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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페디엠 Sep 07. 2020

완득이

왜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가?

  완득이 가족은 소외된 약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장애인, 어머니는 필리핀(원작은 베트남) 이주여성, 지적장애를 가진 삼촌(친삼촌은 아님), 빈민으로 선정되어 학교에서는 수급품을 받고 있습니다. 완득이 자신도 스스로 “가출을 위한 모든 조건이 다 갖춰졌다” 고 이야기하지만 가출을 알아줄 아버지는 장터를 떠돌며 장사를 하고 있기에 가출한 본인보다도 늦게 돌아올 확률이 큽니다. 한없이 어두운 현실이지만 영화는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똥주 선생이 있고 함께하는 따뜻한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똥주 선생은 가난에 대해 “가난한 게 쪽팔린 게 아니라 굶어 죽는 게 쪽팔린 거야!”가난, 즉 빈곤을 볼 때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나태, 무지, 알코올 중독 등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도 있고 IMF 사태를 통해 뼈저리게 알게 된 사회구조적인 잘못으로도 볼 수도 있습니다. 흑백논리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완득이 가족의 가난이 완득이의 잘못은 아닙니다. 완득이와 그 가족의 책임이 아닌 이 사회가 만들어낸 불평등의 결과이기 때문에 완득이는 기죽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가난한 사람들을 너무도 기죽게 만듭니다. 


똥주 선생은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마르크스는 생각했지왜 가난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고 부자인 놈들은 처먹고 빈둥빈둥 놀아도 부자가 되는가.”    

  

   자본주의는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이 가장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이 아닌,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가장 많은 소득을 얻는 구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똥주 선생은 말합니다. 왜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가?, 결국은 생산수단의 사유화 때문이야.”


  생산수단의 사유화 이게 무슨 말인가? 

  예전에는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가진 봉건영주, 지주가 엄청난 부를 누리는 사회였습니다. 농노나 소작농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수확을 거두어도 한해 받기로 되어 있는 품삯 이외에는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건물주, 공장, 가게라는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이 부를 더욱더 쌓아가는 구조입니다. 


  월급이라는 품삯을 받는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수확을 올려도 한 달에 받기로 되어 있는 월급 이상은 받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그러한 구조이니 생산수단을 공유화하자는 말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너도 나도 생산수단을 소유하자! 예를 들어 건물주가 되자... 이러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회가 진정 행복하고 살기 좋은 사회일까요?.. 하여간 그것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사회는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인정머리 없는 자본가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똥주 선생은 자본가인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베트남에서 온 티로 누나 기억하시지요. 고등학교 때 필통 판금 하다 손가락 잘린 그 여자 그냥 돌려보내셨잖아요. 치료라도 해서 보내셨어야지요. 보상금이라도 줬어요. 손등이 썩을 때까지 부려먹다가 쫓았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왜 그러세요. 그 사람들 아버지 공장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에요. 아 맞다. 아버지는 원래 약자에게는 엄청 강하신 분이셨지". 자본가가 이미 된 사람, 그리고 앞으로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화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의 수준을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완득이가 어머니와 함께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사는 모습에서 가게 주인은 무의식 중에 완득이 어머니를 무시합니다. 신발도 눈에 보이는 것을 마구 들이밀고 "아니 근데 저쪽 사람 같은데, 둘이 무슨 사이예요".라는 실례되는 질문도 하고 잔돈 2천 원도 안 주려고 합니다. 자꾸 물어보는 신발가게 주인의 말에 밖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던 완득이는 "어머니예요, 어머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동남아 여성을 보면 첫인상에서 무의식 중 낙인(Stigma)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진정한 모습은 생각하지 않고 동남아 여성은 노동자일 것 같고 사회적으로 마이너리티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실제는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우리가 가상적으로 만들어 버린 정체성을 그대로 믿어버릴 수 있습니다. 


   휴머니즘의 모습을 똥주 선생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똥주 선생은 처음에는 완득이를 못살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었습니다. 인간의 , 휴머니즘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가난한 가정에 햇반을 전달하는 택배기사가 아닌 똥주 선생과 같이 ‘약자’의 삶 속에 들어가 함께 살아내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약자’를 위한다면 그 세계 속에 들어가 일상생활을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햇반을 뺏어 먹는 몰상식한 사람처럼 볼 수도 있지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닌 함께하는 ‘우리’의 관계로 보면 의미 있는 모습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고 의존해야 하는 사람의 인식의 프레임에서 동등됨의 관계로 심지어 도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모습에서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 잃어도 자존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존감을 건드려서도 안됩니다. 


  영화의 멋진 전개 중 하나가 완득이의 킥복싱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누군가 도움을 주어 지지리 궁상인 사람이 놀랍게 성공한다라는 틀에서 벗어나 완득이는 똥주나 다른 사람이 권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킥복싱'의 길을 찾아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는 킥복싱으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실컷 얻어맞지만 포기하지 않고 더욱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음식이 아닌 스스로 그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손뼉 쳐주는 일 이외에는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똥주 선생은 사재를 털고 융자를 더해 교회(복지센터)를 마련합니다.

   지역사회 안에 "함께"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함께하는 공간이 마련될 때 소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공간은 약자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과 쉴 수 있는 휴식이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완득이 아버지와 지적장애인 삼촌은 댄스 강사로

        욕쟁이 이웃은 벽화 그리는 일로

             욕쟁이의 여동생인 무협소설가는 한글 강사로

                  완득이 어머니는 요리 강사로 일하게 됩니다. 

  또한 마을 이웃들은 좋은 수업을 값싸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모두에게 좋은 이러한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 까요! 

똥주 선생이 사재를 털어 만든 다문화센터(교회)

  한동일 선생님은 중학교 때 사회과학 서적을 통해 "부모님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이유가 사회적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고, '인간적 사회주의자’를 꿈꾸게 됐다”라고 말합니다.  <로마법 수업>에서 “노예의 소유주들은 은근히 노예가 가정을 갖기를 바라는데 그건 노예에게서 출생한 자녀가 그대로 주인의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로마 사회의 교묘한 출산장려책과 한국의 저출산 위기론을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내 아이가 사회 지배층을 먹여 살리는 하층계급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젊은 이들이 간파하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것으로도 본 것입니다. 

  코로나 19 시대 우리의 민낯이 드러나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모두가 아류 건물주가 되고 싶어하는 지금, 휴머니즘을 돌아봅니다. 똥주 선생이 영화의 마지막 손에 들고 있던 그 책제목 처럼 "휴머니즘의 옹호"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제도와 시스템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똥주 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희망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11090600045#csidx781e357d184fc20990d060afef95d2b 

(경향신문 19.11.09). 


* 사진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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