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무렵, 부모님은 내게 5천만원 정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농사지으시면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크면 내가 부모님이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꿈꾸었다. 그런데, 실제로 성인이 되고 보니 부모님이 그러한 부탁을 하셨다. 어쩌면 어릴 적 내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 속 버킷리스트가 실현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부모님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나는 여러가지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우선 첫 직장 생활에서 발령 받은 부서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성과가 좀 처럼 나지 않았던 우리 부서는 결국 절반 이상이 퇴사하고 부서 이동을 신청했고 본부 내에서 소외된 채로 남아졌다. 물론 챙겨주신 분들도 너무 많았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는 고립감과 좌절감이 크게 느꼈졌다.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아가야할 시기에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게 너무나 답답하고 참 괴로웠다.
다른 하나는 멀쩡한 직장을 다니는 지인에게 이미 돈을 빌려줬는데, 돈 갚는다는 소식이 없어 정정긍긍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지인은 코인으로 큰 돈을 벌자 좋은 직장을 퇴사를 했고 이후 코인으로 돈을 잃자 급하게 주변에 급전을 빌리러 다녔었다. 지인은 한동안 잠적했다. 그렇게 큰 돈은 아니었으나, 믿고 있었던 지인과의 추억이 깡그리 짓밟아진 느낌이라 돈 이상의 상처가 컸다. 그 외에도 나를 이용하려는 주변 지인들과 회사 내 알게 모르게 있던 따돌림(?)으로 여러가지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다. 이런 시기에 부모님께 금전적인 부탁을 받았으니 내 속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는 신앙생활에서도 멀어졌던 터라 정말 진퇴양난 그 자체로 어떻게 기댈 곳이 없었던 시기였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돈 관계는 안하는게 좋다고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부모님이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막 2년 된 내게 5천만 은 정말 큰 돈이었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은 결코 허투로 돈을 쓰거나 할 분이 아니셨고 충분히 사정을 이해하였다. 다만, 그럼에도 내가 직접 내 명의의 신용대출을 받고 계좌이체를 통해 부모님께 전달하는 순간과 그러한 현실이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았다. 은행에 가서는 부모님께 돈을 받는 게 아니라, 보내는 경우라고 설명했으나 은행원은 헷갈려 했다. 보통은 그 반대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다시 설명드려서 내 명의의 대출을 받고서 돈을 송부하는 것이라 재차 설명했어야 했다.
그렇게 돈을 보내드리고는 한동안 계속 끙끙 앓았다. 처음에는 이자를 부모님이 내 주시기로 하였는데, 그마저도 어렵게 되어 급하게 내가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하여 신용대출을 갚았다. 그리고 그 후 줄 곧 늦은 밤 공원을 걸으며 계속 푸념했다.
'서울에 무일푼으로 와서, 원룸 보증금이며 대학교 학비, 생활비, 월세 아니, 거슬러 가서 학원도 안 가고 대학가구, 평생 용돈도 안 받으면서 내가 매번 아르바이트하면서 벌고 살아왔는데 나한테 너무 하신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이 오히려 많이 도와준다는데. 나는 안 먹고 안 쓰면서 열심히 모아서 좀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다른 친구들 만큼 잘 살면 안되는건가?..‘
그리고 그 앓음은 어느 순간에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꼈다.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 올랐고 나름대로 절약해서 나중에 그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할만큼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유주고 싶은 내 작은 복수심은 촛불처럼 서서히 꺼지는 것만 같았다. 유튜브에는 나와 비슷한 사연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다들 하는 푸념을 듣다보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동시에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자꾸만 키우게 만들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랜만에 뵙는 부모님께 모진 말로 원망도 하고 핀잔도 많이 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밝히긴 어렵지만, 부모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었다(정말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충분히 내가 도울 수 있는 상황이어서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때는 내 마음속의 여러가지 어려움과 유튜브를 통한 배가된 원망이 너무나 컸었다.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키워갔다.
이후 직장을 옮기고, 사람들과의 관계와 신앙생활, 여러면에서 회복이 되면서 불안정한 내 상황은 여러모로 안정되었다. 상황이 안정되면서 내 마음을 돌이켜 볼 시간이 생겼다. 돌이켜 보니, 당시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너무 맹목적으로 돈을 쫓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부모님께 도움이 된다면 참 감사한 것 같았다. 이후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잦아들었고, 원망을 배가시키던 자극적인 유튜브도 그만 보게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르긴 했지만, 부모님의 상황이 차츰 해결되면서 부모님께 다시 돈을 돌려받았다. 부모님의 당시 상황도 너무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것이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난처한 부모님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물론 이제 두 번 다시 지인과의 거래는 없을 것 같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부모님을 원망하는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절대 가족이더라도 함부로 금전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닌 걸 깨달았다. 내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라 나를 태어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이렇게 커질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반대로 누군가에게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노력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란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물론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이해가 되긴 하지만, 결코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사회 생활을 하는 여러 직장인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경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코 내가 부모님이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드리라는 것이 아니다. 지인과의 돈 거래는 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님이더라도 결코 안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참 연약해서 돈 하나에 원망이 더 강해질 수도 있어서 서로를 위해서라도 돈 거래는 제발하지 않기를 충고드린다. 그리고 정말 드린다면, 못 받고 그냥 준다고 생각해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돈 거래는 절대, 제발 부탁이니 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나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길 바라고, 겪고 계시다면 두 번 다시는 빌려드리는 일은 없도록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