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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군 Dec 15. 2023

시작

우연은 시작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누구나 시작의 기억은 흐릿하다. 그럼에도 지나간 시간 속에 나는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우연이 만들어낸 이정표 었다. 나에게 10년간 시간의 긴 항해를 출발하게 만들었기에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I로 살았다. 특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이었다. 가끔 그런 거 있지 않나 청소하다 우연히 발견한 물건들 사이에 이런 것들이 있었어하는 희미함 그것이 나였다. 그러기에 먼저 들어내지 않고 잘 융화되지 못하는 시간들의 삶 속에 겹겹이 쌓여 I가 되었다.


에피소드가 없는 굴곡 없는 학창 시절을 지나치고 대학을 갔고 그 속에서 나는 더더욱 희석되어 흐릿한 색깔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다가온 합법적인 마지노선의 보호의 끝을 벗어나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방출되는 시점이 남들과 다르지 않게 왔다. 하지만 막상 난 무엇을 하고 살 수 있을까 무엇이 나의 존재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쉽사리 내리지 못하였다.


전공을 살려 공무원 시험을 쳐보았다.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혼은 가혹한 현실의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결국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출발선 앞에서 서게 되었고 막막한 마음에 발걸음이 두려움을 머금게 되었다. 졸업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고 나는 결국 무언가를 해야 되었다. 언제까지 무리들 사이에서 보호받을 수 없다는 현실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보물 찾기를 하듯 망망대해 바닷속으로 향해 나갔다. 


만족스러운 배의 크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시적으로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았다. 그 시절 몇 안 되는 지인들 중 나의 방황을 딱하게 느끼는 형님이 있었다. 그의 소개로 일을 하게 되었다. 뭐 아르바이트의 개념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노동의 대가로 수익을 얻는다는 것이 그때 내게는 의미가 컸다. 요즘 방학기간 학생들이 체험학습이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10년 전은 막 그런 것들이 유행하는  시작점이었다. 내가 하게 된 일은 딸기 농장 체험을 하는 행사의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조금은 거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돈을 벌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버스를 두 번을 갈아타고 도착한 농장에서 하는 일은 딱히 특별히 어려운 것들은 아니었다. 하우스 안에서 중간에 서서 욕심을 부리는 이들에게는 적당히 자제를 시키고 체험자 분들이 문제나 문의사항이 있으면 그것들을 듣고 전달시켜 주는 일이었다. 무료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소소한 행복도 있었다. 행복한 어린아이들의 모습들에 힐링도 되기도 하고 지인 형님의 어머님이 가끔 딸기를 따로 봉지나 박스에 담아서 챙겨주었다.


여느 날처럼 집을 나서 출근이라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버스를 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일터에서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지내보자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날따라 유독 가족 단위의 단체고객들이 많았고 조금 개구쟁이 아이들이 많아서 지쳤었다. 지침에 퇴근만을 바라는 직장인들의 마음이 어떤 것이 얼핏 느껴졌다. 어찌 저지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기다린 시간이 다가왔고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사장님이자 형님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나에게 한 박스 가득 채워진 딸기를 주었다.



사실 너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지만 고된 하루였기에 왠지 조금은 귀찮은 짐이 하나 늘어난 것 같았다. 그래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웃으며 건네며 머나먼 길을 출발하였다. 한 번의 버스를 내리고 도착한 정류장에서는 잠깐의 공백의 시간이 들었다. 뭔가 지치고 힘들었지만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주변에 시간을 때울 곳들이 없나 찾아보았다. 눈에 들어온 곳들이 몇 곳 있었고 이 한 박스의 딸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냐가 나의 선택에 기준이 되었다.


결국 내가 들어온 곳은 A중고서점이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테이블에 딸기를 놓아두고 주변에 서가들을 구경해 보았다. 이 차분한 분위기에 이끌려 무언가를 읽고 싶어졌다. 제목이 당기는 도서를 하나 골라서 꺼내보았다. 표지를 펼쳐서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지성인인척 기분을 내어본다. 이내 잊고 있던 버스의 배차의 시간이 떠올랐다. 다시 양손에 딸기 한 박스를 들고 매장을 나가려 할 때 무언가 나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구인광고 사람 구함이라는 단어가 기한이 정해진 나의 딸기 밭 노동의 시간의 연장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카운터로 가서 물어보았다. 저 저 기  죄송한데 저 구인광고 보았는데 사람 구해졌나요라고 물어보았다. 뭔가 긴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구했으면 어떡하지 그럼 기회조차 없는 건데 나에게도 작은 행운이 주어지기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나의 마음을 들키지 않았기를 바라보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감춰지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아온 답변은 괜찮으시면 사무실에서 잠깐 이야기를 해보시겠냐는 말이었다. 


시간이 지난 당시 나의 말을 들은 직원 분은 참 독특하고 잊히지 않는 인상이었다고 했다. 웬 남자 한 명이 딸기 상자를 들고 와서 사람 구했냐고 하는 모습이 뜬금없으면서 재미난 사람이 아닐까라는 기대를 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 짧고 굵은 몇 마디 질문과 답변을 듣고 채용이 되었다. 그 당시 사람이 너무 구해지지 않는 시기였고  지쳐감에 누구든 지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 시점에 독특한 인상의 남자가 와서 일을 하고 싶다는 피력을 한 것은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그렇게 나의 10년간 서점의 직원으로서 삶이 시작되었다. 우연이 만들어낸 시작의 이정표를 기억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는 잊히지 않을 인생의 책갈피로 꽂혀 가끔 힘들고 지칠 때 펼쳐보고 힘을 내기도 하였다. 찬란한 시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빛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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