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동주와 인촌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그런데, 우리 걸어서 가는 거야? 얼마나 가야 부암동이냐?" 데이비드의 기억 그 어느 곳에도 부암동이라는 동네는 없었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데 효자동을 지나서 청와대 옆길을 통해 경복고등학교 앞을 거쳐 청운동과 닿아 있는 데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라서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 물론 산길은 아니고 차도와 보도가 잘 되어 있는 길이니까 무릎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한 시간? 오르막으로 한 시간은 좀 무리 아니냐? 버스는 없나?"


"서울에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 있겠나? 나는 그 길의 경치가 좋아서 보여주려고 한 건데 정 그렇다면 경복궁 앞에서 버스를 타지. 버스로 십 여분이면 도착할 거다."




버스는 창의문 앞에 섰다. 데이비드는 이런 높은 곳에 남대문처럼 생긴 큰 문이 있다는 것에 놀란 모양이다.


창의문

"이야.. 여기 경치가 아주 좋구만.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어? 아름답지만 난공불락의 요새 같기도 하고 아주 오묘하네 기분이..."


"서울이 좀 다이내믹하긴 하지. 와중에 여기는 청와대 근처라서 오랫동안 군사보호구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새로 지은 높은 빌딩도 없고 인왕산과 북한산 자락을 밟고 있어 자연환경도 좋지. 그렇지만 그래서 근현대까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도 격은 지역이기도 해.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 공비 사건을 포함해서.. 반면에 윤동주 문학관을 비롯해서 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등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접할 수 있는 곳이어서 겉보기와 달리 꽤 다이내믹한 동네지."


'윤동주 문학관? 그건 어디에 있는데? 내가 미국에서 동주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꽤 충격적이었거든"


"버스 내릴 때 못 봤어? 바로 여기 길 건너편에 있는데..."


""그럼 우선 거기부터 가보자, 윤동주 문학관. 소주는 그곳에 다녀와서 마셔야 할 것 같으네..."




데이비드의 눈에 들어온 윤동주 문학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많이 작았다. 윤동주라는 시인의 명성과는 달리 문학관에는 그 어떤 요란한 기념비도 과장된 조형물도 없었다. 오히려 일부러 윤동주라는 이름만 남긴 채 번잡한 도시의 모든 것을 지워낸 것 같은 분위기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윤동주 기념관이 아니라 문학관이라고 했나 보다.

문학관 내부는 낮고 어두웠다. 그 안에서는 걸음도 마음도 재촉할 수 없었다. 그저 천천히 걸을 뿐. 그리 많지 않은 시인의 삶의 흔적들이 전시되어 있는 그곳에서는 항일투사로서의 어떠한 영웅적인 과장은 찾아볼 수 없다. 조용함만이 흐르는 분위기에 데이비드는 시인 윤동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치는 경험을 한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시대의 고통을 말없이 견뎌내고 이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지셨구먼. 동주라는 영화를 보면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왜 윤동주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답답했는데, 이곳에 와서 그 답답합이 해결되었다고 해야 하나..."


"뭐가 어떻게 해결되었단 말이야?'


"미국은 어떤 면에서는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양극화가 되어 있는 사회여서 서로에 대한 불만이 엄청나고 그에 따라 시위는 물론이고 심각한 폭력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단 말이야. 나는 기본적으로 보수인데 지금의 보수 세력이 마음에 그리 들지 않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저 남 탓하면서 화만 내는 중이거든. 윤동주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옳았는지에 대한 질문도 없이 말이지."


"양극화는 미국만의 일은 아니라서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않지만 뭐... 하여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것 말이지?"


"그래. 학교에서 배울 때는 순순한 삶에 대한 의지니 엄격한 윤리 의식이니 하면서 시에 대한 해석을 외웠지만 여기 와서 보니 다 쓸데없는 이야기였어. 나는 그저 이런저런 핑계 없이 옳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구만."


"데이비드가 문학적 감수성이 이 정도였나?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술 한 잔해야 할 좋은 시간이네."




"데이비드가 감수성이 폭발한 덕분에 술맛이 좋겠어. 사실 이안이가 이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나도 조금 의아했거든. 그런데 덕분에 내 생각도 좀 명확해진 것 같기는 해. "


"필립은 또 뭐가 명확해졌다는 거야? 여기 오자고 했을 때는 이 집 만두가 생각나서 한 말인데 뭔가 일이 커져버린 것 같으네.. 우선 한 잔씩 들 하면서 이야기 해보자구. 여기 만두가 원래 오래전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 올 때 좋았는데, 요새는 손님들이 넘쳐서 기다려야 하는데 오늘은 운이 좋구만. 들어들 보셔."



"알코올 예찬자는 아니고 더구나 술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도 잘 알지만, 지금의 술 한 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듯하네. 데이비드도 아마 나랑 비슷한 생각일 텐데.. 안 그런가?"


"그래, 나도 좀 그렇네. 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중국 당나라 시인의 시를 번안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던데, 삶도 죽음도 어둡고 봄의 아름다움도 부질없으니 술이나 마시자라는 뭐 그런 내용이라고 들었거든. 그때는 그것도 멋지다 생각했지만, 술은 이렇게 마셔야 할 것 같아. 자신의 내면 속 부끄러움을 깨달을 때 마셔야 하지 않나 싶구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달은 후에 말이지."


"지금까지 마신 술은 다 헛 것이었단 말이네. 그럼 이제부터 진짜 술을 해야겠구만. 그래서 뭘 깨달았다는 말이여?"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과 다르게 침묵을 현실적 선택이라고 설명하거나 생존을 불가피한 타협으로 정당화하지 않았는 것을 넘어서 저항하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부끄럽다는 말로 정면돌파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지금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불합리한 환경의 강요에 의해 옳지 않은 일이지만 화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타협을 해오면서 살아온 것 아닌가 싶은 것이야. 결국은 윤동주 시인처럼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옳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늘 타협을 하면서 사는 것 아닌가? 특히 가족은 지금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기준으로 하면 가장 권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가장 불합리한 사회조직이기도 하거든. 그래도 유지를 하는 것 역시 옳은 일이지 않을까?" 필립은 데이비드가 그 정도로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이 신기하다.


"누가 뭘 없애자고 한다니?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안중근 의사와 같이 말이지? 물론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으로 윤리적 딜레마가 있다 할 수도 있지만 일반 대중이 아닌 비인류적인 일본 제국주의와 인물을 대상으로 한 일이니까. 반면에 인촌 김성수와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옳은 것을 외면했고..."


"내가 이래서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이야.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더라고. 인촌 김성수가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봐."


이안이 뭘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인지 데이비드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고려대학교의 창립자이자 동아일보 설립자, 경성방직 사장으로 민족 교육에 힘썼고, 언론인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에도 관여했다. 물산장려정책에 참여하여 조선의 경제를 부흥시키려 했고, 창씨개명에도 반대한 독립 운동가였지만, 일제 강점기 말년에는 매일신보와 잡지 '춘추'등에 일제의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면서 조선의 학생들을 태평양 전쟁에 참여토록 독려하는 글을 발표했고, 결국 이 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한 마디로 변절자 아닌가


"뭘 더 생각한다는 말이지?"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엄마 이야기를 했었지 아마? 이혼한 엄마도 친권이 있다는 것 말이지. 이번에는 이혼한 엄마가 아닌 그냥 엄마를 생각해 보자고..."


이안의 이야기는 날이 저물어가면서 조금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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