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괴물을 잉태한 시대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이안은 인촌 김성수 씨에 대한 대화와 같이 친일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판단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떤 영화의 대사에서 찾았다. 사람은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선택과 의사결정을 하게 되고, 그 모든 의사결정의 총합이 현재의 그 사람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마지막에 한 의사결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만의 기준은 따로 있었다.


"송병준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친일파야?" 데이비드는 인촌에 대한 생각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송병준이라는 인물이 이안이 단언하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라면 인촌과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인촌 김성수 씨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친일파라고 하는 한 개의 주머니에 모든 문제 인물들을 집어넣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일 거야. 그런데, 송병준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친일 반민족행위자인 것이 분명하다고."


"그 정도로 단언한다고? 이완용 같은 자들 외에 보통 친일파라고 하면 일본 압잡이 순경과 같이 악랄하고 비열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이상인가 보지?"


"폭력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지. 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당시 환경을 좀 알아봐야 해. 혹시 내장원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나?"


내장원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는 데이비드에게 필립은 내장원(內藏院)이란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과 재산을 전담하던 기관으로, 세입, 토지, 광산 전매권 등을 직접 관리하던 기관이었는데, 일본이 불법 합병 이전인 1907년에 황실 재정을 사적 재산 기관으로 규정하고 국가 재정에서 분리하여 통감부로 이동시켰다는 설명을 한다.


"그런데, 그 내장원이 남대문 시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이안이 네가 남대문 시장에 가야 친일파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하니..."


"우리가 얼마 전에 남대문 시장에서 원래 상설시장이 아니었던 장시(場市)가 창내장이라는 초기 상설시장으로 변화하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한 적 있지?"


"그런 이야기를 했지.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살던 혼마찌, 그러니까 지금의 충무로와 명동 쪽에 있던 일본인들이 상권을 점점 남대문 시장 쪽으로 확장하면서 조선인들의 경제를 침탈하기 시작하자 그것을 막고 상권을 지키는 과정에서 창내장이 생겼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것과 내장원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고?"


"상설시장화가 이루어지면서 시장을 관리하는 조직과 상인 단체들이 생겼어. 그리고 그런 조직을 대한제국 농상공부에서 관리했는데, 1901년에 시장 관리권이 농상공부에서 내장원으로 이전되었어."


"왜 시장을 황실에서 관리한 거야? 복잡하고 투명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구먼.”


"국가 재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인데..."


일본은 1905년에 이미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경제적인 착취도 시작했고, 대한제국은 근대화와 외세의 위협에서 자주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전기 회사, 철도 사업, 전차 사업, 군대 무기 구입 등에 필요한 자금이 내장원의 재산으로 상당 부분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고, 홍삼 전매, 광산 세금, 소금세 등등 전매 사업을 통한 수익과 세금을 내장원 소관으로 바꾼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시장관리권 역시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뒤 일본과 조선의 관료들이 일본군 사령부로 사용되던 대관정에서 찍은 기념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그러니까 식민지배를 계획하던 일본이 내장원을 걸림돌로 보았다는 말이구만. 그래서 내장원을 폐쇄하 모두 통감부로 이관을 한 것이고. 하긴 경제에 대한 통제 없는 식민지화는 불가능한 것이지. 식민지화의 목적 자체가 경제 수탈이니까.."


"그것에 더해서 우리가 언젠가 덕수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망상일 수는 있지만 남대문 시장을 일본은 자금 문제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이 모이고 공감하고 소통하며 전국의 정보가 모이고 퍼지는 위험한 곳으로 보았을 것이라 했었잖아? 일본으로서는 아주 불편한 장소였을 거야. 결국 일본이 내장원이 가지고 있던 남대문 시장의 관리권을 통감부로 이관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


"그래 이제 송병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 텐가?"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 고종이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광무개혁(1897~1907)이라는 것을 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대의 모습을 조금 엿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서."


'그 당시라면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무력 충돌을 했고, 영국과 미국은 이미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지."


"맞아, 그런 환경에서 고종은 국가를 근대화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지만, 근대화를 실행하고 지탱할 조건은 많이 부족했던 모순적인 전환기였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중립을 선언하려 했지만 지킬 힘이 없었고, 국제적으로는 취약한 신생국이었을 뿐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개혁의 의지와 방향성은 있었지만 밀어붙일 힘도 제도도 없었다는 것이구만. 개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돈도 없고..."


"나라를 새로 만들었으니 군비와 외교비도 필요한데 외채의 압박도 있었고 차관을 빌려오는 것도 어렵고, 전통적인 조세 체제는 이미 붕괴된 상황이어서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을 거야.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내장원을 통한 황실 재정을 동원하고 지계(地契)라는 근대적 토지 소유 증명 문서를 발급하면서 조세 부과를 합리적으로 하려 했지. 그리고 근대적인 회사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어."


"토지 조사도 했을 것이고, 잘했구먼. 그런데 뭐가 문제가 있었나?" 공인회계사인 데이비드는 이런 접근을 통한 개혁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무래도 미국이나 일본의 제도를 본떠서 한 것인데, 문제는 재정을 만들기 위해 개혁을 했지만 재정이 없어서 개혁이 왜곡되어 버렸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내장원에서는 우선적으로 왕실 소유의 토지와 소유주가 불분명한 토지를 확보했어. 남대문의 창내장 토지도 이렇게 내장원의 소유가 되었고, 임대비를 받고 관리를 하는 시장관리권도 확보를 하게 되었지만, 이런 일련의 개혁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인구의 절대 다수인 농민들이었어."


"농민은 왜?"


"광무개혁을 통해 회사제와 주식제를 도입하고 조선농업회사라고 하는 관영 또는 관민합작 성격을 가진 주식회사 형태의 회사를 만들었거든. 이건 그간의 봉건적 소농 중심의 농업을 자본과 기술 기반의 산업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단 말이야."


"꽤 현대적인 시도구만. 그러니까 토지를 모아서 대규모 농장을 마련하고 그것에 자본과 기술을 집중 투입해서 농사를 지으면 생산성과 효율이 높아질 수 있으니 그에 따른 이익을 배분하겠다는 계획이네. 그런데?"


"그러려면 토지의 소유권이 확실해야 할 것이니까 지계를 발급했어야 하는데, 문제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민이었다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 농민들은 대개 대지주의 땅에서 소작농으로 농사를 짓거나 소유주가 불분명한 땅을 일궈 관습적으로 자기 땅으로 알고 농사를 지어왔거든. 결국 소유주가 불분명한 땅은 내장원의 자산이 되어 버리니 농민들은 땅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히 소작농화 된다는 것에 반발이 생긴 것이지."


"음... 결국 근대 농업 경영 개념을 도입했지만 실행이 어려울 정도로 제도의 정비가 없었고, 토지 보상을 위한 자금도 없었던 거네. 그건 좀 아쉽다. 근대화가 일제 식민지에서만 시작되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확실히 부정할 수 있을 개혁 프로그램이었는데 말이지."


"게다가 시간도 없었어. 오랜 관습을 개혁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건 뭐 시작하자마자 러일전쟁에 을사늑약 등의 온갖 방해물이 등장하고, 고종을 보필해서 제도를 만들고 재정을 확보할 방안을 강구해야 했던 신료들은 영 쓸모가 없었던 것 같아."


"결국 고종의 광무개혁은 본격적으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중단되고 말았으니까 아쉽지만, 진짜 문제는 이미 시작한 개혁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 예를 들면 조선농업회사와 같은 조직이나 기관들의 관리 주체가 유명무실해진 것이지. 게다가 지계(地契) 제도로 인해 국가가 인정하는 땅 주인들도 생기기 시작했는데,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지. 와중에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광무개혁이 중단되던 시점에 고종 황제기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성공하지 못한 헤이그 특사를 파견 후 강제 퇴위되었으니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과 정부 기능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지..."


"이제 좀 알만하네. 이미 조선의 미래는 일본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생각과 그에 따른 타협 또는 매국등의 일들이 벌어질 만한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 와중에 송병준이라는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한 모양이구만."


시대는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시대를 굴절시키는 모양이다. 사람의 선택은 그럼에도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데이비드는 다시 윤동주 문학관에서의 느낌이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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