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릴지언정 결코 걷지 않는다
아직도 JTBC 서울 마라톤 추가 접수에 당첨되었다는 안내 메시지를 받은 날을 잊을 수 없다. 완주 여부를 떠나 마라톤 풀 코스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으며 혼자 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온몸으로 환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어떻게 풀 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다가왔고, 부단히런 대장님이신 아주나이스님의 도움을 받아 제주 전지훈련을 통해 거리주 훈련에 대한 자신감으로 복귀하자마자 바로 거리주 30K를 하면서 용기를 얻었다.
처음 30K 거리주 훈련을 하고 정말 힘들었지만 또 한 번의 거리주 훈련을 통해 더 큰 자신감을 얻어 12km만 더 달리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초보자다운 발생이며 달리기를 산술적인 계산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럽고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대회 전날, 토요일 감정코칭 교육을 받고 김해공항에서 마지막 비행기 탑승을 기다렸는데 몇 번의 연착으로 인해 김포공항이 아닌 인천공항에 착륙했고, 본의 아니게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겨우 4시간 만에 대회에 출전했다. 지난주 감기로 인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컨디션이 더 나빠졌다.
새벽 5시 가볍게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오며 과연 완주를 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해보기로 했다. 짐보관을 위해 6시에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도착했지만 이곳은 이미 수많은 러너들이 집결해 있었다. 우리나라 3대 마라톤 대회 중 하나라서 그런지 정말 많았다.
준비한 대로 환복하고 짐을 보관한 후 11월 초 새벽, 쌀쌀한 날씨와 조우하기 위해 우의를 입고 한 시간 이상 몸을 풀었다. 사실 오른쪽 발목 상태도 좋지 않고, 부족한 수면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뇌를 속이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나는 8시간 숙면을 취했다"를 반복하며 컨디션이 좋다는 긍정확언을 했고 아마도 100번 이상은 홀로 되뇌었을 것이다. 가장 오랜 시간 웜업을 한 이유 중 하나가 이렇게 뇌를 속이기 위함이었고, 다행히도 단순한 뇌가 속고 있어 컨디션이 점점 좋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출발 전 화장실에 들어 속을 비우고 "절대 페이스 메이커가 눈에서 사라지게 하지 말라"라는 대장님께서 당부한 말을 떠올리며 출반선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 참가했던 모든 대회의 참가자를 합쳐도 부족해 보이는 인파 가운데 풀 코스 G조의 대기줄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5시간 안에 완주하는 상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출발 전 나만의 페이스 전략을 다시금 떠올리며 가민 워치의 알람을 설정했고 즐겁게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풀 코스 참가자 중 가장 마지막 G조가 출발했고 그들 가운데 첫 마라톤 풀 코스에 도전하는 나도 힘차게 앞으로 달렸다.
우의를 입고 있어 불편했지만 일단 추위를 막아야만 했기에 5km 지점에서 벗기로 했다. 훈련했던 대로 630 페이스에 맞춰 달렸고 마포대교를 넘을 때부터 약간의 오르막이 있었지만 21km 지점까지는 전략에 딱 맞았다. 35km 지점부터 찾아온다는 사점에 대비해 에너지겔과 초코바를 먹으며 5시간 페이스 메이커 한창 앞에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점이 30km 지점부터 찾아왔고 이때부터 나는 당황했는데 페이스 유지는커녕 아무리 힘을 줘도 페이스가 빨라지지 않았다. 더 심각하게 허벅지에 쥐가 나기 시작하면서 다리의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 보충 시점이 아니었지만 서둘러 에너지겔을 먹었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잠실타워가 보이면 거의 다 왔다는 선배님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힘을 내보려 했지만 주변의 참가자들이 한두 명씩 걷는 사람들이 보였고 나도 포기하고 싶다는 어두운 생각이 점점 마음속에 차올랐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저서, <행동하지 않으면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에서 읽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분명히 할 수 있다"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쳤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분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힘을 실어주셨고, 과일과 꿀물 특히 자양강장제까지 주시며 응원하시는 분들 덕분에 36km 지점까지 왔는 데 최고의 위기가 내 앞에 맹수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수서 IC 인근부터 시작되는 엄청난 오르막 길이었다.
서울에서 근무할 때 몇 번 차를 이용해 다녔지만 한 번도 이 길이 오르막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도 오르기 힘든 높은 오르막길 앞에서 나는 완주와 포기의 갈림길에 놓였다. 만약 통증과 타협하며 걷는다면 결코 완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달릴지언정 절대 걷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묵묵히 달렸다. 한참 전부터 가민 워치는 페이스가 느리다고 알려주었지만 어떤 노력을 해도 페이스가 빨라지지 않았기에 멈추지 않기만을 바랬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라 오르막길 끝에 도달했으나 또 다른 위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의 감각이 없어진 상태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은 오르막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라톤 풀 코스 완주 후 계단을 내려가기 힘든 것과 동일한 이치인데 초보자인 나는 이것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알 수도 없었다. 미리 알았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내리막길이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처음 알았다.
이미 아무런 감각이 없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평지에 도달했지만 아무리 페이스를 올리고 싶어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강물에 떠 내려가는 통나무처럼 나는 가만히 있고 주변의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제발 몸에 에너지가 단 한 방울이라도 남아 끝까지 완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저 멀리 결승선이 보이기에 마지막 힘을 발휘하고 싶었으나 이미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그저 물리학의 법칙으로 인해 움직임을 지속하는 물체에 불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정신은 오직 완주만을 간절히 바라는 고등생물이었다. 그래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라는 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풀 코스를 완주하신 선배님들의 말에 의하면 결승선 앞에서는 두 가지 반응이 대부분인데 해맑게 웃거나 울음을 터트리는데 나는 무표정으로 들어왔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완주만을 바랬고 5시간 안에 완주하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대회 기록 기준 5시간 7분으로 42.195km를 완주했다.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쓰러지는 분도 있었지만 나는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며 앞으로 갔다. 아마도 멈추고 싶었지만 계속 멈추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외쳤기에 멈추기를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5시간 안에 완주하겠다는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간절한 바람대로 결국 절대 걷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다.
아무런 감각이 없는 다리를 이끌어 완주 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온 세상이 내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생각하는 대로 간절히 원하는 대로 된다는 것을 증명했고 배웠다. 다만 그 과정 속에 노력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론다 번의 저서, <시크릿>에서 간절히 원하고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아쉽게도 그 가운데는 노력의 순간이 보이지 않는다. 원한다고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지난여름을 되돌아보면 무더위와 싸우며 달렸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노력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만약 제주 전지훈련을 가지 않았더라면 거리주 훈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완주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절대 불가능하며 30km 지점 어딘가에서 나도 걸으면서 자기 합리화를 위한 핑곗거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의 달리기를 위해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만의 달리기 훈련을 했고 누군가에게는 부족해 보였을 수도 있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 경험 부족으로 인해 사점이 빨리 찾아왔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절대 걷지 않고 끝까지 달리며 나의 첫 마라톤 폴 코스 도전은 완주라는 결실을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 완주한 내가 대견스럽다. 특히 걷지 않고 끝까지 달린 과정이 너무 마음에 들며 포기하지 않고 하려고 노력한 자세를 칭찬하고 싶다. 아직도 내 다리를 지배하는 통증에서 해방되지 못 했지만 이 또한 성장의 과정이자 흔적이라 믿는다.
이제 25년 JTBC 서울 마라톤은 끝났다. 조금만 더 컨디션이 좋았더라면 5시간 안에 완주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5시간 안에 완주하지 못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혹여 5시간 안에 완주했더라면 자만심에 빠져 더 성장할 포인트를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험을 통해 배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이번 대회에서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낀 부분을 집중적으로 훈련할 것이다. 대회는 끝났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다음 대회를 준비하며 회복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5시간 넘게 사투를 벌린 내 몸과 정신이 너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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