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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04. 2021

죽음으로 이어진 삶

그래도 살아야 한다.

날이 어둑해지려 해서 산으로 가는 건 포기하고 마을 옆산을 올랐다.

10여분 올라가는 직선 코스로 제법 가파르다. 시간 대비 운동효과도 좋고 정상에 오르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시원한 바람은 근사한 식사 뒤에 딸려오는 아이스크림 맛 후식이다. 하지만 그 길 입구에는 맛없는 애피타이저 격인 개들이 반긴다. 어느 날은 개가 목줄이 풀려 있어 아주 식겁한 적도 있었지만 그 길만 잘 통과하면 어떤 장애물도 사라진다. 정상에 오르면 맛없는 애피타이저는 금세 용서가 된다.


하지만 이 길은 길이 아니라 무덤을 오르기 위해 낸 길이었다.

오르는 길마다 무덤이 있었다. 작은 무덤 몇 개를 지나면 이윽고 큰 무덤 무리가 보였고 더 높이 오르면 산 정상에 사이좋은 두 개의 무덤이 보인다. 남향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잠깐 무덤 앞 언덕에 걸터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서늘하였지만 간담이 서늘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덤 앞에 두고 간담이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지만 밤이 아니라서 덜 무섭다. 아니 하나도 안 무섭다.


죽은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은 밤이 되면 둘로 쪼개져 귀신이 나올 수도 있다. 지금은 덜 무섭지만 예전에는 무서웠다.  어릴 적 TV 프로그램였던 <전설의 고향>에서는 한을 품은 귀신들이 무덤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나온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얀 소복을 입었다. 무덤 안은 흙이라 하얀색은 곤란할 터인데 반드시 하얀색이어야 한다. 몇십 년은 감지 않은 머리에는 댕기머리 광고사도 울고 갈 만큼 윤기가 흐른고 건강하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맑고 하얗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얀 옷에 긴 검은 생머리, 창백한 얼굴을 한 아름다운 귀신을 정직하고 인성 좋은 사또나, 잘생기고 지혜로운 암행어사가 사건을 해결해준다. 한을 풀어줬다. 하얀 피부에 검은 머릿결을 가진 백설공주가 새엄마의 질투로 죽임을 당한 후 관 속에 누워 있다가 왕자가 나타나 구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외모도 내용도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면이 많다. 정말 웃기는 신파지만 여성을 한참이나 비약했다. 자기 문제도 해결 못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남자들이 해결해준다. 실장님이 나오는 3류 드라마 같다. 여성을 공포의 주인공으로 삼고 이불속에서 덜덜 떨면서 보는 어린아이들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만들게 한다.


무덤의 커다란 봉분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해 만든 것이며 그 안에는 영혼도, 육체도 없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고 후손들이 마음 편하려고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허상을 공포로 삼고 자극을 이끌어 중독성 있는 연출을 하였다. 놀이기구도 비슷한 원리다. 공포로 말초신경이 자극되면 즐거운 감정인 짜릿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강렬한 공포 감정은 그 보다는 약한 스트레스의 감정을 상쇄시켜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짜릿한 감정 때문에 사라지기보다는 소리를 지르므로 감정의 발산이 오히려 맞을 수도 있겠다.


죽음보다 삶이 더 강렬하며 나도 살고자 무덤을 지나서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는 죽는다. 모두 사라진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는 죽음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살기 위한 에너지를 만들어본다. 죽기가 어렵다면 살기는 더 쉬울 수도 있으니깐. 재미있고 강렬한 감정을 찾는 것도 좋지만 산책이나 명상 등 조용히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살기 위한 에너지를 만드는데 중요하다.

무덤이 있어 길이 나 있고 그 길 따라 산으로 올랐다.
무덤이 있으므로 갈길이 생겼다.
죽음은 삶과 이어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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