가 이것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는가?라고 말하며 책임을 지우는데  익숙합니다. 1차적으로 무책임한 어머니, 무책임한 아버지들에게 우리는 그 책임을 지우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물론, 무책임한 부모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개인적이고 개별화되어서 이웃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이러한 소외계층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책임을 개인이나 사회에서 찾으며 비난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멜리아를 떠나는 사람들에서와 같이 지하실에 갇혀있는 아이가 있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 

1 주진숙, 박진희 2013. “고레에다 히로카즈 론”. 영화연구 55호.

2  '일본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 자세히 알려주세요' - 네이버 지식 iN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2&docId=46611470&qb=7J2867O4IOuCmOyLnOyKpOqwgOuqqOydmCDrsoTrprzrsJvsnYAgNOuCqOunpCD sgqzqsbQg7J6Q7IS47Z6IIOyVjOugpOyjvOyEuOyal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

3 한겨레 신문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12/005000000200412191601001.html) 

* 사진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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